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상계 - 근대 상업도시 경성의 모던 풍경
박상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경성상계



이 책을 처음 보고 두 사람이 생각났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간송 전형필. 예전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백남준의 집안이 엄청난 거부여서 일제시대 전투기를 구입해서 일본에 헌납했다고 한다. 백남준에 관한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가족들이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기전 기념촬영 한 모습을 봤는데 외국의 귀족의 모습과 별 다를게 없었다. 간송 전형필 집안은 일제시대 손꼽히는 거부였다. 집안 어른들이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의 모든 재산이 간송에게 상속된다. 그 재력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 그리고 위창 오세창 선생의 지도로 일본으로 넘어가던 많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다. 두 집안 모두 당시 내노라 하는 거부였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경성상계. 개항 이후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까지 우리 나라 재계(당시는 상계)를 다룬 책이다. 조선 상계의 대표격인 육의전 이야기가 그 첫째다. 조선 시대 장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농공상, 무본억말, 농자천하지대본 등등....농업을 널리 장려한 반면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도성안에 유일한 시장이 육의전이었다. 그들은 금난전권이라 하여 다른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기 까지는. 인구가 증가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사상인의 활약, 그리고 개항으로 인한 서구의 개화 물품들의 유입으로 조선의 만물상이라던 육의전은 과거의 위세를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변화의 바람을 타지 못한 것이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던 육의전의 역사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개혁의 고비를 넘어선 사람이 백윤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조부다.



1900년대 초 우리 상계는 일본인들이 우리 경제를 잠식해 가던 시기다. 우리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경제 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였다. 특히 회사령은 회사를 설립하거나 해산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조선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함으로써 산업 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이 기업을 하기에는 너무 악조건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병두의 [별표고무신]은 대박을 터트린 상품이었다. 일본에서 들여 오던 모양을 조선 사람에게 맞게 개량을 한 것이 대박의 이유다. 우리 발에 맞게 폭은 과감히 넓히고 굽은 크게 낮추되 발등을 드러내서, 이른바 우리의 체질과 환경에 적합한 '조선식 고무신'으로 변신을 한 것이다.



[경성상계]에서 가장 많은 지면과 정성을 쏟은 부분이 일제 시대 백화점 이야기다. 일본의 백화점과 우리 민족이 세운 백화점과의 대결, 우리 자본끼리의 대결도 눈여겨 볼 만하다. 박흥식. 평안도 용강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박흥식. 16살 어린 나이(지금 기준으로는 중3, 고1이지만 그 당시는 제법 어른 행세 하던 나이였을게다)에 쌀장사를 시작으로 22살에 인쇄소를 경영한데 이어 용강 철도역이 새로운 화물 집산지로 발달하게 되자 '서선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를 바탕으로 24살에 경성 상계에 진출한 박흥식은 양지(洋紙)도매상인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경성 종이 소매업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게 되자 일본인들의 견제를 받게 된 박흥식은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종이 생산자와 담판을 벌인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인들의 벽은 높았다. 며칠 째 머물던 여관에서 듣게 된 사소한 정보 하나 - 종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북유럽에서도 생산하고 특히 스웨덴은 세계 최대의 양지 생산국가 라는 것. 일본의 스웨덴 영사관을 찾아가 스웨덴으로부터 양지를 직수입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일본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일본의 독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 민족감정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선일지물로 거래처를 바꾸게 한다. 막대한 부를 쌓은 박흥식은 종로 네거리에 있던 화신상회를 인수해서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3층 높이의 콘크리트 대형 건물을 세운다. 이 보다 등장한 최남의 '동화백화점'. 깔끔한 상품진열과 다양한 품목 취급, 당시로는 획기적인 정가판매, 그리고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200명중 절반인 100명을 여직원들로 채용한다. 미인계를 들고 나온다. 나중에 이 미인계가 화근이 될 줄이야...일본의 거대 자본 속에서도 화신백화점과 동아백화점은 민족 자본으로 분투한다.




재밌는 자료들이 있어 몇 가지 붙인다. 1911년 한일병합 직후 [시사신보]가 조사한, 당시 50만원(지금 돈 약 600억원) 이상을 소유한 자산가는 총 32명인데 상위 랭크는 이희:흥선대원군 장남, 이강: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박영효:철종의 사위, 이완용:고관대작, 이재완:흥선대원군의 동생인 흥안군 이최응의 아들, 송병준: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민영휘:고관대작, 민영달:고관대작, 김진섭:한성마포 거상, 강유승:평안도 진남포 거상, 백윤수:한성 종로 거상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을사 오적이 둘이나 있다. 이완용과 송병준.



일제 시대 '명사'들의 고급 자동차의 가격을 나열한 대목도 있다. 최창학:1만3,000원(지금 돈 15억 6천만원), 민대식:8,000원(지금 돈 9억 6천만원), 김기덕:8,000원, 방응모:8,000원, 신석우:7,000원(지금 돈 8억 4천만원), 박영철:6,000원(지금 돈 7억 2천만원) 등등. 지금보다 인플레가 조금 더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차 가격이 지금 최고 가격과 비슷하다. 한 때 이건희 자동차로 불리던 마이바흐가 7-8억 정도 하니.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응모도 눈에 띈다.



이 책은 많은 부분을 당시 모습을 잘 묘사한 [삼천리]나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신문, 잡지를 인용한 부분이 많다. 지금과는 다른 맞춤법의 발음나는 대로 적은듯한 글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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