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앤 브래셰어스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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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환생, 윤회.. 무엇이 떠오르는지? 터무니없는 미신? 아님 내 전생이 뭐였을까 궁금하거나 신봉하는지? 난 믿냐 안 믿냐 굳이 말하라고 하면 단 1%라도 믿는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들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사후의 우리는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 소설은 이러한 전생과 환생, 거듭된 윤회라는 다소 비현실적 소재에 삷의 의미와 더불어 사랑이라는 소스까지 버무린 이야기이다. 하이틴 로맨스 <청바지 돌려입기>로 이름을 알린 작가인 만큼 기대하며 읽었다.

일단 전생이나 윤회 같은 말들을 죽어도 믿지 않거나 로맨스를 싫어한다면 비추. 나의 경우는 전생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있는데다 로맨스 소설 성애자이기 때문에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전생과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그 기억속에는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다. 초반에는 어떤 구성에 어떤 스토리 라인일지 탐색이 끝난 후 부터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읽었다. 현재시점과 대니얼이 환생을 거듭하면서 살아온 생이 교차되면서 나오는데 작가만의 상상력이 정말 흥미진진 했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 여자만 사랑해왔다? 자칫 좀 무섭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인공 대니얼의 사랑은 그런 무섭고 소름끼치는 맹목적인 사랑과 거리가 멀다. 말로는 설명이 잘않되지만 생을 거듭하면서 느껴지는 대니얼의 마음은 그것이 진짜 사랑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환생을 거듭할수록 대니얼은 자신의 삶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된다. 대니얼에게는 그와 같이 윤회를 하면서 전생을 기억하는 친구 벤이 있다. 대니얼이 환생을 하고, 살아거는 목적은 자신의 단하나의 사랑 소피아를 찾아 그녀를 사랑하는 일이다. 또한 환생을 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건 처음에 썼던 대니얼이라는 이름을 고수하려한다. 반면 벤은 환생한 삷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하는 친구이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오로지 소피아만 생각하며 사는 대니얼은 현재의 삶에 진심어리고 충만한 의욕이 엿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죽게 되거나 의지대로 죽을 때에도 다음생이 있겠거니 해서 자신의 생명이나 현재의 삶에서 만난 가족들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좋은 가족을 만났을 때는 대니얼도 혼란을 느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보며 어쩌면 친구 벤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소피아의 현생인 루시도 자신이 과거에 여러 삶을 살았음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이름이나 현제의 처지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대니얼이나 루시, 벤 처럼 우리는 다음 생에 대한 기약은 없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확인할 수도 없고 그게 진짜 사실이래도 다음에 환생한다는 보장이 없다. 현제를 소중히 생각하고 충실하라. 구태의연한 깨달음일지라도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다. 대니얼이 여러생을 살면서도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것은 현제 살고 있는 현생에서 진실로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을 연습할 기회가 온다면 잘 살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로 갈수록 내가 원하던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았고 결말 또한 뭔가 애매하게 끝나서 조금 아쉬웠지만 전생에 대한 즐거운 공상과 인생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보았던 소설이었다. Caepe diem! 한때 유행했던 말이다. 현재를 즐겨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변함없는 진리의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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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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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라고 하면 어딘지 독특한 사람을 뜻하지만 그것이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여기 괴짜라고 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흔히들 생각하든 괴짜의 좋지 못한 의미를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의미를 달리 생각해야할 것 같다. 우선 주인공 소년 알렉스에게 일어난 일이 심상치않다. 확률이 극히 적은, 유성이 지붕을 뚫고 들어와 머리에 맞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극히 확률이 적게도 2주간의 혼수상태를 끝으로 살아났다. 이 특별한 소년은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유성을 맞고 나서부터인지는 몰라도 화제의 중심이자 동시에 학교에서는 괴짜로 통하며 외톨이로 지낸다. 때론 이 특별함이 남들에게는(몇몇 불량학생) 괴롭히고 싶은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 어느날도 괴롭힘을 피해 도망치던 중 들어갔던 집에서 만난 피터슨이라는 노인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의 특별한 우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단 머리에 유성을 맞았다는 것 부터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판타지적인 느낌은 아니다. 확률이 적지만 있을법한 이야기이고 그저 아주 생소한 소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요소는 모 아니면 도일 가망성이 크다. 망하거나 흥하거나. 나에게는 독특하다는 느낌 외에는 별달리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까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의 재치와 유머가 담긴 필체 때문이다. 주인공 소년 알렉스의 '괴짜적' 관심사 때문에 신경학이라던가 물리학이라던가 하는 학문적 용어가 자주 등장해서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중간에 읽기를 그만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외톨이라고만 생각했던 알렉스는 피터슨과 공통으로 좋아할 만한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의 책을 같이 읽고 독서 모임도 만들어 사람들과의 교감과 불치의 병 때문에 서서히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피터슨을 도와주면서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동시에 피터슨도 알렉스를 통해 포기하려 했던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는 것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질서 아래 숨은 카오스를 찾을 수도 있다. 질서니 카오스니 이런 개념들은 불안정하다. 옷을바꿔 입고 장난치는 쌍둥이와도 같다. 질서와 카오스는 자주 섞이고 겹친다. 시작과 끝이 그렇듯이. 세상일은 걷보기보다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본문 중 p.111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 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별조차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 본문 중 p.429

 

타인은 분명 나와 다르다. 알렉스도 그냥 평범하게 보자면 그저 물리를 좋아하고 조금은 허약한 모범생 소년에 불과하다. 알렉스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의 생각과 편견이 그런 시각들을 만드는데 어쩌면 알렉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함에서 비켜간 소년이기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은 나쁜게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과 생각들이 나쁜것이 아닐까.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가 존엄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몇몇 소설에서도 흔히 본 소재였지만 여기서 느낀건 이 문제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제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눈물을 짜네거나 억지로 희망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상한 것이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피터슨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와 다른 반응인건가?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래서 더 좋았다. 몇몇 소설에서 다룬 이러한 소재에서는 마치 독자의 눈에서 억지로 눈물 방울을 흘리게 하려고 작정한 듯이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와 대화들이 오가서 조금은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알렉스와 피터슨이 서로의 우정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죽음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읽고 있는 나 또한 알렉스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알렉스가 말했듯 중요한건 죽음만을 생각하면 인생을 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찰라보다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지내는 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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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혼자 서다 - 34살 영국 여성, 59일의 남극 일기
펠리시티 애스턴 지음, 하윤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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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은 어디까지인가? 라는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분명 한계라는 건 있는 것 같다고 할 것 같았다. 한계에 도전 해 본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까지 살면서 한계라고 생각한 일은 체중 감량을 위한 힘들었던 운동이라고 대답했었다. 나를 포함한 개개인은 이렇듯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계에 도전했다고 할 만한 일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개개인 에게만 해당될 뿐 인류 전체로 보자면 한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펠레시티 에스턴이라는 여성을 보면서 느꼈다.

 

남극. 단지 황제펭귄이 살고 세종기지가 있는 추운 극지방이라는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있지만 실제로 남극이 어떠한 곳이라는 것은 체감하지 못한 이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남극을 횡단한다는 도전을 살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와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다른 두 사람만이 횡단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 곳 남극에 34살의 영국 여성 펠레시티 에스턴이 도전에 나섰다. 조금은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특별히 모험가 적 기질이 있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극 횡단에 도전한다는 것은 보통의 모험가적 기질로는 힘들 것 같았다. 남극보다 더 소극적이고 사소한 일에 도전하는 것에도 자신감이 부족하고 두려움이 앞서는 나 같은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한계 도전인 것이다. 몇번의 남극 체험을 해 보았다지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혼자인 채로 남극에 남겨진다는 것은 아마도 횡단에 성공했다는 그 두 사람 외에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곳곳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미지의 땅을 횡단을 보면서, 죽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한 이 도전은 그래서 인류에게는 한계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먹먹할 만큼 시끄러웠다. 기계적인 포효 소리가 공기를 뚫고 먹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바로 코앞에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것처럼 우레같은 소리였으며 지진 같은 상한 진동을 동반했다. 처음에는 지면이 흔들리는 줄 알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떨고 있는 것은 나였다. 손에 낀 눈신 한 쪽을 벗고 손바닥을 얼굴 가까이 공중에 수평으로 올린 뒤 손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첫째 날 저녁과 달리 이번에는 느낌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순수한 본능적 공포였다.

'두려움을 받아들여.'

예전에도 그랬듯이 뇌가 지시했다. 나는 눈 속에 앉아 이번 여정에서 두 번째로 얼굴을 두 손에 묻고 흐느껴 울었다. - 본문 중 97p

 

집에 돌아온 뒤 처음 몇 달 동안 내가 깨달은 변화라고는 주변 환경과 내면 풍경에 작은 단절이 있다는 점이었다. (중략) 이러한 정신적 신기루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지만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알아차렸다. 새로운 확신이 가득 생기고, 내 안에 차분하지만 단호한 평정심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평정심은 이전까지 없던 낯선 것이었다. 이는 인내하고 버틴 결과 생긴 자신감 같은 것이며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것, 바로 내 역량 문제에서 놓여난 안도감도 한데 섞인 것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아울러 나의 결정과 동기를 추동하는 요인에 관해 보다 많은 이해를 얻어 돌아왔다. 아직도 모험에 이끌리는 것을 느끼지만 장차 내게 의미를 지닐 도전이 무엇인지에 관해 보다 뚜렷한 입장을 갖게 되었다. 나 혼자엿던 시간이 없었다면 이런 통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본문 중 311-312p


한계라고 생각하고 그녀처럼 두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 없었다면 인류는 어떤 발전도 없었을 테고 남극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두 달의 여정을 마친 후 그녀가 어떠한 모습이라도 그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계에 도전했다고 생각한 일이 조금은 사소했더라도 그녀의 남극 일기를 보면서 아직은 나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 어쩌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계라고 생각이 드는 일에도 그렇게 한계라고 쉽게 단정지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정말 그게 한계인 인간일 뿐인 인생으로 끝날테니까. 나 또한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에 한계가 왔다고 생각이 들거나 어떤 도전이 두려워 망설여 진다면 그녀의 남극일기를 적극 추천한다. 한계에 도전한다기 보다는 어떤 분야이건 도전을 시도해본다는 정신이 있다면 분명 여기가 한계라는 절망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처럼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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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첫 햇살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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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비처드는 첫 햇살이 달라졌다고 느낄만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아직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 경험을 파비오 볼로의 소설 <아침의 첫 햇살>속 화자인 여주인공 엘레나에게 일어났다.

이 소설은 엘레나가 쓴 일기와 몇년 후 일기를 읽으면서 일기에는 쓰지 못했던 그때의 다른 감정들을 이야기하는 두가지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닌 단지 안정감 만으로 결혼을 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결혼생활에 권태감을 느끼면서 남편에게는 기대감이 상실되고 실망감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행복을 위해 결혼에 모든것을 걸었고 곧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느꼈지만 자신의 인생에서는 행복한 날들이 오지 않을것만 같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만족감이 없는 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유혹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도 행복할 자격이 있으며 그동안의 불행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달콤하기만한 이 유혹에 점차 집착하면서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하고 이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지만 엘레나는 이미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깨닫고 모든것에서 자유로워져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시작하면서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남자작가지만 여자의 심리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이 있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기대보다 훨씬 더 훌륭했던 소설이었다. 결혼은 하지 하지 않았지만 여자로써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의 묘사가 기대 이상으로 큰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엘레나가 느꼈던 감정들 중 일부는 정말 나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느낌이어서 전율이 일었고 그 순간 작가에게 찬사의 마음까지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겪어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같은 여자로써 처음에 엘레나의 상황들이 마냥 안타까웠고 그래서 엘레나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바라며 읽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실수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에게 뭘 가져다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널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지도 모르는 일아잖아. 그걸 누가 알겠니? 엘레나, 그러니까, 살면서 한번은 부딪혀봐야 하는 거야. 아무리 의미없는 일이라도 한번 부딪혀보는 거라고."
-96p
"행복하려면 우선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나는 내 행복속에 내 우울함과 연약함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104p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행복으로만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불행은 안고 살아가지만 그 불행은 왠지 내 인생에서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엘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불행은 안고 살아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실패가 두려워 불행을 방관하기만 하는건 인생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그래서 엘레나의 행복찾기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주는것 같았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여자가 사라져버렸다면 그건 그 사람 앞에서만 사라진 거야. 대신에 네 안에서만큼은 살아 있는 거라고. 그 여자가 바로 너야. 가긴 어딜 가니? 너랑 전혀 상관 없는 또 다른 존재로 너를 변신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변화란 말이야, 네가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네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너의 일부를 발겨나고 이해하게 되면서 오는 거야. 사람이 바뀐다는 건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내 인생도 행복으로 안내해 줄 또 다른 내가 있으므로 행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엘레나처럼 자신이 느끼는 불행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만 같고 행복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는 여자라면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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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어지기 1초쯤 전에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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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서핑할 때 보드를 타고 덮쳐오는 파도를 가르며 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를 바다에 빠지고 만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 3대 여류작가로 소꼽히고 있는 작가 무라카미 유카의 소설 <견딜 수 없어지기 1초쯤 전에>의 두 주인공 후지사와 에리와 야마모토 미쓰히데의 뜨거운 성장기는 미쓰히데가 그토록 열광하는 서핑과 닮아 있다. 정해진 틀(고등학생)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 처럼 그 시기를 잘 가르며 넘지 않는다면 다가올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유약하고 어리다. 그래서 때론 휘청거리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혀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금새 보드와 발목을 연결해 주는 코드를 의지에 보드에 다시 올라서 천천히 파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실수를 하더라도 이내 잘못을 깨닫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으며 그러면서 조금씩 인생을 배워 나간다.
 

"평소에 나쁜 파도로 열심히 연습하면 좋은 파도일 때 훨씬 더 여유롭게 탈 수 있어. 반대로 좋은 파도에만 익숙해지면 막상 시합에서 나쁜 파도를 만났을 때 마음만 급하고 괜찮은 결과는 나오지 않아." -p24

하지만 나는, 아니, 에리도, 어떻게 해서든 '지금'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래고 개똥이고 간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밀려드는 파도를 뚫고 먼바다로 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두려움을 떨치고 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용기와 무모함의 경계선을 가르고 들어가 물을 힘껏 할퀸다. 바닷속에 끌려 들어가 모래섞인 물을 들이켜고, 폐는 산소를 원하며 찌부러지고, 이윽고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숨을 쉬는 것도 한순간뿐, 곧 다음 파도가 덮쳐든다. 도망칠 곳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파도를 가른다. 포기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차례차례 덮쳐드는 파도를 넘어선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 문득 꿈에서 고요해진 먼바다로 나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윽고 닥쳐올 나만의 파도를. -372p
인생은 서핑처럼 연습할 수 없지만 실수를 깨닫고 실패를 줄이는 법을 배워나가는게 청소년 시기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성장기는 여느 성장 소설 속 주인공들 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 아니 단연 가장 뜨거울 거라고 단언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면은 소설의 순정 만화스러운 표지와 오글거림을 동반할 것 같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스토리가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보기좋게 빚나간 예상과는 달랐던 스토리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어느 마늘즙 광고에서 마늘 남자한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하는 문구처럼 분명 성장소설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핑밖에 모르고 자유롭게 살던 미쓰히데와 모범생으로 살아가지만 비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는 에리 두 사람은 에리의 그 비밀스러운 고민 때문에 만나게 된다. 에리의 고민이 기존의 성장소설에서 잘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성장소설이지만 성장기의 청소년은 볼 수 없는게 아닌가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공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니었지만 청소년기에 분명 그런 고민을 가진 주변인이 있었다. 에리처럼 좋아하는 단짝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처럼 조심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고민이기에 오히려 성장소설의 소재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에리의 고민과 두 사람의 만남만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가볍기만한 그저그런 성장소설이 되었을텐데 남자 주인공 미쓰히데의 아버지가 죽음을 앞둔 암환자로 등장하여 사회적으로 이슈되고 있는 존엄사(죽음의 마지막 순간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함)를 다룸으로써 적절히 무개감을 맞추어 준다. 그리고 서핑을 좋아하는 미쓰히데 덕분에 실감나는 바다에서의 서핑장면의 묘사가 시원스러운 청량감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역자 후기에 작가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기존의 틀을 깨는 글을 쓴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글로 그런 소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 소설도 기존의 성장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소재로 파격을 지향한다. 이런 면은 분명 논란은 될 수는 있으나 분명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있을 수 없는 고민이 아닌 마주보아야 하는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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