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어지기 1초쯤 전에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파도를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서핑할 때 보드를 타고 덮쳐오는 파도를 가르며 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를 바다에 빠지고 만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 3대 여류작가로 소꼽히고 있는 작가 무라카미 유카의 소설 <견딜 수 없어지기 1초쯤 전에>의 두 주인공 후지사와 에리와 야마모토 미쓰히데의 뜨거운 성장기는 미쓰히데가 그토록 열광하는 서핑과 닮아 있다. 정해진 틀(고등학생)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 처럼 그 시기를 잘 가르며 넘지 않는다면 다가올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유약하고 어리다. 그래서 때론 휘청거리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혀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금새 보드와 발목을 연결해 주는 코드를 의지에 보드에 다시 올라서 천천히 파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실수를 하더라도 이내 잘못을 깨닫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으며 그러면서 조금씩 인생을 배워 나간다.
 

"평소에 나쁜 파도로 열심히 연습하면 좋은 파도일 때 훨씬 더 여유롭게 탈 수 있어. 반대로 좋은 파도에만 익숙해지면 막상 시합에서 나쁜 파도를 만났을 때 마음만 급하고 괜찮은 결과는 나오지 않아." -p24

하지만 나는, 아니, 에리도, 어떻게 해서든 '지금'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래고 개똥이고 간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밀려드는 파도를 뚫고 먼바다로 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두려움을 떨치고 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용기와 무모함의 경계선을 가르고 들어가 물을 힘껏 할퀸다. 바닷속에 끌려 들어가 모래섞인 물을 들이켜고, 폐는 산소를 원하며 찌부러지고, 이윽고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숨을 쉬는 것도 한순간뿐, 곧 다음 파도가 덮쳐든다. 도망칠 곳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파도를 가른다. 포기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차례차례 덮쳐드는 파도를 넘어선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 문득 꿈에서 고요해진 먼바다로 나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윽고 닥쳐올 나만의 파도를. -372p
인생은 서핑처럼 연습할 수 없지만 실수를 깨닫고 실패를 줄이는 법을 배워나가는게 청소년 시기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성장기는 여느 성장 소설 속 주인공들 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 아니 단연 가장 뜨거울 거라고 단언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면은 소설의 순정 만화스러운 표지와 오글거림을 동반할 것 같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스토리가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보기좋게 빚나간 예상과는 달랐던 스토리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어느 마늘즙 광고에서 마늘 남자한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하는 문구처럼 분명 성장소설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핑밖에 모르고 자유롭게 살던 미쓰히데와 모범생으로 살아가지만 비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는 에리 두 사람은 에리의 그 비밀스러운 고민 때문에 만나게 된다. 에리의 고민이 기존의 성장소설에서 잘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성장소설이지만 성장기의 청소년은 볼 수 없는게 아닌가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공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니었지만 청소년기에 분명 그런 고민을 가진 주변인이 있었다. 에리처럼 좋아하는 단짝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처럼 조심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고민이기에 오히려 성장소설의 소재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에리의 고민과 두 사람의 만남만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가볍기만한 그저그런 성장소설이 되었을텐데 남자 주인공 미쓰히데의 아버지가 죽음을 앞둔 암환자로 등장하여 사회적으로 이슈되고 있는 존엄사(죽음의 마지막 순간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함)를 다룸으로써 적절히 무개감을 맞추어 준다. 그리고 서핑을 좋아하는 미쓰히데 덕분에 실감나는 바다에서의 서핑장면의 묘사가 시원스러운 청량감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역자 후기에 작가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기존의 틀을 깨는 글을 쓴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글로 그런 소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 소설도 기존의 성장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소재로 파격을 지향한다. 이런 면은 분명 논란은 될 수는 있으나 분명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있을 수 없는 고민이 아닌 마주보아야 하는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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