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여우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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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일전에 어느 자리에서 안도현 시인에게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안도현의 시'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수많은 그의 시편들 중에서 그는 서슴없이 이 시를 꼽았다. 이 시는 그의 시의 특징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우선 읽기에 쉽다. 그저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에 말없이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이 시가 읽기에 쉽다는 것과 '감동'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 감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비틀어버리는 데서 온다.

이 시에서 강물 소리가 나는 이유를 들여다보라. 그것은 물의 입자와 입자가 맞부닥쳐 내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다. '어린 눈발들'이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뒤척이'기 때문에 나는 것이다. 이 사소한 풍경이 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상황의 역전, 그리고 그 역전의 논리가 이 언술을 시로 만들어준다. 이 상황의 역전을 뛰어넘어 이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어린 눈발'들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에서 온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더욱 강 속으로 빨려들어,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살얼음을 깔기 시작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물론,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태어난 풍경이지만, 그 살얼음의 마음에(!) 읽는 이의 눈이 닿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풍경 이상의 그것, 즉 감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겨울 강가에 가서 '살얼음'이 어떻게 깔리는가를 바라보라. 어느 순간, 마음에 와락, '어린 눈발'같은 것들이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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