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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중전화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첫사랑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머뭇거리던 고등학교 시절, 숨가빴던 밤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고 대신에 '삐삐'라는 것이 있던 때. 전화기에다 동전을 한 개 넣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 그 수화기통에 남겼던 말이 잠을 잘 때까지 따라오던 그 아련한 말들의 웅덩이.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자동응답기에다 남겨질 자신의 말들 앞에 서 있다. 그 말들은 이미 자신을 떠나 '밤의 절벽에다' '스스로 몸을 던지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심장의 펄떡거림으로 생긴 말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갈등은 여기에서 생긴다. 내 것임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님, 부재하지만 어딘가에서 '존재'라는 옷을 입고 둥둥 떠 있는 말들. <관계>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관계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왜곡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내 심장에서 펄떡거리던 말들은 '네 귓구멍을 통해 곧장' '너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밤'이 아닌 '대낮'에 '윤기를 잃은 다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너'에게 전달된다. 이 단순한 시적 알레고리는 '전화'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던진다.
인터넷 문화의 대표격인 < e-mail>이 보편화되면서 더 많은 소통의 방법이 주어졌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당신이 밤새 끙끙 앓면서 쓴 편지가 모니터에 빨려들어가고, 거대한 중앙컴퓨터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긴 - 긴 -' 케이블을 타고, 어느 순간에, 다시 모니터를 힘겹게 빠져나와 사랑하는 그(그녀)에게 전달되었을 때의 그(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그녀)의 '몸의 크고 작은 반응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