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아침 드라마의 법칙처럼 되어버린 막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드라마를 보면 여러 막장 요소들 중에 꼭 복잡 다난한 가족 관계가 등장한다. 그 가족 안에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고 암유발 될듯한 느낌의 불륜 관계도 있으며 가족끼리의 암투도 등장한다. 처음 소설의 중심인 야나기시마 일가의 가족 구성원과 그 프로필을 대략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야말로 엄마들이 좋아하는 막장 드라마 속 콩가루 집안이 생각났다. 이국적이며 멋스럽고 웅장해 보이지만 어딘지 지역적 색깔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나기시마가의 서양식 대저택처럼 3대가 같이 대저택에 사는 언뜻 보면 화목할것만 같은 가족의 면면에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가족들과는 다른 구성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띠지의 문구처럼 분명 지금까지의 에쿠니 가오리 소설 중 가장 서사적이고 무개감있는 걸작이기에 충분한 것 같다.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중 가장 '그녀답지 않은' 소설이었다. 언제나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와 더불어 그다지 복잡하지 않는 이야기로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였다면 이 소설은 그 문체와 심리묘사는 그대로이면서 이야기는 한층 깊고 커진 느낌이다. 지은지 70년된 서양식 대저택에 사는 야나기시마 일가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일가의 창업주인 다케지로 할아버지와 러시아인 기누 할머니, 이모와 외삼촌이 같이 살며 자매중 한 사람의 네 아이들 중 둘은 엄마와 아버지가 다르다. 이모와 외삼촌에서 부터 4명의 아이들은 집안의 독특한 교육방침으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른바 홈스쿨링으로 집에서 그 교육을 대신한다. 범상치 않은 가족만큼이나 소설의 특이한점은 각 단락마다 시점과 시대, 계절, 화자가 바뀐다. 어떤 규칙성도 없이 느닷없는 변화인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구성은 처음엔 좀체 적응되지 않고 단락의 도입을 어느 정도 읽어야 화자를 알 수 있어서 헷갈리기도 했지만  소설을 읽어 가면서 가족 구성원의 면면과 비밀을 알게되고 앞의 이야기와 퍼즐 맞추 듯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그런 것들이 아무려면 어떠냐 싶게 빠져들게 되었다. 약혼자가 있음에도 7년씩이나 가출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그 약혼자는 그녀와 아이까지 받아들여 키우고 반대로 불륜의 여자와 낳은 아이는 물론 불륜의 상대까지 야나기시마 일가와 왕래를 하는 것이며 홈스쿨링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사회성이 결여된 아이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 위해 그의 고용주와 결혼한 러시아인 할머니, 그 외에 가족 구성원의 각자의 복잡한 이야기들은, 물론 뭔가 분명 콩가루 막장 집안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막장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좀 이상한 느낌일 수는 있지만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렇다. 아마도 그건 야나기시마 일가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저택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문화가 섞인 듯한 이국적 가풍과 더불어 에쿠니 가오리만의 간결하고 섬세한 절제된 문체로 그려져서인 듯하다. 과연 에쿠니 가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서 단지 야나기시마 가족들만의 시점으로 이루어졌다면 뭔가 공감대없이 그냥 특이한 가족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가족과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제3자와 연결고리가 있지만 그 일가는 아닌 외부의 사람들의 시점으로 바라본 야나기시마 가족의 이야기가 나와 독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내어 준다. 이 역시 소설이 갖는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작가만의 섬세함이 돋보이는듯 했다. 러시아인 할머니의 이웃인 친구라던가 큰아들 고이치와 결혼한 교코, 사위의 불륜녀인 아사미씨, 그리고 그들이 자주 드나들던 초밥집 주인 등 이들의 눈을 통해 보여진 야나기시마 가족의 모습은 나에게 나만 그렇게 보인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공감대가 느껴졌다.
 
 
 
"엄청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렇죠?"
다카오가 뭔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따뜻한 기분이 들고, 거기에 내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미혼인 채 아이를 낳는 데에는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을 테고, 더구나 본 부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환영받았을 리 없다. 하지만 한곳에 모여 손을 흔들고 있던 그들은 행복한 대가족처럼 보였다. - 416p
 
 
가장 그 일가와 관계없어 보였던 초밥집 사장이 가장 공감되었는데 아마도 소설을 읽는 나의 입장 (일가와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과 가장 비슷해서인 것 같다.

페루의 오래된 도시 쿠스코에는 무려 12각의 돌이 포함된 돌벽이 유명하다. 그 신기한 돌은 물론 돌벽을 이루는 각각의 돌들은 하나같이 모양과 그 크기가 다르다. 고대의 잉카인들의 지혜로 새워진 이 돌벽은 그럼에도 꼭 맞추어 깎은 듯 빈틈없이 견고하여 페루의 오랜 역사와 함께했다. 소설의 거의 다 읽었을 즈음 나는 문득 이 돌벽이 생각났다. 서로 크기도 모양도 다른 돌들은 야나기시마 일가의 가족들이고 그 돌들을 정교하게 짜맞추어 세월이 지나도 견고한 오래되고 많은 이야기를 가진 서양식 대저택이라는 돌벽이 되는 것이다. 전쟁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고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온 돌벽처럼 가족 중 누군가는 세상과 작별하고 집을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크고 웅장한 서양식 저택은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견고히 서있다. 비록 '언뜻' 보아서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물론 슬픔도 분노도 행복도 있다. 그것은 평범한 가족 구성원이지만 우리들 가족 안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가족의 시간들도. 그동안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그런 시간들에 대해 담담한 문체로 끄집어 내어준 에쿠니 가오리의 이번 소설은 그래서 뭔가 뭉클함이 있는 소설이었다. 비록 앞으로도 그 시간들에 대해서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오랜시간 견고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대저택처럼 나의 가족들도, 야나기시마가도 오랜 시간 견고히 그자리에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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