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걷는 이유 - 이부스키에서 왓카나이까지, 기억과 성찰의 2,600km
임병식 지음 / 디오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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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걷는 이유 : 애증, 미래, 복잡한 셈법. 일본을 걷기로 사유하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한국인에게 일본은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수탈과 여전히 일본 서점가를 휩쓰는 혐한 서적들을 마주할 때면 깊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일본을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로 꼽는다. 단순히 거리가 가까운 이유도 있겠지만, 일본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개성 넘치는 상점들을 구경하고, 골목 어귀에서 진한 돈코츠 라멘 한 그릇의 깊은 맛에 감탄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즐기기도 한다. 

마음속으로는 그들의 선진화된 인프라나 장인 정신, 트렌드를 주도하는 문화적 역량을 동경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적국'이라는 꼬리표를 달며 깎아내리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민낯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순은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오래된 적대적 역사, 지리적 인접성, 그리고 정치·사회적 유사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일 감정이 강한 사람조차도 막상 일본에 가면 질서 정연한 거리에 감탄하게 된다. 국가를 미워하되 국민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감상적인 구호를 넘어, 그들의 장단점을 명확히 직시하고 다각도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로 발전시키는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얼마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태풍을 대신 맞아 건뎌주는 고마운 점과 오염수를 방류한 증오도 머리 속에 꼭 챙겨주자.


언론인 출신 임병식 작가의 에세이 “일본을 걷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단순히 맛집이나 쇼핑 명소를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를 넘어, 일본 최남단 이부스키에서 최북단 왓카나이까지 일본 전역을 아우리는 과거사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일본이 지닌 두 얼굴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독자와 대화하고 있다.


여정의 초반부, 책이 우리를 안내하는 곳은 한국인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 중 하나인 후쿠오카다. 하카타역의 번화함과 모모치 해변의 평화로운 풍경을 즐기던 발걸음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후쿠오카 형무소 터에 다다르면 순식간에 무거워진다. 그곳은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차가운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조선인 청년,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비극이 서려 있는 장소다.

특히 그들의 사인이 단순한 옥사가 아니라 일본군의 생체실험 때문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당시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장기를 적출하거나 바닷물을 수혈하는 등의 끔찍한 실험을 실제 자행했던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만행, 그리고 731부대 등이 벌인 반인륜적 행태를 감안할 때, 형무소에 갇힌 조선인 청년들이 생체실험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은 가볍게 흘려버릴만한 무게는 아니다. 관광의 흥겨움에 취해 있던 한국인이라도 불과 몇 장의 역사적 진실 앞에서는 순식간에 차가운 반일 감정으로 돌아설 수밖에.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우리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한일 양국이 겉으로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 근본적인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아직도 기나긴 치유의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발길은 사가현에 위치한 나고야성(名護屋城) 터를 향해서 이어진다. 

대도시 아이치현의 유명한 나고야성과 이름이 같아 혼동하기 쉽지만, 사가현의 이곳은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축조했던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은 그의 사후, 사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새로운 정권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씁쓸한 성터만 남아 한 정권에 따라 지역의 위상과 쓸모가 바뀌는 역사의 덧없음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마치 오래된 중세를 다룬 게임 배경에 등장할만한 비장한 서사다.

이곳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성터 인근에 세워진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의 전시 태도다. 과거의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 내 우익의 행보와 달리,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을 한일 교류사라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망하며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오랜 감정의 골을 씻어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비전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이 대목에서는 선조 시절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의 무능함이 겹쳐 떠오른다. 만약 그때 파벌 정치에 빠지지 않고 국가적 위기에 제대로 대비했더라면 임진왜란의 참상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 이해관계와 정쟁에 휘둘려 국민의 삶과 국가의 위상을 등한시 하는 정치인이 활개치고 있지는 않은지 예리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와는 반면, 가고시마현 지란에 위치한 '특공평화회관'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과 군국주의의 망령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기리는 이곳에는 전투기 제로센과  인간 어뢰 가이텐(참 대단한 발상 아닌다!)으로 대표되는 자살 병기들이 미화되어 전시되어 있다.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기는커녕, 죽음을 강요당한 젊은이들을 흠모의 대상으로 둔갑시켜 맹목적인 애국심을 선동하는 전시는 일본 선동가들의 사악함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지적하듯 일본의 전후 행태는 철저한 반성 위에서 역사 교육을 진행한 독일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범죄에 면죄부를 주며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떠오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과거 나치에 의해 끔찍한 학살을 당했던 유대인들에게 전 세계가 깊은 연민을 보냈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등지에서 벌이는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은 그들을 향했던 측은지심을 거센 분노로 뒤바꿔 놓았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 연민의 논리에만 갇힌 국가는 결국 국제사회의 지지를 잃게 된다는 뼈아픈 패착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얀 국물이 머리속에 연상되는 나가사키는 카스텔라와 짬뽕의 도시로 친숙하지만, 동시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쏟아진 원폭으로 인해 순식간에 스러져간 10만 명 이상의 인명,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의 희생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것이 군국주의로 폭주하던 국가의 잘못된 방향타와 오판에서 비롯된 불가피하거나 필연적인 결과였다 할지라도, 민간인들의 죽음 앞에서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나가사키가 집단의 기억을 정리하는 방식은 분열되어 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이 원폭 피해만을 부각하며 피해자 행세를 대놓고 하는 반면, 시민들의 자발적 힘으로 운영되는 나가사키 인권 평화자료관은 일본이 가해자로서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들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조망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하나의 도시가 비극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더욱 씁쓸한 것은 조선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방식마저 갈라져 있다는 점이다. 타국 땅에서 스러져간 동포들을 추모하는 위령비마저 남한과 북한의 이념에 따라 별도로 설치된 모습은, 가해국 일본의 무책임함 속에서 분단된 우리 민족의 비극적 현대사가 오버랩되는 비극의 현장이다.



시마네현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 당사자, 바로 그들이다.

시마네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25~30%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지방정부는 한국을 자극하는 독도 영유권 분쟁에 앞장서고 있다. 저자는 인구 65만 명 남짓한 이 작은 도시가 무리하게 독도 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중앙정부의 관심과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얄팍한 정치적 계산으로 분석한다. 주민들의 실제적 관심은 덜한데도 불구하고, 극우 정치인들의 선동에 휘둘려 한국인 관광 유치를 놓치고 스스로 수익 사업을 걷어차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화려한 네온사인과 맛집으로 포장된 관광지로서의 일본을 넘어, 정치, 사회, 역사가 쌓인 진짜 일본의 속살을 드러내고 우리와의 관계와 미래를 위한 현재의 역할을 걸음과 사유의 과정으로 엮어내고 있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일 양국이 애증의 역사를 어떻게 공유해왔는지, 그리고 이 복잡한 갈등의 고리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묵직한 화두가 던져졌다는 사실과 마주친다.

물론 진정한 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은 일본이 가해자로서의 잘못을 온전히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죄를 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극우 성향이 강한 일본 정치권에서 당장 그런 변화를 기대하기는 김정은 위원장이 통일 제안을 해오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만난 수많은 양심적인 일본 시민단체들처럼, 과거사를 직시하고 연대의 손을 내미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국가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무조건적인 혐오를 쏟아내기보다는, 개인 차원의 여행과 문화 교류를 통해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과 접촉하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쇼핑이나 먹거리에만 치중한 소비적인 여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지역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맹목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가장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진정한 '일본을 걷는 이유'일 것이다.

또하나, 과거와 달리 성장한 한국을 바라보는 시샘의 눈길도 잊어서는 안된다. 아직 저력을 잃지 않는 강대국이지만 세계 넘버 2를 차지했던 위상을 기억하는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현실의 모습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듯하다. 어떻게 그들과 우리의 문화가 서로가 즐기는 공유의 가치로 확대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시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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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ㅣ 클래식 클라우드 39
김석.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 arte(아르테)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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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떠나는 프로이트의 발자취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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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 arte(아르테)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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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039 지그문트 프로이트 : 도시로 떠나는 프로이트의 발자취 탐방기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낯선 골목, 낯선 풍경을 걷는 여행을 좋아한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처음 보는 건축물과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는 일은 현장에서도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난 휴대폰의 갤러리를 하나씩 되돌려보는 시간여행도 지루할 틈이 없다.

하지만 그저 남들이 다 가는 유명한 명소를 눈도장 찍듯 돌아보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평범한 일정에 무료함을 느끼지는 않는지? 단순한 소비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확고한 테마를 가지고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여행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르테 출판사에서 선보이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이런 질문에 딱 맞는 대답을 준다. 누군가의 인생역로를 뒤집어보며 관광지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역사 이정표를 만들어낸 공간에 대한 묘한 공감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는 심리학의 시조새, 지그문트 프로이트.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최초의 심리학자인 그가 실제로 머물며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뇌했던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 공간의 맥락 속에서 사상을 읽어내는 여정은 너무 현학적이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눈높이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누구나 한 천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인간 정신의 심연을 탐구하는 일에 동참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이 여느 심리학 개론서나 평전과 구분되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그저 딱딱한 활자와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네 살 때부터 노년기까지 평생을 보낸 오스트리아 빈을 시작으로 파리, 로마, 그리고 마지막 안식처였던 런던까지 공간과 사상의 연결고리를 엮어낸다.



19세기 말 빈의 풍경 묘사는 꽤나 인상적이다. 

프로이트가 머물렀던 베르크가세 19번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빈의 모습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한 문화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속으로는 엄격한 부르주아적 도덕관념과 가부장제, 그리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던 모순의 공간이었다. 그 숨 막히는 억압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을 감추어야만 했고, 억눌린 욕망은 결국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적 마비나 발작, 즉 우리가 히스테리라고 부르는 마음의 병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프로이트가 하필 그곳에서 수많은 히스테리 환자들을 만나고 무의식이라는 깊은 우물을 파내려 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책 속에 담긴 진료실 풍경, 그가 단골로 찾았던 카페에 대한 저자의 설명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이 어떻게 그가 숨 쉬던 도시와 교감하고 영감을 주고받으며 탄생하는지 목도할 수 있다. 사상은 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시대정신이 공명을 통해 탄생한다는 좋은 사례이다.


책 중간중간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프로이트가 어떻게 딱딱한 신경학자에서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정신분석학자로 변모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발상을 어떻게 실제 연구와 치료로 발전시켰는지 드라마틱한 여정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프로이트가 국비 장학생으로 머물렀던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은 그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신경학자 샤르코가 최면을 통해 히스테리 환자들의 증상을 유발하고 없애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전까지 의학계는 히스테리를 여성의 자궁 문제나 꾀병으로 치부했지만, 프로이트는 파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신체적 증상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을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프로이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샤르코의 족적을 병원에서도 존경의 의미로 명명하는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들을 임의로 훼손할 수 없게 만드는 법도 여행자에게는 고마운 부분이다. 


빈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만 해도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로 쓰이던 최면이나 전기 충격 요법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리고 선배 의사인 브로이어와 함께 새로운 길을 찾는다. 책의 제1장에 등장하는 안나 O의 에피소드는 정신분석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물을 마시지 못하고 모국어를 잊어버리는 등 심각한 증상을 앓던 안나 O가,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불쾌한 기억과 감정을 말로 쏟아내고 난 뒤 증상이 말끔히 사라지는 요법을 발견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사례를 발전시켜 환자가 편안한 카우치에 누워 자신의 상처와 꿈,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검열 없이 털어놓게 만드는 자유 연상 기법, 즉 요즘 우리에게는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의사와 대화 치료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거대한 학문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혹독한 분석이다. 그는 겉보기엔 멀쩡한 엘리트 의사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찾아온 심각한 신경증, 대인관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기차 여행을 두려워하는 공포증 등 숱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빈 외곽의 벨뷔에 머물며 자신의 꿈을 집요하게 분석했다. 남의 마음을 치료하기 전에,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운 근친상간적 욕망과 유년기의 상처를 똑바로 마주한 그 뼈아픈 용기가 바로 위대한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정의 끝자락은 그가 나치의 핍박을 피해 노구를 이끌고 망명했던 장소는 런던이다.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 현재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남아있는 이곳에서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싸우면서도 펜을 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광기를 목격한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살려고 하는 본뿐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의 세계로 되돌리려는 죽음의 본능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도출한다. 런던의 차분하면서도 우울한 공기는, 인간 문명의 미래를 비관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성찰했던그의 마지막 고뇌를 담아내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책의 읽어가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던질까 생각해본다.

끊임없이 자극적인 콘텐츠가 쏟아지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과 선택마저 나 대신 결정해 주는 요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고,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항상 이럴 때 많은 책에서는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과연 비판적 사고의 실체는 무엇인가 갸우뚱하다. 이것도 AI에게 물어봐야 하나?


AI시대에 심리학은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될까.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메커니즘은 인간의 오류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실수,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엉뚱하고 기괴한 꿈, 앞뒤가 맞지 않는 비이성적인 행동, 강박. 즉, 가장 합리적이지 않고 찌질해 보이는 인간의 틈새를 고민하고 그 안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AI는 철저한 논리와 데이터, 완벽한 패턴과 효율성의 결정체다. 그들은 오류를 배제하고 가장 매끄러운 정답만을 도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론 거짓말도 잘 친다.) 

웨어러블 기기가 사람의 심박수나 뇌파, 표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관리하고, 그에 맞는 명상 음악이나 뻔하지만 효과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초급 심리 상담은 AI가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해낼 것이다. 인간 상담사가 놓칠 수 있는 미세한 생체 데이터까지 읽어내어 완벽한 솔루션을 제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심리학은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AI가 결코 계산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하다.

데이터나 패턴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모순된 감정, 효율성은 바닥을 치지만 나를 나답게 만드는 짙은 상처와 콤플렉스, 파괴적인 줄 알면서도 끌리는 충동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학문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는 AI가 이 영역까지 넘볼 수 있겠지만 항상 엉뚱한 선택을 하는 인간 각 개인의 엉뚱함은 그래도 우리 몫이지 않을까 싶다.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주저없이 전공과목을 “심리학”을 선택하고 싶은 나의 이룰 수 없는 작은 바램이 이루어지는 작은 독서의 장점도 이 책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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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역사 -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ㅣ 소소의책 역사교양서
니키 헤이즈 지음, 최호영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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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마음을 열어보고, 나의 마음도 열어보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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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역사 -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ㅣ 소소의책 역사교양서
니키 헤이즈 지음, 최호영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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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역사 : 세계의 마음을 열어보고, 나의 마음도 열어보는 여행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대학 시절, 심리학 교양 수업 하나쯤은 제대로 들어 둘 걸, 후회가 종종 다가온다. 

복수전공은 커녕 개론 수업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과거의 나에게 쯧쯧 혀를 차는 경우는 보통 사회에 나와 현실과 부딪힐 때이다.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하루의 절반은 보이지 않는 고객의 심리를 추측하고 분석하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얽히고 설킨 조직 내 갈등과 인간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심리적 줄다리기에 할애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일, 그리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동료들과 협업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 모두 그 기저에는 묵직한 심리학 메커니즘이 깔려 있다.


결국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업무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심리학 책들을 뒤적였다.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본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심리 실험들에 큰 흥미를 느꼈고, 책에서 본 내용이 영화 “엑스페리먼트(Das Experiment)”에서 스크린으로 투영된 충격적인 장면에서 놀랐던 경험도 있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간수와 죄수라는 역할을 부여받자마자 권력에 취해 잔혹해지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던 시나리오는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환경과 상황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 섬뜩한 이면은 심리학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해독하는 마법의 열쇠로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즘 서점가 매대를 장식하고 있는 '다크 심리학' 류의 책들에도 눈길이 간다. 가스라이팅, 마키아벨리즘, 타인을 은밀하게 조종하고 설득하는 기술 등을 다루는 이 책들은 어딘가 얄팍한 '사짜' 냄새가 나면서도, 매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대를 설득하고 방어해야 하는 현대 직장인에게는 은밀하게 쥐고 싶은 척척 만능 치트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이나 자극적인 심리 실험 결과만 지식창고에 챙겨넣기 보다는, 파편화된 심리학 지식들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꿰어줄 전체 역사에 대한 지도가 필요했고, 니키 헤이즈의 저서는 지적인 허기를 훌륭히 달래준다.


저자는 학자들의 이름과 실험 연도를 나열하는 대신, 심리학이 시대와 어떻게 호흡을 주고 받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해 왔는지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이 책은 기존의 심리학의 역사를 다루었던 도서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 (물론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의 역사서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나 근대 유럽의 실험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은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영향을 심리학의 기원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는 서양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과제였음을 명확히 하여, 심리학자들 조차 놓치기 쉬운 문화적 다양성의 토대를 마련한다.

또한 저자는 어떤 위대한 학자의 이론도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완벽한 정답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인간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 행동주의, 인지심리학 등 각 학파는 저마다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다. 이를 통해 특정 이론의 승리를 찬양하지 않고,  한계점을 명확히 보여주며 전체 이론들을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다양성을 독자가 품을 수 있게 유도한다.



무엇보다 고전 실험의 비윤리성에 대한 뼈아픈 직시가 인상적이다. 내가 영화 “엑스페리먼트”를 보며 느꼈던 불편함을 저자는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파블로프나 왓슨, 밀그램의 실험을 단순히 위대한 과학적 성과만으로 포장하지 않고,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피험자의 권리가 무시되고 윤리적 기준이 미비했던 시절, 인간을 기계나 통제 가능한 데이터로만 취급했던 과거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를통해 독자의 영역에 있는 일반인들이 복잡한 심리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비판적 시각으로 인류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 선의의 감시자가 되는 암묵적 동화를 이끌어낸다. 각성된 눈이 많을 수록 악마같은 실험실을 존재를 영위할 수 없다.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의 영역에 머물던 마음에 대한 사유를 근대 과학의 반열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세 명의 거인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그들이 갇혀 있던 시대적 한계 역시 냉철하게 해부한다.

단연 눈에 띄는 선각자는 빌헬름 분트다. 187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차린 그는 마음에 대한 연구를 종교와 철학으로부터 독립시킨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다.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관찰해 보고하는 내성법은 훗날 너무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저자는 분트의 이 첫걸음이 없었다면 객관적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이후의 수많은 심리학적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학자,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인간의 자만심을 산산조각내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심연인 무의식을 심리학 이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저자는 프로이트를 보편적 이론의 허상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사례로 들고 있다. 그의 억압 메커니즘과 성적 발달 이론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좁은 사회의 특정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도출된 결론일 뿐,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 진리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행동주의의 창시자 존 브로더스 왓슨도 흥미로운 학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대신, 철저히 측정하고 관찰할 수 있는 행동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심리학을 엄밀한 자연과학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그의 기계론적 인간관은 비윤리성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생후 11개월 된 아기에게 쥐와 쇳소리를 결합해 인위적인 공포를 심어준 실험은, 인간을 그저 자극과 반응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오만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학문을 위한 목적이라도 인륜을 넘어서는 행위는 일탈일 뿐이라는 점을 다시 꺠닫게 된다. 정작 왓슨이 현대 마케팅의 아버지로 불리고, 그의 광고기법은 지금도 사용되는 반복에 근거한 행동주의라니 놀랍기만 하다.



위대한 발견의 이면에는 학문이 시대의 편견과 결탁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은 참혹한 부분도  존재한다. 저자는 심리학 발전에 치명적으로 역행한 대표적인 프랜시스 골턴 (Francis Galton)의 경우는 내가 마케팅 업무를 하며 인간을 통계 수치나 타깃군으로만 분류하려 했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골턴의 '우생학'은 많이 들어보았던 용어일 것이다. 그는 인간의 지능과 재능이 전적으로 유전된다고 믿었다. 교육이나 환경 같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채, 상위 계층이 잘사는 것은 오직 유전자가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끔찍한 유전 결정론은 훗날 나치 독일로 넘어가 특정 인종과 장애인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의 과학적 명분이 되었다. 심리학이 인류를 치유하기는커녕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칼날로 쓰인 최악의 비극이다. 



책을 읽어가며 떠오른 몇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중 마케터로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과연 AI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던 심리 실험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을까?였다. 비용과 속도면에서 그동안 고민하던 고객 분석이 너무나 편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자의 관점을 빌리자면 대답은 불가능이었다. 인간은 고정된 변수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 그리고 돌발적인 감정의 역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사회적 존재다. AI는 방대한 과거의 텍스트와 반응 패턴을 통해 인간의 정보 처리 구조를 훌륭하게 모사할 수 있다.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이 밝혀낸 메커니즘을 딥러닝으로 구현해 낸 셈이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파고들었던 깊은 무의식의 벗어날 수 없는 늪지대나, 인간이 가진 고유의 실존적 고뇌까지 AI가 시뮬레이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AI는 훌륭한 연구 보조 도구이자 통계적 예측 모델일 뿐, 살아 숨 쉬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거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런 결론을 낼 수 있었지만, 아직 심리학의 초짜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는 이 부분을 다시 한번 되뇌어 보기로 했다.


책을 덮으며, 심리학의 역사를 훑어보는 작업은 파편화되어 있던 내 머릿속 지식들을 하나의 튼튼한 지식 골격으로 만들어내는 경험이었다.

기존 도서들이 천재적인 학자들의 발견을 칭송하며 선형적인 정답을 강요하는 위인전기라면, “심리학의 역사”는 학문이 어떻게 시대와 부딪히고 깨지며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편영화 모음집 같았다.

단순히 마케팅 스킬을 하나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매력적인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대학에 돌아가 심리학을 제대로 전공해 보고 싶다는 엉뚱하고도 진지한 상상. 당장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제 나는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면에 숨겨진 맥락을 들여다볼 줄 아는, 조금은 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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