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리허설 - 살기 위해, 한 번 죽어 보기 ㅣ 세계척학전집 8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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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척학전집 8. 죽음 리허설 : 준비하는 자가 한결 나을 것이다, 죽음일지라도!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사람이란 참 망각의 동물이다. 

몸살이라도 심하게 앓고 나면 그제야 ‘아, 안 아프고 밥 잘 먹던 평상시가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하고 건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몸이 좀 나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느슨해진다. 


출근길의 피로감이나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스트레스에 불만을 잔뜩 늘어놓으며 짜증 나는 하루를 원망하기 그런 단면들이 그래 인생의 본체라고 하면 할 말없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음 앞에서의 우리 모습도 딱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이클립스의 책 “죽음 리허설”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죽음이 턱밑까지 다가와서야 부리나케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려 애쓸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삶의 가치를 깨닫고 죽음을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바로 그 ‘미리 해보는 생각의 연습’을 돕는다.


책에서 가장 내 마음을 끄덕이게 한 건 미셸 드 몽테뉴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걸작은 제대로 사는 것이다.” 


몽테뉴가 “수상록”에 남긴 이 말은 평범하지만 참 묵직하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그가 ‘잠을 엿본 사람’이었다는 대목이다. 몽테뉴는 하인에게 자신이 깊이 잠들었을 때 일부러 좀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꿈을 꾸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 몽롱하고 황홀한 경계를, 현실의 의식 속에서 잘게 쪼개어 직접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다. 

꿈속에서 아무리 생생하고 대단한 일들을 겪어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기억은 아스라이 잊힌다.


하지만 그 찰나의 즐거움조차 죽음이라는 거대한 끝에 이르면, 결국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마치 꿈속의 일장춘몽처럼 하나의 찬란한 슬픔처럼 남지 않을까? 죽음을 억지로 피하려 하기보다 이처럼 주관적이고 진지하게 자꾸 곁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평범한 하루를 조금 더 애틋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해석하는 여러 관점 중 기독교적 시각, 특히 사도 바울의 사례를 다룬 부분도 종교의 유무를 떠나 꽤 많은 것을 시사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비천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 현생이, 사후의 더 거대한 무언가로 남기 위해 겪어내는 비참하고도 연약한 과정일지 모른다는 접근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종교가 현실의 고단함을 ‘내세’라는 달콤한 속임수로 포장해 주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의 괴로움과 힘겨움 이면에서 삶을 버텨낼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속임수조차 내게 해로운 방식은 아닐 듯 하다. 유한한 삶을 견뎌내는 인간만의 지혜로운 방어기제로서 역할은 충분히 해낸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거나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스트리아 철학자 쿠르트 바이어의 ‘망치의 목적’ 이야기가 아주 그럴싸한 해답을 내놓는다. 


바이어는 목적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짚는다. 망치의 목적은 망치를 ‘만든 사람’이 정한다. 못을 박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그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사람의 목적은 다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의 목적을 정한다. 주말에 동네사람들이 즐겨찾는 맛있는 빵집을 차린다거나, 내 아이를 무탈하게 잘 키워내는 것이든, 그 사람이 스스로 품은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된다.


기독교 철학에서는 인간을 만든 신 그 자체가 목적이고, 신이 준 목적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결국 그 답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건 우리 자신의 몫이다. 만약 신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목적은 오롯이 내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정했다면, 죽음에 이르는 일생의 과정 역시 떠밀려가는 불안한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기획을 통해 밟아가는 뚜렷한 스텝이 될 수 있다.


결국 “죽음 리허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말을 꺼내지만, 실은 오늘 하루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아낼 것인가를 질문한다. 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묻고 그 목적이 확실해진다면,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하루는 명확한 과정들로 채워갈 마음가짐을 추수르는데 큰 동기가 된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 역시 내 스스로 부여한 일생이라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로 두렵지 않게, 오히려 당당하게!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몸이 아파야만 건강을 되돌아보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오늘은 불평 없이 내게 주어진 하루라는 걸작을 성실히 시간을 채워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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