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톰 라이트 지음, 김재영 옮김 / IVP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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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한 것은 2007년인가 2008년 봄에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있었던 톰 라이트 강연 mp3를 접하고 나서이다. 알듯말듯 쏟아내는 그의 강연을 듣고 눈으로 확인하자고 찾아 읽은 책이다. 원제는 Simply Christian.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쉽게 풀어쓴 기독교 변증서이면서 기존 신자에게는 교정서이기도 하다.
책에서 읽었는지 강연에서 들었는지 가물가물 한데 1950년대 변증서로 널리 읽힌 C. S. Lewis의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의 21세기 판이라는 별명이 따른다.

변증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기독교에 문외한인 경우는 읽기가 어렵다. 처음 몇장은 나름대로 비신자를 고려하면서 글을 쓴 흔적이 드러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신자용 서적으로 바뀐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루이스가 제기한 공통의 관심사는 "도덕" 혹은 "윤리"였다.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식의 논증을 시도했고 그것이 주효했다.
톰 라이트가 파악한 관심사는 "정의" "영성" "미학"이다. 이 단어들만 보아도 21세기적이다. 이 가치들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거론한다. 여기까지의 논증은 루이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성서학자다운 그의 면모는 성서를 이해하는 세계관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노력에서 발견된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는 세계관을 크게 범신론, 이원론, 유대적 세계관으로 구분하며 유대적 세계관의 독특성을 놓치면 기독교의 정수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유대적 세계관은 무엇인가? 유대적 세계관은 하늘과 땅이 분명 객체로 존재하면서 분리되지 않고 현재에 섞여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은 저 멀리 있는 '하늘'에서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서 누리를 수 있는 현존이다.
예수 역시 이런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거다. 비록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유대 세계관에서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지금 이땅이 버릴 곳이 아니라 악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통해 변화시킬 땅이기에 예수는 이 땅을 버리고 저기 가나안을 보며 나아가자고 권면한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오도록 우리를 세우셨다는 거다 . 하나님이 이 땅에서 원하시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아신 분이 예수이시며 그 분의 부활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될 이 땅에 대한 소망을 붙잡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2000년이 넘도록 기독교인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소망을 확인하는 자리이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비전으로 갱신되는 자리여야 한다.

공 감한 그의 비유는 강과 나무의 비유이다. 그는 기독교가 강과 나무라고 한다. 강이 많은 지류들이 모여 강으로 흘러들고 바다로 가듯이 여러 다양한 형태의 신앙을 보여주면서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의 소망으로 수렴되어지면 동시에 나무와 같이 뿌리는 같지만 여러 가지들이 나오고 그 가지들에서 그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수렴과 분리의 변증 속에서 기독교는 성장했고 자랐다고 말한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큰 그림 속에서 기독교가 그렇다고 하면 작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역시 강과 나무의 양면적 모습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경험하는 기독교는 다양성은 말살되고 오히려 단일성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개 인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통찰과 교회에 대한 강조가 무색하게 영국 교회의 교세나 기독교 인구의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들이 포진한 영국인데 교회에 나와서 실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축하는 사람들을 극히 적다니...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두려운 생각도 든다.
교회와 신학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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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유병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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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베스트셀러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를 읽고 있는데 도서관에 이 책을 가져간다는 것이 깜빡해서 집에다 두고 와서 도서관 책상 위에 놓인 서른살 경제학을 들춰보았다.
제목만 봤을 때는 흔히 나이를 연관시킨 제목들이 상술에 쩔어 있는 책들이 많아서 기피하려고 하는데 차례를 살펴보고 부담이 없겠다 싶어서 빌려놨었다. 그런데 들춰보는데서 끝내려는 다짐이 한장 한장 읽어가면서 결국은 끝장까지 읽어버리는 독서로 이어졌고 경제를 아는 30대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이 책은 저자도 밝히듯이 서점가에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재테크의 잔재주를 부리는 책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경제의 일반을 논하는 큰 그림을 제공하려 애썼다. 330여장 되는 분량으로 경제 일반을 아우른다는 것도 욕심이지만 그 이상은 일반적 상식 수준의 경제 지식이 필요한 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적정량의 분량과 부크홀츠의 책이 줄 수 없는 국내 경제의 실례를 통해 경제의 각종 개념과 친숙하게 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배어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분석하고 실례를 보여준 것은 흥미롭기 이를 데 없었다.
순환출자구조의 부조리를 삼성그룹의 실례를 통해 분석해 주어서 비자금 조성 여부로 특검 중에 있는 삼성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금융과 관련한 각종 지표와 개념 설명을 차근차근 실례를 들어 해 준 것도 인상적이다. 이해는 가지만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내일부터 신문보며 경제관련 기사의 이해도를 점검하는 데서 체크를 해봐야 할 것 같고 한가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저자의 연구는 고령화 사회 진입에 따른 30대가 짊어져야 할 사회구조다. 지금의 30대는 한국의 베이붐 1세대의 출산정책에 따라 전체인구대비 최대인구분포를 가지며 30대가 중년이 되어서 '사오정' '오륙도'를 회자할 때는 지금의 구조조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양극화의 심화는 중년이 얼마남지 않은 30대의 실존을 불안한 바람 앞에 촛불로 몰아가고 있다는 거다.
이러한 위기가 30대부터 경제에 눈을 뜨고 노년을 준비해야 할 당위를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고령화 사회 진입과 30대의 인구수가 가지는 치열한 경쟁구조를 감안하면 노년의 이야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해야 하나?

고성장 시대가 저물고 저성장 시대가 지속되는 향후 경제 구조 속에서 저자의 재테크 제언은 부동산과 제1금융상품은 아니라는 거다. 부동산이야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몇년만 지나도 은퇴한 베이붐 세대들의 매각이 본격화 되면서 거품이 가실 것이고 저금리가 본격화 된 이 시점에서 은행권 금융상품으로 재테크하는 것은 명목금리와 실질금리의 관계를 비춰보면 오히려 금리를 웃도는 물가성장률로 마이너스 수익을 만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고로 선진구조의 재테크는 주식시장이며 리스크가 적은 펀드가 노년을 준비하는 30대의 경제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더 마음에 들었던 저자의 제안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재테크"라는 점이다.
금리 몇 퍼센트에 연연하기보다는 나의 경쟁력을 높히는 것이 몇 퍼센트 금리에 관심 갖는 것보다 낫다는 거다.

매뉴얼 대로 재테크를 할 수 없는 형편의 나로서는 얼마나 위로가 되는 제언인지..^^

경제란 기사에 나오는 개념들의 주요 의미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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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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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하준 교수의 책은 처음 읽는데 알라딘 서평을 기웃거려보니 상당한 지명도를 소유한 경제학자인가 보다. 하기야 약력을 보아도 경제학의 산실인 캠브리지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 보통은 아니겠다 싶었다.

제목에서 보여준 비틀기는 시종일관한 이 책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신자유주의 논의는 이미 한미FTA 이전부터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고 글로벌 시대의 경제구도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정책기조처럼 회자되었는데 장하준 교수는 말도 안되는 속임수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부자나라의 거짓말을 포장한 경제 용어라고 일축한다.

소시 쩍부터 경제 하면 '시장'의 힘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는 애덤스미스의 개념들만 머리 속에 둥둥떠다니니 작은 정부,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가 잘못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공평한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니 얼마나 이상적인 경제논리인가! 그러나 저자는 이렇듯 당연한 진술에서 과연 '공평'한 경쟁이 가능한가 하고 되묻는다. 소위 시장 중심의 경제를 운운하는 대부분의 부자나라들이 '돕는다'는 명목으로 개발도상국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할 것은 종용하지만 완전히 개방된 시장에서 선진국의 경제주체와 개도국의 경제주체가 공평한 경쟁이 가당키나 하냐는 거다. 그러니 그들은 돕는 척을 하며 개도국을 삼키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다.

자본주의가 마치 시장이 주도한 경제논리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 역사는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각종 규제와 정부의 보호 속에서 성장한 경제 논리가 자본주의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19세기 만해도 서구 열강이 산업화로 일어나기 위해 비대한 정부가 각종 규제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경쟁할 능력이 갖추어지기 까지 그것이 짧게는 10년, 30년 길게는 100년이 걸리도록 보호해 놓고선 이제 필살기를 익히고 나니 개도국에는 정부가 크면 안된다는 둥 시장이 경제를 이끌어가도록 두어야 한다는 둥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거다.

이 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신자유주의의 경제정책 기조에 대한 역사적 반례로 일관한다. 헛소리말라는 거지.

혼자 힘으로도 겨우 서있는 개도국을 상대로한 시장개방 압력은 있는 놈이 더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
저자는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옳은 길을 찾아 가는 것은 의도하지 않게 많은 불편한 진실을 직면해야 하고 그것을 넘어야 하지만 그저 쉬운 길만 찾아가면 혹시 만나게 되는 불편한 진실들을 덮고 내 이익은 챙길 수 있지 않겠는가!
인생사 그래서 옳게 사는 게 어려운 게 아니겠는가.

읽는 내내 비판적이다보니 왜 이 사람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렇게 앨러지 반응을 할까 혹은 지나치다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 비판이 개도국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꼼수에 말려 그나마 힘없이 서 있는데 주저 앉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대단한 것처럼 떠벌리는 국가적 관계 역시 개인 간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이기주의적인 꾀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하니 한 숨 뿐 인데 그 가운데서도 이렇듯 약자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을 만나니 마음 한켠이 따스해진다.

한미FTA로 자유무역에 대한 환상을 정부가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고 한편에서는 못살겠다고 농민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아 농산물 남아도는지 알았더니 농산물 자급률이 35%밖에 되지 않는다니 자유무역하면 농산물 시장의 주도권이 결국 남 손에서 놀아나는 거고 안그래도 전세계적으로 애그플레이션을 걱정 하던 차에 쌀사먹기도 힘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새우깡 가격도 오르고 통계청 가보니 농산물 가격이 전년 동월대비 두자리수 퍼센트씩 인상되었다.

국가 경제 꾸리는 분들이야 일류 경제학자들이겠지만 장하준 교수는 일류가 삼류보다 못할 때가 있다고도 하니 트렌드 쫓아가다 망하는 1997년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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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유병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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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를 읽고 있는데 도서관에 이 책을 가져간다는 것이 깜빡해서 집에다 두고 와서 도서관 책상 위에 놓인 서른살 경제학을 들춰보았다.
제목만 봤을 때는 흔히 나이를 연관시킨 제목들이 상술에 쩔어 있는 책들이 많아서 기피하려고 하는데 차례를 살펴보고 부담이 없겠다 싶어서 빌려놨었다. 그런데 들춰보는데서 끝내려는 다짐이 한장 한장 읽어가면서 결국은 끝장까지 읽어버리는 독서로 이어졌고 경제를 아는 30대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이 책은 저자도 밝히듯이 서점가에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재테크의 잔재주를 부리는 책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경제의 일반을 논하는 큰 그림을 제공하려 애썼다. 330여장 되는 분량으로 경제 일반을 아우른다는 것도 욕심이지만 그 이상은 일반적 상식 수준의 경제 지식이 필요한 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적정량의 분량과 부크홀츠의 책이 줄 수 없는 국내 경제의 실례를 통해 경제의 각종 개념과 친숙하게 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배어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분석하고 실례를 보여준 것은 흥미롭기 이를 데 없었다.
순환출자구조의 부조리를 삼성그룹의 실례를 통해 분석해 주어서 비자금 조성 여부로 특검 중에 있는 삼성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금융과 관련한 각종 지표와 개념 설명을 차근차근 실례를 들어 해 준 것도 인상적이다. 이해는 가지만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내일부터 신문보며 경제관련 기사의 이해도를 점검하는 데서 체크를 해봐야 할 것 같고 한가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저자의 연구는 고령화 사회 진입에 따른 30대가 짊어져야 할 사회구조다. 지금의 30대는 한국의 베이붐 1세대의 출산정책에 따라 전체인구대비 최대인구분포를 가지며 30대가 중년이 되어서 '사오정' '오륙도'를 회자할 때는 지금의 구조조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양극화의 심화는 중년이 얼마남지 않은 30대의 실존을 불안한 바람 앞에 촛불로 몰아가고 있다는 거다.
이러한 위기가 30대부터 경제에 눈을 뜨고 노년을 준비해야 할 당위를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고령화 사회 진입과 30대의 인구수가 가지는 치열한 경쟁구조를 감안하면 노년의 이야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해야 하나?

고성장 시대가 저물고 저성장 시대가 지속되는 향후 경제 구조 속에서 저자의 재테크 제언은 부동산과 제1금융상품은 아니라는 거다. 부동산이야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몇년만 지나도 은퇴한 베이붐 세대들의 매각이 본격화 되면서 거품이 가실 것이고 저금리가 본격화 된 이 시점에서 은행권 금융상품으로 재테크하는 것은 명목금리와 실질금리의 관계를 비춰보면 오히려 금리를 웃도는 물가성장률로 마이너스 수익을 만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고로 선진구조의 재테크는 주식시장이며 리스크가 적은 펀드가 노년을 준비하는 30대의 경제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더 마음에 들었던 저자의 제안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재테크"라는 점이다.
금리 몇 퍼센트에 연연하기보다는 나의 경쟁력을 높히는 것이 몇 퍼센트 금리에 관심 갖는 것보다 낫다는 거다.

매뉴얼 대로 재테크를 할 수 없는 형편의 나로서는 얼마나 위로가 되는 제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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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
에르나 반 드 빙겔 지음, 김성민 옮김 / 다산글방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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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에 있을 때 잠깐 융의 이론에 나오는 기초 개념들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이 사람 참 난 사람이다'라는 유쾌한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캇 펙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융의 인용을 하는 것을 보고 후속작을 읽기 전에 전이해도 얻을 겸해서 읽었다.


스캇 펙의 400여 페이지, 하드커버의 양장본도 아닌데 200여 페이지 남짓 한 이책을 읽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분명 스캇 펙이 이야기한 정신분석의 영성적 측면은
이미 융의 머리 속에서 윤곽이 드러났다는 인상이 깊게 든다.물론 1차 자료가 아니라 2차 자료이기 때문에 융의 육성을 가감없이 듣고 느낀 바는 아니지만...OTL


이 책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융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무의식"의 발견이 프로이트의 공헌이었다면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을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집단무의식으로 확대한 것은 융(Jung)의 공헌이다.
집단 무의식을 통해 인류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바를 모든 인간은 공유하고 있으나
다만 각성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그는 각자 의식의 세계 안에 있는 자아(self)가 집단무의식의 핵이라할 자기(Self)와 통합되는 것, 즉 개성화(individuation)가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주어진 심리적 과제라 한다.


융의 이러한 주장이 영성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지어진 인격적 존재이다.
모든 인류가 공유한 하나님의 형상...
융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집단무의식 속에 숨겨진 "자기"였다.


이 "자기"와 통합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융이 자신의 개성화를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연관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그의 연구를 심리학의 울타리 안에서 발전시키고 진행했다 한다.


그는 정신분석에서 "개성화"의 요청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하기 이전에 모든 인간에게 요청되는 심리적 작업이다.


물론 융도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자신의 정신분석 작업이 그 꼴에 있어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도 종교는 정신분석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만, 정신분석이 종교의 초월적인 관심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한다.




융의 심리학이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에서 보면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알고는 있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융은 심리학의 언어로 담아낸 것이다.
신앙공동체의 유산과 언어없이 누구나 알기 쉽게 말이다...
즉, 폐쇄적인 신앙으로의 초대의 문을 개방적으로 열어 재쳤다고나 할까...




결국 문제는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다.
Know myself...
나는 앎으로 너를 안다.
심오하다...그에게로 가는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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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bi00 2009-11-0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님의 형상 회복,
의식/집단무의식의 자아 통합
깨달음
성리학의 天心과 도심 자각
인간 신성의 회복.
참자아(팔머)
-탐색의 과정이나 길은 다르지만 인간이 결국 육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빵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대뇌피질의 이성작용만으로 살거나 감정뇌의 작용만으로 사는게 아니라 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글 감사합니다. 읽어봐야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