국화 옆에서 민음사 세계시인선 50
서정주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 서 정 주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룩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기어 드는 소리, ......

* 크리스마스, 늦게 잠에서 놓여난 나는 서정주 부음 기사를 접해야 했다. 마침 눈이 적당히 내렸고, 그 하늘을 꼭 보고 싶어서, 담배 한 대 물고 집 근처를 배회했다. 미당의 많은 시 중에서 이 시가 생각났다. 눈을 밟을 때마다 지독하게 따라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눈물처럼 내렸다가, 생명처럼 모이는 소리,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이 깃들이어 오는' 것처럼. 눈은 죽음까지도 덮는다.

아이들이 눈을 뭉치고 있었다. 괜찬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무 -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품집 창비시선 1
신경림 지음 / 창비 / 1975년 3월
평점 :
품절


1960~70년대 모순된 농촌 사회의 모습은 시집 <農舞>에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거듭 계속되는 생활난 속에서 그들은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묵내기 화투를 치고' '어떡헐거나./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색시/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겨울밤' 中) 라고 탄식하며 선술집 막소주에 취해 체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합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시골 큰집' 中) 앞에 핀 국화꽃은 누렇게 뎁혀진 솥처럼 따갑게 눈을 찌른다. <農舞>에 반영된 1960년대 농촌의 사회상은 조합빚, 전표 등으로 상징되는 세습되는 가난의 덫이다. 이는 1960년대 대농촌정책의 실패와 그 허상을 잘 드러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편성과정에서 남한 사회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하청업체의 성격을 띄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도시로 떠밀리는 농촌의 사회는 '용바위집 영감의 죽음 따위야/스피커에서 나오는/방송극만도 못한 일'('오늘' 中에서)과 같이 흉흉해진다. 이러한 농촌의 비극적인 상황은 하층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야기하는데, '마침내 장마가 져도 나이 어린 갈보는/좀체 신명이'( '장마 뒤' 中) 나지 않고 고단한 농가의 일과(日課) 뒤에 벌어지는 '그 술판은 이내 싸움판으로 변'('그 겨울' 中)하게 만들고 만다.

신경림의 <農舞>가 한국의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치하고서라도, 시집 곳곳에 투영된 비극적인 농촌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들과 작가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아래 저질러진 유형, 무형의 민족적 비극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한국전쟁의 참혹함과 그 전쟁의 후유증으로 남은 민족의 비극은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눈길' 中) 부랑아를 양산하고, 농촌 그윽한 들녘의 바람도 '굶어죽은 소년의 원귀'('눈길' 中)처럼 들리게 만든다.

'아침부터 주정을 하는 당숙'('잔칫날' 中),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장마' 中) 등은 이 시기 피폐한 민족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시골 큰집' 中)는 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잔칫날' 中)고 주정을 하는 또다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신경림의 <農舞>는 1960년대 농촌 사회의 피폐함에 대한 생생한 고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이며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얼굴 없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튼실한 서정성에 기반한 신경림 시가 가져다 주는 진한 울림은 그 어떠한 정밀한 보고서보다도 큰 위력을 발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고현정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시를 읽다 말고 가끔 무릎을 탁, 치거나 천장을 한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이 시가 그랬다. 그것은 우선 표현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빗방울의 향연, 그것을 音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감각은 새들을 만나면서 하나의 音樂이 된다. 새들이 타악기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분명히 시의 영역이다. 이 악기는 어떻게 시의 동력으로 작용하는가?

시가 굳이 音樂에서 유래한 예술장르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에서의 어떠한 감동이나 울림은 그것이 음악적 효과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서정주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라는 시에서의 '괜, 찬, 타'의 반복이 주는 효과는 그것이 눈이 내리는 모습과 어우러짐으로써 온갖 생명의 화음을 만들듯 시를, 도드라지게 해준다. 이 시는 분명히 음악적 성취를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제 뿌리를 다해 흔들리는' 꽃말들의 떨림이 '영희, 영호, 영수...' 와 같은 구체화된 이름을 얻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리으로서의 '音樂'을 넘어서 어떠한 메세지를 던져준다.

'영희, 영호, 영수'라는 인물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는 이 꽃말들에게 저 '낮고' '작고' '볼품 없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 '원정'(정원사)은 자연스레 그 꽃말들의 근원이 된다. 그 원정이 뿜어내는 음악은 잘 다듬어진 음악이라기 보다, 세간의 생활인들이 흥얼흥얼 아무렇게나 뿜어내는 음악과 닮아있다. 이 시는 그러니까, 작은 생활인의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노래와 같은 것이다. 선술집에서 제 흥에 못 이겨 흘러나오는 인부들의 때절은 노래와 같은. 독자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자연스럽게 '깊은, 나무들이 울리는 푸른 풍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푸른 풍금의 소리는 '볼품 없는 한 생'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소리이다.

다시 한번 거칠게 말하자면, 시는, 현실의 패배에서 나온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실의 패배를 어떻게 노래하느냐. 정현종은 김수영의 시를 '그의 현실은 패배했지만, 현실의 패배를 노래하는데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 시는 '원정'이라는 아주 작고 사소한 현실을, 그 현실이 이름 붙인 '영희, 영호, 영수'라는 더 작은 현실을 노래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를 왜 쓰는가, 라는 커다란 명제와 부닥쳤을 때, '부재를 기억하기 위하여' 라는 말이 떠오른다. 부재를 기억하는 방법에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이 시는 일상의 세밀한 소멸을(동시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기억을)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시인에게 우려되는 것은 어떤 끊임없는 깨달음의 언술이 주는 유혹이다. 가령, '무엇을 가꾼다는 것은 잘라내거나 뽑아내는 일이라는 걸'과 같은 구절은 그것이 많은 폭의 시적 함의와 감동을 줄지라도 시인이 어떤 지면에서 피력했던 '깨달음의 영역으로의 추락'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시인에 대한 기대이기도 한데, 나는 장만호의 시가 잘 다듬어진 고급취향의 앨범보다는 한없이 볼품 없어서 저잣거리에서 회자되는 그런 떨림의 음악이었으면 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바램이겠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낮은 노래'에 한없이 귀를 열어놓고 싶은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운 여우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일전에 어느 자리에서 안도현 시인에게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안도현의 시'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수많은 그의 시편들 중에서 그는 서슴없이 이 시를 꼽았다. 이 시는 그의 시의 특징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우선 읽기에 쉽다. 그저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에 말없이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이 시가 읽기에 쉽다는 것과 '감동'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 감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비틀어버리는 데서 온다.

이 시에서 강물 소리가 나는 이유를 들여다보라. 그것은 물의 입자와 입자가 맞부닥쳐 내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다. '어린 눈발들'이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뒤척이'기 때문에 나는 것이다. 이 사소한 풍경이 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상황의 역전, 그리고 그 역전의 논리가 이 언술을 시로 만들어준다. 이 상황의 역전을 뛰어넘어 이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어린 눈발'들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에서 온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더욱 강 속으로 빨려들어,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살얼음을 깔기 시작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물론,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태어난 풍경이지만, 그 살얼음의 마음에(!) 읽는 이의 눈이 닿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풍경 이상의 그것, 즉 감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겨울 강가에 가서 '살얼음'이 어떻게 깔리는가를 바라보라. 어느 순간, 마음에 와락, '어린 눈발'같은 것들이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첫사랑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머뭇거리던 고등학교 시절, 숨가빴던 밤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고 대신에 '삐삐'라는 것이 있던 때. 전화기에다 동전을 한 개 넣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 그 수화기통에 남겼던 말이 잠을 잘 때까지 따라오던 그 아련한 말들의 웅덩이.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자동응답기에다 남겨질 자신의 말들 앞에 서 있다. 그 말들은 이미 자신을 떠나 '밤의 절벽에다' '스스로 몸을 던지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심장의 펄떡거림으로 생긴 말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갈등은 여기에서 생긴다. 내 것임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님, 부재하지만 어딘가에서 '존재'라는 옷을 입고 둥둥 떠 있는 말들. <관계>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관계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왜곡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내 심장에서 펄떡거리던 말들은 '네 귓구멍을 통해 곧장' '너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밤'이 아닌 '대낮'에 '윤기를 잃은 다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너'에게 전달된다. 이 단순한 시적 알레고리는 '전화'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던진다.

인터넷 문화의 대표격인 < e-mail>이 보편화되면서 더 많은 소통의 방법이 주어졌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당신이 밤새 끙끙 앓면서 쓴 편지가 모니터에 빨려들어가고, 거대한 중앙컴퓨터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긴 - 긴 -' 케이블을 타고, 어느 순간에, 다시 모니터를 힘겹게 빠져나와 사랑하는 그(그녀)에게 전달되었을 때의 그(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그녀)의 '몸의 크고 작은 반응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