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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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흔해진 말 중 결정장애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결정해야할 때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의미쯤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결정에는 일상에서 해야하는 아주 사소한 결정, 예를 들어 점심메뉴나 옷 색깔 등에서 부터 크게는 미래나 진로 등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까지 다양하다. 사소한 결정은 물론 어느 쪽을 택하건 아무런 피해도 없으며 자신의 진로나 미래 또한 그 결정은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조금 더 큰 의미로 확장해 봤을 때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서 생과 사의 기로를 오가고 더불어 그 결정이 내 생명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좌지 우지 하는 거라면? 단순히 결정 장애라고 표현하기에는 모자랄 것 같다. 이 소설은 그런 결정을 수 없이 내려야 하는 영국의 고등법원 가사부 판사의 이야기이며 그 결정에 생과 사를 오가는 한 소년과 더 크게는 제목의 의미와 같이 영국의 아동법에 의해 결정되는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 보통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다루는 고등법원 가사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메인 시놉에도 나와있듯이 소설은 고등법원 가사부 판사 피오나와 백혈병에 걸린 17세 소년 애덤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치료를 위한 수혈을 거부하고 병원의 이의 제기로 사흘 안에 그 결정을 해야 한다는게 주요 스토리이다. 이 시놉에서 느낄 수 있는 서스펜스를 소설에서 많이 기대했던건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하고 싶다. 소설은 단순히 피오나와 애덤의 이야기를 넘어 좀 더 넒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고등법원 가사부에서 다루는 보통 사람들의 분쟁은 결혼과 이혼으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과 여러가지 분쟁을 주로 다루는데 그로 인해 방치되어 가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칠드런 액트 즉 아동법에 의거해 법원이 대신 부모의 역할을 하는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와 애덤의 이야기에서 각자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 판단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소설이다. 그래서 재미있다는 거야 뭐야 라고 묻는다면 좀 애매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애초에 기대하고 예상한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아 조금 실망은 했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피오나의 사생활 이야기가 너무 많고 애덤의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쉬웠지만 소설에서 작가가 던진 화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만큼 깊이 있는 소설이었다. 이언 매큐언의 처음 읽는 소설이었지만 다른 작품도 찾아 보고 싶을 만큼은 된다는 얘기다.

소설을 읽는 모두가 그럴 것 같지만 내가 만약 피오나의 입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가장 크게 생각해봤다. 사실 이 결정에는 옳고 그름도 없고 선과 악도 없다. 오로지 신념과 가치 판단만으로 내려야 하는 결정인 것이다. 애덤처럼 종교에 의한 순교나 그 어떤 일에 대해서 타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도 종교적 자유는 있으니까. 생명의 존엄성이냐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이냐 분명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 될것 같다. 그래도 내가 햐야 한다면 피오나가 내린 결정과 마찬가지로 오롯이 애덤에게 더 나은 방향이 될 수 있도록만 생각한다면 그녀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애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 또한 환경적  영향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일 수 있고 죽음은 어떤 이유에서건 누구나 두려울 테니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소년에게는 앞으로 후회하더라도 기회를 더 주어야 하지 않을까. 종교적 자유를 떠나 피오나처럼 한번 더 자신에게 기회를 주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 외에도 피오나가 해야 했던 수많은 결정들. 옳고 그름 보다는 도덕적 측면에서 해야할 판단이라서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법이 정한 권한으로 판사들은 판결을 내리지만 어느 누구도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폭력적이거나 마약이나 알콜 중독의 부모들로 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건 명백하지만 그 외에 애덤처럼 종교에 의한 도덕적 가치 판단은 결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결정을 내리더리도 비난이 날아들 이러한 판단과 결정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풀 수 없는 가장 큰 딜레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죽어가면서 슬픔도 후회도 추억도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을 것이다. 종교나 도덕체계는(내 종교와 도덕체계도 마찬가지로) 멀리서 바라보는 산맥의 빽빽한 봉우리들 같아서,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눈에 띄게 높거나 더 중요하거나 더 진실하지 않다.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55p 중

외국소설이고 그들의 정서대로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는 배경에서 작품성이나 문체을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쩐지 섬세하고 우아한 문체라고 표한한 말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사회적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면서 소설적 재미도 놓치지 않은 소설이면서, 소설 속의 화두가 어떤 이에게는 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면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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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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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 드라마의 법칙처럼 되어버린 막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드라마를 보면 여러 막장 요소들 중에 꼭 복잡 다난한 가족 관계가 등장한다. 그 가족 안에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고 암유발 될듯한 느낌의 불륜 관계도 있으며 가족끼리의 암투도 등장한다. 처음 소설의 중심인 야나기시마 일가의 가족 구성원과 그 프로필을 대략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야말로 엄마들이 좋아하는 막장 드라마 속 콩가루 집안이 생각났다. 이국적이며 멋스럽고 웅장해 보이지만 어딘지 지역적 색깔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나기시마가의 서양식 대저택처럼 3대가 같이 대저택에 사는 언뜻 보면 화목할것만 같은 가족의 면면에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가족들과는 다른 구성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띠지의 문구처럼 분명 지금까지의 에쿠니 가오리 소설 중 가장 서사적이고 무개감있는 걸작이기에 충분한 것 같다.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중 가장 '그녀답지 않은' 소설이었다. 언제나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와 더불어 그다지 복잡하지 않는 이야기로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였다면 이 소설은 그 문체와 심리묘사는 그대로이면서 이야기는 한층 깊고 커진 느낌이다. 지은지 70년된 서양식 대저택에 사는 야나기시마 일가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일가의 창업주인 다케지로 할아버지와 러시아인 기누 할머니, 이모와 외삼촌이 같이 살며 자매중 한 사람의 네 아이들 중 둘은 엄마와 아버지가 다르다. 이모와 외삼촌에서 부터 4명의 아이들은 집안의 독특한 교육방침으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른바 홈스쿨링으로 집에서 그 교육을 대신한다. 범상치 않은 가족만큼이나 소설의 특이한점은 각 단락마다 시점과 시대, 계절, 화자가 바뀐다. 어떤 규칙성도 없이 느닷없는 변화인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구성은 처음엔 좀체 적응되지 않고 단락의 도입을 어느 정도 읽어야 화자를 알 수 있어서 헷갈리기도 했지만  소설을 읽어 가면서 가족 구성원의 면면과 비밀을 알게되고 앞의 이야기와 퍼즐 맞추 듯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그런 것들이 아무려면 어떠냐 싶게 빠져들게 되었다. 약혼자가 있음에도 7년씩이나 가출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그 약혼자는 그녀와 아이까지 받아들여 키우고 반대로 불륜의 여자와 낳은 아이는 물론 불륜의 상대까지 야나기시마 일가와 왕래를 하는 것이며 홈스쿨링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사회성이 결여된 아이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 위해 그의 고용주와 결혼한 러시아인 할머니, 그 외에 가족 구성원의 각자의 복잡한 이야기들은, 물론 뭔가 분명 콩가루 막장 집안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막장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좀 이상한 느낌일 수는 있지만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렇다. 아마도 그건 야나기시마 일가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저택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문화가 섞인 듯한 이국적 가풍과 더불어 에쿠니 가오리만의 간결하고 섬세한 절제된 문체로 그려져서인 듯하다. 과연 에쿠니 가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서 단지 야나기시마 가족들만의 시점으로 이루어졌다면 뭔가 공감대없이 그냥 특이한 가족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가족과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제3자와 연결고리가 있지만 그 일가는 아닌 외부의 사람들의 시점으로 바라본 야나기시마 가족의 이야기가 나와 독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내어 준다. 이 역시 소설이 갖는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작가만의 섬세함이 돋보이는듯 했다. 러시아인 할머니의 이웃인 친구라던가 큰아들 고이치와 결혼한 교코, 사위의 불륜녀인 아사미씨, 그리고 그들이 자주 드나들던 초밥집 주인 등 이들의 눈을 통해 보여진 야나기시마 가족의 모습은 나에게 나만 그렇게 보인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공감대가 느껴졌다.
 
 
 
"엄청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렇죠?"
다카오가 뭔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따뜻한 기분이 들고, 거기에 내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미혼인 채 아이를 낳는 데에는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을 테고, 더구나 본 부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환영받았을 리 없다. 하지만 한곳에 모여 손을 흔들고 있던 그들은 행복한 대가족처럼 보였다. - 416p
 
 
가장 그 일가와 관계없어 보였던 초밥집 사장이 가장 공감되었는데 아마도 소설을 읽는 나의 입장 (일가와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과 가장 비슷해서인 것 같다.

페루의 오래된 도시 쿠스코에는 무려 12각의 돌이 포함된 돌벽이 유명하다. 그 신기한 돌은 물론 돌벽을 이루는 각각의 돌들은 하나같이 모양과 그 크기가 다르다. 고대의 잉카인들의 지혜로 새워진 이 돌벽은 그럼에도 꼭 맞추어 깎은 듯 빈틈없이 견고하여 페루의 오랜 역사와 함께했다. 소설의 거의 다 읽었을 즈음 나는 문득 이 돌벽이 생각났다. 서로 크기도 모양도 다른 돌들은 야나기시마 일가의 가족들이고 그 돌들을 정교하게 짜맞추어 세월이 지나도 견고한 오래되고 많은 이야기를 가진 서양식 대저택이라는 돌벽이 되는 것이다. 전쟁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고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온 돌벽처럼 가족 중 누군가는 세상과 작별하고 집을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크고 웅장한 서양식 저택은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견고히 서있다. 비록 '언뜻' 보아서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물론 슬픔도 분노도 행복도 있다. 그것은 평범한 가족 구성원이지만 우리들 가족 안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가족의 시간들도. 그동안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그런 시간들에 대해 담담한 문체로 끄집어 내어준 에쿠니 가오리의 이번 소설은 그래서 뭔가 뭉클함이 있는 소설이었다. 비록 앞으로도 그 시간들에 대해서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오랜시간 견고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대저택처럼 나의 가족들도, 야나기시마가도 오랜 시간 견고히 그자리에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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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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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 낯선 작가의 이름까지 어딘지 으스스한 느낌을 풍기는 이 소설에 나는 제목에 강한 끌림을 느꼈다. 제목에서는 일단 그 어감에 따라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한데 하나는 '죽고 싶어 질때 전화해 내가 위로해 줄게'라는 것과 '죽고 싶어 지면 전화해 그렇게 되도록 해줄게' 혹은 '같이 죽어 줄게'라는 의미. 나 같은 경우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는 전자의 의미로 느꼈지만 사람마다 어떻게 느끼느냐는 다를 테고 그 느낌에 따라 소설에서 느껴지는 의미도 달라질 것 같다. 전자로 느꼈다고 해서 위로와 희망에 가득찬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오히려 후자의 의미에 맞는 내용이랄 수 있다. 띠지에 로맨틱 악녀 소설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어디서도 로맨틱한 느낌은 느낄 수 없었고 악녀 소설이라는 면은 소설속에 악녀로 면한 하쓰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소설을 받아 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까.

병맛. 그 의미에 대해서는 1도 모르면서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났던 단어이다. 그 뜻을 찾아보고 줄임말의 풀이나 의미가 생각보다 나쁜뜻이어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생각이 나는건 어쩔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소설은 전체적인 스토리와 그 플롯, 독자들이 느끼는 그에 담긴 의미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 등의 요소가 있는데 철저하게 스토리만 보자면 병맛이란는 느낌이었다. 큰 사건 없이 그저 소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삼수생 도쿠야마라는 남자가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하쓰미라는 여자를 만나 그 여자에게 서서히 빠지게 되면서 주변과 철저히 차단되는 고립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는 얘기다. 뭔가 하나가 없다는 느낌이었고 재미로만 따지자면 그야말로 병맛. 딱히 작가가 뭘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쿠야마라는 바보가 더 바보가 되어가면서 쓴 일기같은 느낌. 신인인 작가에게 대단한 문학성을 바랄 수는 로맨틱 악녀 소설이란 콘셉트는 대중적으로 풀어가려는 느낌이라 심오한 메세지를 느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소설 전체가 그런건 아니다. 아주 형편없었다면 읽다가 팽개쳐 버렸겠지만 어쩐지 끝까지 읽게 되는 기묘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속의 하쓰미의 행동이나 세계관에서는 생각해 볼 거리가 꽤 있었고 그녀의 그런 세계관에 기인한 시각에서 뿜어내는 타인에게 쏘아대는 독설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랄지 통쾌한 감정도 들었다. 나 또한 하쓰미처럼 반쯤 이상은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공담되는 부분도 꽤 있었다. 남에게 옳은 소리 잘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하쓰미나 도쿠야마가 날리는 독설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꼈고 하쓰미가 취미로 읽는 살벌한 책들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잔인함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흥미로움 또한 느꼈다(나도 변태인가?). 그렇다면 하쓰미는 과연 악녀라고 해야할까? 악녀 소설이라고 명확하게 명시를 했건 어쨌건 그녀가 악녀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것 같다. 악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도쿠야마라는 한 인간을 자신의 어두운 죽음이라는 세계에 물들도록 이끄는데 도쿠야마의 주변에서도 하쓰미로 인해 도쿠야마를 망치고 있으니 멀라하라는 충고를 하고 도쿠야마의 처지도 점점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어 가서 그녀가 악녀라는 느낌이 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도쿠야마 자신의 선택에 의한 일이라는 점에서 하쓰미는 악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쓰미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도쿠야마와 함께 하는 동안은 잘해주려 한다. 강제로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도쿠야마의 주변에 쓸모없는 인간관계를 정리해주어 속에 시원한 느낌도 있다. 그런 인간관계를 뺀다면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사교적이지 못하고 그런 인간들만 만나는건 도쿠야마 자신의 잘못이다. 자기 자식이 나쁜길로 빠지는건 꼭 나쁜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라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이 하쓰미를 악녀로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반면 악녀라는 점에서 보자면 하쓰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모와 지극지 현실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이다. 주변과의 관계를 일절 끊고 하쓰미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도쿠야마는 재일 한국인이라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거절하는데 난 이 대목에서 엥? 하는 느낌이었다. 실컷 신비한 무드를 풍기며 도쿠야마와 계속 함께 일것 처럼 해놓고 정작 결혼이야기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여자로 돌변한 것이다. 그 이유가 너무 갑작스럽고 엉뚱해서(이것도 병맛 요소중 하나) 재일 한국인이라는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쩐지 여기서는 악녀라는 귀여운 타이틀보다 나쁜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죽음이 난무하는 이야기에 심취해 있지만 어쩐지 그 가면 뒤에서 한 남자를 마음대로 바보로 만들고 쾌락을 느끼며 정작 자신은 죽을 마음도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정작 죽기 싫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혼자이기를 원하지만 혼자 있기 싫다는 강한 의지같은 것도 말이다. 자살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정작 그 사람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훨씬 강한 파급력을 가진다. 걱정해주며 자기 자신은 힘을 내어 살아가야 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쿠야먀처럼 같이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그게 자기 자신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영향이 지속적이고 파급력이 크다면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는 선택의 의지마저 앗아 갈 수도 있는게 아닐까. 나 같은 경우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어서 무기력과 우울에 빠질때도 있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질 때도 있다. 어느 쪽으로 느끼든 각자의 몫이겠지만 이 소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의지력이랄까 그런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분명하게 끊기는 소단위 없이 처음 부터 끝까지 달려야 하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중간에 내려놓지는 않은 기묘한 소설이었다. 병맛이라고 했지만 어쩐지 중불에 은근하게 끓어 뼈속 깊이 우려내는 사골같기도한 느낌이랄까. 인간의 내면에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끌어내어주는 깊이는 있었던 것 같다. 약한 사람이 베갯머리에 놓고 되풀이해서 읽는 소설을 쓰고 싶다던 작가의 말대로 인간의 내면에 가장 어두운 부분을 말하는 하쓰미의 세계관을 통해 자신의 의지력을 시험해보고 다져보는 시간을 갖기에 좋은 소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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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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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을 싫어한다. 타는 듯한 햇살도 열대야로 잠못 이루는 밤도, 그리고 장마철 습하고 눅눅한 공기가 있는 여름이 싫었다. 나에게 타이완의 이미지는 10년전 내 고향에서 열리는 큰 영화제의 야외극장에서 본 영화에서 시작된다. 도쿄와 타이완, 중국 각 3개국의 감독이 같이 연출한 영화는 각국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세가지 이야기의 러브 스토리였고 그 속에서 나온  타이완의 모습은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과 눅눅하고 습한 공기에서 느껴지는 더위였다. 스토리는 재미있었지만 타이완이라는 나라는 여름을 싫어하는 내게 그저 영화나 TV 에서나 볼 곳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여름은 좋아지지 않았지만 적응이 된건지  예전처럼 그렇게 싫다는 느낌 또한 들지 않는다. 그런 중에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타이베이의 연인들>은 남국의 습하고 더운 타이완을 꼭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 주었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타이완의 풍경과 인연의 소중함
소설과 관계없는 사설이 길었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가 눈앞에 영상이 보이는 것처럼 섬세하게 묘사한 타이완의 풍경이었다. 애초에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스토리는 내가 좋아할만한 간질간질한 로맨스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로맨스라고 분류하기에는 더 드라마틱하고 장대한 느낌이다. 기대했던 로맨스의 느낌이 약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타이완 곳곳의 생생한 풍경과 어우러져 그 풍경을 달리는 고속철도와 이어지는 각각의 사랑과 인연의 이야기는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젊은 남녀의 사랑의 설렘은 물론 다양한 세대와 환경의  등장 인물들로 인해 느껴지는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그들만의 각가의 스토리 때문인 것 같다. 타이완을 여행 중이던 일본 여자 다다 하루카는 타이완 남자 료렌하오를 우연히 만나 하루동안 타이베이을 안내받게 되고 서로 호감을 가진채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지는데 그 후 연락이 끊기고도 서로를 잊지 못해 각자 서로의 나라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나라에 대해, 그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서서히 이해하고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단 하루 여행지에서 잠깐 만난 인연이라면 요즘은 그저 잊기 쉬울 것이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그리 흔하게 쓰지 않는 요즘은 그런 만남이라면 소홀하기 쉽다. 그렇게 치부될 인연이라도 소중함을 말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다다 하루카와 료렌하오는 물론 타이베이와 고속철도에 관련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시작, 진부한 공감과 설렘
이름도 모르고 심지어 국적도 다른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진부한 노래 가사 같지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유일하게 로맨스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다다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만남에서 하루카가 그에게 호감을 갖게된 이유에서 묘한 공감과 설렘이 느껴졌다. 사랑의 시작의 방식에 대한 작가의 표현이 좋았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는 아디다스 운동복 바지에 목둘레가 살짝 늘어진 파란 타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빨아 입어 낡은 티셔츠였고 아직도 세제 냄세가 풍길 것 같았다. 우연히 재회한 사람이긴 하지만 타국 땅에서 낯선 남자의 권유에 응해 스쿠터에 올라탄 이유를 한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하루카는 아마도 그 티셔츠 때문이었다고 대답할 것 같다. 72p 


섬세함에 섬세함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사는 노인 하야마 가쓰이치로와 젊은 시절 절친이었던 타이완 사람 랴오총(나카노 다케오)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거지만 두사람이 같이 학교를 다녔던 시기는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였다. 일본 사람인 작가의 시각에서 쓴 타이완이나 타이완 사람들에 대해 썼기 때문에 일본인의 편협한 시각이 들어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그러지 않도록 섬세하게 신경썼다고 하니 뭔지 모를 안도감이랄까 작가의 세심함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렇듯 요시다 슈이치의 <타이베이의 연인들>은 사랑은 물론 소통을 통한 두 나라의 이해와 화해, 인연의 소중함을 다양한 세대와 아우르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자칫 여러 등장인물과 이야기들로 산만할 수 있는 것은 고속철도의 시작과 완성으로 하나의 선로에 묶어 오히려 고속 철도가 완성되어 가는 과장과 함께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기대감을 주었다. 여름의 끝자락인 요즘 아쉬움이 남는다면 남국의 아름다운 타이완에서 기차 여행하는 설레는 기분과 더불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소설로 읽어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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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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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멸할 줄 알면서도 불빛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 끝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머나먼 파멸의 여정를 떠나는 한 남자를 따라올 자신이 없다면 말이다. 스토리만 따져본다면 분명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본다. 가족을 버리고 한 여자를 쫓아 먼 길을 떠나는 것부터 그가 사랑한 연상의 여자와의 성적 묘사는 작가 자신도 비난의 뭇매가 날아들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50대의 남자 김진영은 주류 회사의 자금 담당 이사로 하루 하루 가장의 삶을 살다가 문득 삶의 권태를 느끼고 우연히 알게 된 연상의 시인 천예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가 돌연 그녀가 사라지고 그녀를 찾기 위해 모든걸 버리고 위험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불과 몇 년 전 이었다면 이러한 스토리는 읽다가 말았을 것 같은데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나 조차도 기묘한 기분이었다. 처음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중년의 남자에 대해서는 잠깐 그의 아들 선우의 입장이었다. 아직은 중년의 나이도 자식도 없어서인지 몰라도 내가 선우였다면 결코 용서하지 못했을 거라는 분노를 느끼면서 읽었다. 단순히 이런 불륜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또 읽기를 중단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깊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깊었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문장이나 표현들이 좋아서 내용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문장이 나를 이끄는 것 같았고 그래서 막힘없이 읽어나갔다. 다 읽은 지금도 김진영을 천예린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보여준 행위들도. 그런데도 좋았다니 나도 참 기분이 묘했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호수 바이칼호 같아서 그 호수를 멍하니 바라본 것 같기도 하고 김진영처럼 나도 바이칼에서 죽은 천예린에게 홀려 바이칼호까지 이끌려 간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끝에 작품 중에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처음에 2600매에 달라던 작품을 거의 반을 잘라내어 1500매로 다듬었고 최근에 또 다시 300매를 깎아내어 새롭게 내었다. 오랜 세월 작가의 손에서 다듬어져 남다른 애착이 묻어나는 것도 같다. 마지막까지 생애를 바쳐 천예린을 따랐으나 결국 그녀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고 느끼는 분노에의 허무한 결말에도 허무는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며 이미 마음이 꽉 찼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의 말처럼 단순히 불륜의 러브스토리로만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스토리 만으로는 읽어보라 추천하기는 힘들다. 좋다고 하는 것도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가의 문장이 좋았을 뿐 문학적으로 작품성이 어떠하다는 판단도 못한다. 단지 그냥 읽는 내내 좋다고 느꼈을 뿐인 작품이지만 세월이 흘러 시간의 주름을 알 나이가 될때쯤 꼭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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