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된 문장들
박범신 지음 / 열림원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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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은 <은교>라는 작품에서 명대사를 남겼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또한 박범신이라는 작가를 지칭하는 표현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그래서일까. '청년'이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린다 싶다. 이 작가.  

또한 박범신 작가의 글에는 유독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젊게 늙고 싶다던 그의 소망은 이 단어를 선택함으로 자주 드러나곤 한다.

 

늙은 청년이 장소마다, 시간마다, 기록하고 기록한 글귀들을 엮어 만든 <힐링>을 읽었다.

힐링이라는 단어는 꽤 포괄적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박범신 작가의 글귀들을 총망라해줄

책 제목으로는 다소 역부족이다 싶다. 너무 좋은 글귀들을 감싸 안아주는 제목치고는 너무 밋밋하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를 소설로 만났을 때보다, 그가 쓴 짧은 글귀들로 그를 만나는게 더 재밌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는 글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힐링> 속 박범신의 글들, 그 가운데 몇 편을 타이핑했다.

 

 

 

 

 

 

#
불우했던 화가 고흐가 그랬지.
생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이라고.

모처럼 날씨가 좋아 햇빛 따라 걷는다.
봄이 어느새 가고 있다.
봄은 화려하지만 산만하고 황홀하지만 가볍다.
젊은 당신들이 가진 욕망은 봄에 가깝고
내 욕망은 요즘 대부분 가을의 깊은 갈망에 닿아 있다.
걸어서 별까지 가고 싶다.
고흐처럼. 

 

 

 


#
논산에선 가난한 밥상, 쓸쓸한 배회로 산다.
최소한의 식사로
더 멀고 쓸쓸한 길을 배회하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당신들, 너무 많이 먹는다. 그러면서 배고프다, 배고프다, 아우성이다.  

논산에선 먼 도시의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더 환히 들리다. 더, 더, 더라고 아우성치는 소리.  

배불리 먹으면서, 그러나 더, 더, 더라고 아우성치는 당신. 무엇이 진실로 결핍돼 있는지 모르는 불쌍한 당신. 

 

 

 


#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침묵의 말들을 알아듣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다.
목청껏 떠들기보다 침묵하기가 사실은 훨씬 힘들다.
제발 호숫가 이 외딴집까지
세상이여,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지금 내가 그리운
나의 고요한 본성에 담겨 있고 싶다.
이곳엔 그리운 나에게 가는 길이 가깝다. 

 

 

 

 

'이곳엔 그리운 나에게 가는 길이 가깝다'는 문장, 이 한 줄이 압권이다.

'그리운 나에게'라는 표현도, 그리고 그 곳으로 가는 길이 '가깝다'고 표현한 것도 그렇고.

뭘 먹고, 어디서 지내면 이런 글이 나오는거지. 이런 표현이 나오는거지.

 

다른 이는 박 작가의 다른 부분에서 감동 받을지도 모른다. 근데 나는 이 줄.  

이 맨 마지막 줄이 유독 마음에 콕 박혔다. 그리운 나에게 가는 길이 가까운, 그 지름길을 알고 살아가는 작가,

그가 지키고픈 유일한 길은, 따라오지 마라고 말하며 꾹꾹 숨겨두고 싶은 길은 논산의 작업실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런 작업실에 멋드러진 의미 하나 부여하고 작품활동 이어가는 박범신 작가가 참 부럽다.

 

 

 


#
관계에서, <끝>이라고 쓰는 것이 사실은 제일 무섭다.  

마침표는 문장에서만 사용할 것이지 삶이나 사랑에서 사용할 것이 아니다. 

 

 

 


#
가을 숲이다.
숲속에 앉아 있으면 나도 한 그루 나무 된다.
혹한을 견뎌내야 하는 소명이 가득 차 있으므로
가을 숲은 여름 숲보다 오히려 더 풍성하다.
어떤 나무는 비바람에 꺾여 있고 어떤 나무는 늙어 쓰러진 채 죽어 있다.
그래도 그 사이사이에서 새로 어린 나무들이 자라므로
숲은 영원하다. 그게 희망이다.
역사가 그럴 것이다.
 

 

 


#
예전엔 목표가 꿈인 줄 알았다. 아니다. 꿈은 목표 너머에 있다.  

의사가,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꿈이랄 수는 없다. 그건 목표에 불과하다.  

의사가 되면, 국회의원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나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그 이상이 꿈이다.  

목표 너머의 비전이 없는, 내 기득권을 위한 출세는 더럽다.  

오로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자고 꾸는 꿈이라면 젊은이여, 차라리 꿈꾸지 말라.
 

 


 

 

기득권을 위한 출세는 '더럽다'.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자고 꾸는 꿈'이라면 꿈꾸지 말라.

무섭게도 말한다. 하지만 여러번 곱씹으며 읽어보니, 참 와닿는다. 무섭지만 진실이다.

무섭지만 맞는 말만 했다. 잠시잠깐의 만족을 위해 내 양심을 '겉멋만 잔뜩 든 꿈'과 맞바꾸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직업과 꿈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왜' 하려는지에 대해 계획을 세워봐야 겠다.

이미 나에겐 직업이 주어졌고, 이제는 그 직업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숲이 물안개로 젖어 있다. 새벽이다.
다음 행선지로 떠나려고 가방을 꾸린다.
순례자는 순례하는 동안만이라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여긴다.
흐르는 건 길이 아닐 게다.
흐르는 건 나 자신일 뿐이다. 

 

 



#
평생 아침에 이르는 게 제일 힘들다.
주관적 골방에서 객관적 광장으로,
몽환적 죽음에서 실존적 생존으로 나가는 것이
아침이기 때문이다.
이 짓은 도무지 내공이 쌓이지 않는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아침이다.
 

 

 


#
외딴집에서 신문, TV 안 보고 한 주일 넘겼더니 시간이 어느덧 머물러 있다.  

알겠다. 내 마음이 그동안 분주했던 건 시간이 빨리 흐르기 때문이 아니라, 바쁘게 사는 세상을 너무 열심히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란 것을.  

남들이 달려가는 삶의 속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남들의 '질주‘만 조금 덜 쳐다봐도 놀랄 만큼 행복의 길이를 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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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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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차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MINI의 A to Z가 담겨있는 이 책 강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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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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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 우리 엄마와 막내 이모는 함께 일을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이모네에서 시간을 때웠다. 사촌오빠와 사촌동생과 함께.

여자였던 나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던 두 남자. 오빠와 동생은 틈만 나면 자동차 이야기, 싸움, 총 이야기 등을 하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언제인가 골목길에서 한창 놀던 때였는데 오빠와 남동생이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의 이름을 척척 외는 걸 보고 신기하게 느꼈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회자된다.

"현우야. 자동차 생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이렇게 물어보면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누나, 자동차가 다 다르게 생겼잖아. 쟤네는 다 이름이 달라"라고 말했다.

도대체 뭐가 다르게 생겼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색깔이나 크기, 아니면 자동차 회사명 정도가 다르겠거니 했는데 남자아이들이 줄줄 외우는 그 각각의 자동차들은 저마다의 특징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받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자동차가 다 다르게 생겼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내 관심사 밖이었던 자동차였기에 더 그랬을테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운전이라는 것도 할 수 있고, 자동차도 구입할 수 있는 여건과 나이가 되니깐 서서히 나도 그러한 것들에 눈이 뜨이나보다.

운전면허를 따면, 그래서 첫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면 벤츠사의 '스마트 포 투'라는 자동차를 사겠노라 다짐했었다. 그 자동차모델을 어디서 처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두 명만이 탈 수 있는 소형차의 매력에 빠져선 그 차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마음까지 일렁였다. 경차로 취급받는 모델이었지만 엄연한 수입차.

욕심이었던게지. 그러나 스마트 포 투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사라질 무렵, 이번에는 BMW사에서 인수한 MINI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자기는 어떠냐고.

 

단순한 자동차 브랜드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 MINI.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미니의 A to Z가 담긴 책 <마이 카 미니>는 이 브랜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친절히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친절한 설명을 읽고 나면 이 자동차를 안타고는 못 배기게끔 만든다. 특히 여성을 많이 배려했음이 물씬 느껴지는 MINI라는 생각도 많이 자리잡게 되는 것 같고.

짧지만 강렬하게 브랜드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을 통해 MINI라는 하나의 아이콘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어린 시절, 자동차 이름을 줄줄 외면서 '아이' 다루듯이, 혹은 '친구' 부르듯이 그렇게 자동차를 좋아하던 남학생들의 마음이 이제는 이해간다. 그렇게 나도 자동차라는 하나의 아이템이 현실적으로 와닿는 시기에 접어든건가. 작고 귀엽지만 속도감에선 탁월한 실력을 뽐내는 미니, 그리고 브랜드의 명성만큼이나 훌륭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가는 미니의 여러 행보에 앞으로 많은 관심이 쏠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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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다 sex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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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다 sex - 무라카미 류, 여자 그리고 연애에 관한 담론



무라카미 류. 히피문화가 전성이던 시대에 락 밴드에서 드럼을 치며 흠뻑 그곳 생활에 취해살았던 그는 자신의 글에서마저도 그런 사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1976년 작가로 데뷔하고 2002년까지 무려 27년간 그가 써온 여자와, 연애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자살보다 sex>라는 다소 충격적이고 적나라한 제목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연애에 실패한 사람에게 더 와닿는 글일까, 싶어서 기대하고 펼쳤던 책이다. 오랜 연애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던 찰나에 읽은 이 책은 그간 내가 알던 연애와 다른 점도 말하고 있었고, 내가 아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알면서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 혹은 몰라서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무라카미 류의 글을 통해 접할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가 굳이 책제목으로 ‘자살’과 ‘섹스’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집어넣은 이유는, 죽을 바에는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충실히 하라는 뜻에서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삶을 끝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대단한 것임을. 그러니 마음껏 분출(?)하라는 의도가 다분한 그의 글은 21세기 여자와 남자를 대변하는 글이란 생각이 든다.

읽었던 부분 중에서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랑스럽지 않은 여자’라는 파트는 거의 책의 앞 부분에 등장하는데, 집중해서 읽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 마음에도 많은 울림을 준 부분이다. 늘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주변에서 듣는 소리는 ‘백치미 있다’ 혹은 ‘바보같다’는 소리여서 속상했는데, 이 책에선 한방에 나의 고민을 해결해줬다. “바보같은 여자가 사랑스럽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바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자주 왈가왈부하는데 바보란 단순하고 솔직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얼마나 용기를 부어주는 말인가!

그러면서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랑스럽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 사이에 그녀들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슬그머니 꺼내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여성이 사랑스러울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제하던 남자에게 아빠 이야기를 나는 참 편하게 했던 것 같다. ‘우리 아빠가 글쎄~’로 시작하는 수다스러움을 그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국한시켜놓고 나는 그저 그런 매력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자와 연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보인 작가에게 뭔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기분이 가벼워진다고 해야할까.

사랑보다는 삶을 더 중하게 여기는 여자가 되기를. 그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 가운데서 참 매력을 발휘하는 그런 여성이 되길. 책을 읽은 후, 내 삶과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감사함이 절로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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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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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장편소설을 처음 접했던 적이 기억난다. 독특한 소재에 이끌려 집은 작품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몰입되기 보다는 지쳐가는 마음이 더 커졌다. 분량도 어마어마했고 등장인물도 엄청났으며 담고있는 작품의 주제 또한 방대했다. '이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거지'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 후론 중국 소설에 대한 편견이 슬그머니 자리잡았던 것 같다. 그래서 위화의 소설 <제7일>의 첫 장을 펴보기 전까지 계속 반신반의했다. 이번에도 중국소설을 선택한 것이 실패로 끝나면 어떻게하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근 데 이 소설은 상당히 촘촘했다.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도 않는 작품이었다. 되려 '좋은 책 한번 잘 읽었다' 싶은 마음이 생기게끔 했다. 오밀조밀하니 하나의 주제만을 드러내는 이 소설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단 몇 장만 넘겼는데도 얼른 끝까지 읽고 싶었다. 동일한 책을 읽고 서평을 써둔 이웃 블로거의 글을 읽으니 그녀도 이 책을 처음 펴본 뒤에 밤새도록 읽었다고 했다. 그럴말한 매력이 충분히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만에 뚝딱, 읽으면서도 그 여운만큼은 며칠만에 홀라당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곱씹으며 읽었다. 대학교 강의시간에 배우던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나 할까.

 

 


나 는 나의 죽음 뒤에는 곧장 천국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고속열차를 탄 듯이 내가 나의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 그렇게 나는 곧장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존재가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양페이처럼 나도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단 며칠이라도 방황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이들을 만나게될까. 별의별 생각들이 다 스치기 시작했다. 철학 강의를 듣다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교수님들이 자주 언급하신다. '사는 것은 죽기 위해서'라는 말도 자주 하셨다. 결국 죽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씀하시던 어느 교수님은, '그러니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를 입에 달고 사셨다.

 

 


양 페이가 걸었던 길, 죽음으로 걸어가는 그 길 위에 내가 선다면 나는 어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가장 마지막에 내가 찾아서 만나게 될 사람은 누굴까. 사십 대 초반의 남자에게 나를 대입시킨 채 한참동안 내 죽음 이후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책 의 구성은 독특하다. 양페이. 그가 죽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인 그가 죽어서 이승과 저승 사이를 방황하는 장면부터가 작품의 시작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는 마치 꿈속과도 같은 장소였다. 보이다가도 희미해지고, 들리다가도 먹먹해지는, 그렇게 양페이는 어딘지 모르는 공간들 속에서 익숙했던 장소들을 급작스럽게 만나기도 하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으며 자신의 지난 삶을 차근차근 회상한다. 7일이라는 시간 동안.

 

죽 음 이후 그는 땅에 묻혀야 했다. 영원한 안식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안식을 선사해줄 무덤이 없었다. 묻힐 곳이 없는 자들이 맴도는 장소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하루하루 더욱 말라갈 뿐이었다. 


작 품의 구성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각 장이 하루의 시간을 담고 있다. 양페이는 각각의 날들 속에서 소리소문 없이 자신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만났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전 부인을 만나기도 했으며, 엄마 없이 자란 자신에게 엄마와도 같은 사랑을 부어준 리 아줌마를 만나기도 한다. 과외를 할 뻔한 어느 소녀의 부모와, 자신이 묵던 셋집 옆방에서 지내던 커플을 만나기도 한다. 죽음을 인지한 뒤의 7일 간, 그는 그렇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며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속에서 조금은 늦은, 사랑의 마음들 또한 확인하게 된다.

양 페이가 깨달은 사랑이야기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 건 단연 아버지와의 이야기였다. 아버지 양진뱌오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 기차 화장실에서 태어나 철로로 떨어진 양페이를 거두면서 자연스레 맺어진 부자관계라는 것을 먼저 밝히면서도 작가 위화는 그 어느 이야기보다 애틋하게, 그 어느 부자관계보다도 돈독하게 이들 사이를 그려냈다. 친부모를 찾았음에도 그들에게 가지 않고, 다시 양아버지에게로 돌아온 양페이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될만큼, 그렇게 작가는 이들 사이를 진하고 깊게 그렸다. 부자관계의 끈끈함을 드러내는 문장들 중에서 양진뱌오의 극진함을 잘 드러내던 부분은 99쪽이다. 

 

 

내 가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뒤에는 손을 잡고 다녔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공원에 데려갔다. 공원 안에 들어가서야 아버지는 안심하고 손을 놓은 뒤 나를 따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나와 아버지는 마음이 잘 통해서 공원의 샛길을 걷다가도 아버지가 손을 뻗기만 하면, 나는 보지 않고도 알아채고 곧장 내 작은 손을 건넸다.

그 러다 철길 옆 작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예민해졌다. 안에서 밥하는 동안 내가 밖에서 놀겠다고 하면 끈으로 당신 발과 내 발을 묶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가 그어놓은 안전지대에서 자라났다. 내가 오갈 수 있는 곳은 문 앞 정도였다. 행여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앞으로 나가면 안에서 곧장 경고가 들려왔다.

"양페이, 돌아와!"

99쪽

 

 

그리고 그런 양진뱌오의 성격을 또한 잘 드러낸 문장은 245쪽.

 

 

아 버지는 빈의관 대기실에 들어갔다.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처럼 화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의며 유골함, 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한 사람씩 가마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앉지 않고 계속 그곳에 서 있다가 대기실에 직원이 한 명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245쪽

 

 

 

 

#

 

 

양 페이가 만난 사람 중에 '슈메이'라는 여자가 있다. 남자친구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에 자살시도를 하다 진짜 죽어버린 비운의 여자. 가난함을 달고 살면서도 가난한 남자친구 곁을 결코 떠나지는 않았던 순정파 여자. 슈메이는 철은 없지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철없음도 다 받아주던 우차오는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속이 깊었던 남자였고.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던 양페이는 슈메이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A52 가 세 번 불린 다음 우리는 슈메이의 번호 A53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모두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슈메이가 플라스틱 의자를 떠나는 걸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슈메이가 웨딩드레스 같은 긴 치마를 끌며 안식의 땅으로 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는 것만 보일 뿐 가마가 있는 방과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온갖 꽃이 만발한 땅으로 가는 게 보였다.

294쪽

 

 

오 해했던 남자친구의 진심을 확인한 후, 미안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고마운, '너에게 사랑받으며 살았고, 사랑받으면서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해'라는 모습으로 화장터에 들어가던 슈메이의 모습, 화장되는 순간에는 가장 평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양페이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꽃길로 걸어가는 모습처럼 묘사했다. 죽음을 '끝'으로만 생각한다면 절대 그릴 수 없을 그림들. 하지만 죽음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더 평온하고 더 넓은, 더 밝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만나는 공간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양페이의 눈에 비친 죽어가는 사람들은 더이상 불행한 이들이 아니었다. 우차오에게 건네던 양페이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가자, 저기 나뭇잎이 너한테 손을 흔들고 바위가 미소 짓고 강물이 안부를 묻잖아.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7일 간의 시간동안 죽음을 이해하게 된 그, 사랑의 이면들을 알게 된 그는 한층 성숙해진 양페이로 업그레이드 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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