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기담 - 경성의 밤을 뒤흔든 살인 사건으로 들여다본 식민지 조선의 속살
전봉관 지음 / 더숲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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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소설보다 더 기막힌 식민지 조선의 기묘한 이야기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들의 심리와 조직 내 갈등 양상을 분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범죄나 스릴러 장르를 즐겨 읽는 내게 '식민지 조선의 블랙박스'라는 카피라이트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의 기록이라니.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다. 

벽돌 책. 아 기분 좋아.


웬만한 장편 소설 3권은 훌쩍 넘길 듯한 872쪽 분량의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하는 벽돌책은 항상 도전의 아드레날린을 호출한다. 사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마주하면 한편으로는 위압감이 들고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를 완벽하게 정독하고 났을 때 밀려오는 뿌듯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기필코 정복하겠다는 묘한 도전 의식이 꿈틀 꿈틀.



이 책은 저자인 전봉관 교수가 2006년에 출간했던 원작을 20년 만에 완전히 새롭게 다듬어 펴낸 2026년 개정판이다.  20년에 걸친 추가 연구와 사료 발굴을 거쳐 전체 분량의 70~80%를 아예 새로 썼다고 하니, 방대한 양이 추가된 완전히 새로운 책이라 봐도 무방하다. 


책은 총 스무 편의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담았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 없이 목차를 훑어보다가 가장 흥미를 끄는 제목부터 골라 읽어도 좋은 단절된 에피소드의 모음집이다. 아무리 벽돌같이 두껍고 분량이 방대하더라도, 인간의 끈적한 본성을 자극하는 범죄와 스릴러라는 훌륭한 테마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 책을 펼친 순간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깊이 빠져들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범죄와 살인사건의 냄새는 독자들에게 항상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이 책은 거대한 분량의 사료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식민지 시대 민초들의 지난한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진 기막힌 범죄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 


사기꾼, 억울한 피해자, 탐욕에 눈이 먼 자, 협잡꾼들이 100년 전 식민지 치하의 경성 거리에도 득실거렸다. 그들의 모습이나 범죄 수법이 현대의 잣대로 보면 다소 촌스럽고 무식해 보일지 몰라도, 당대에는 나름대로 범죄의 최첨단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첨단 과학 수사나 여러 합리적인 제도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고, 언론마저 제한된 상황은  사람들의 입소문이 증거가 되고 재판 하나에 10년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는 답답한 상황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유구한 범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지금의 범죄 생태계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에 묘한 위협도 느끼게 된다.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만만치 않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한 부호를 둘러싼 치열한 재산 암투 사건만 봐도 그렇다.

인간의 사리사욕을 위해 타인의 인생을 짓밟고 완전히 망쳐버리는 걸 아무렇지 않게 서슴없이 자행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탐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악랄한 자들이 끈질긴 재판을 통해 자신들이 얻은 부당한 부의 축적을 합리화하려 했던 뻔뻔함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시대적 아픔과 맞물려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 경찰이 모든 사법 체계를 쥐락펴락하던 시절, 한 나라의 백성들이 주권은 물론 사소한 법적 판단의 주체마저 침략국의 위선자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기고 조종당해야 했던 서글픈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 중 하나는 쥐약을 이용한 '미녀 살인범' 에피소드다. 돈에 팔려 시집온 너무나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영 부실하고 무능한 남편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신혼인데도 불구하고 독살에 이른 사건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범행의 끔찍함 그 자체가 아니라, 대중들의 맹목적인 반응이다. 당시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녀의 빼어난 미모를 이유로 동정 여론을 형성하며 쉴드를 쳤고, 이 평범한 촌극은 조선을 뒤흔든 거대한 사회 현상으로 비화된다. 

인터넷에 떠돌던 미녀 범죄자 사건과 오버랩되며 사람들의 호들갑은 100년이 훌쩍 넘었어도 별차이 없음에 헛웃음이 나온다.


식민지 시대 젊은 여성들의 범죄 비율은 요즘에 비하면 극히 적었지만, 억눌린 사회적 통념을 깨고 범죄라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 보여주는 그 극악함은 꽤나 충격적이다. 남성 위주였던 범죄 현장이 현대로 넘어오며 여성의 비율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작금의 트렌드를 우리는 과연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저 부정적인 흉포화로 봐야 할지 복잡한 질문을 던져준다.




반면 실소가 멈추지 않는 황당한 사건도 있다. 조선은행을 털었던 은행 강도 에피소드가 그렇다. 명색이 중앙은행 지점인데 보안 수준은 동네 구멍가게만도 못하다. 최신식 금고라도 시간이 흐르면 퇴물이 되어버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범인이 무려 여섯 차례나 금고를 들락날락하며 돈을 훔쳤는데도 은행 측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거액을 들인 현대의 거대 은행 전산망이나 중앙 서버가 해커들에게 소리 소문 없이 뚫리는 작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재밌는 건, 이 간 큰 은행 강도가 빠르게 검거된 결정적 계기가 화려한 수사망 때문이 아니라,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참다못한 지인의 고발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평상시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웃픈 블랙 코미디다.


또한,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실시간으로 전송할 방법이 없어 기차 편으로 실물 배송해야 했던 시절, 찻간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기사의 수명이 다 죽어버렸다고 불평하는 대목에서는 지금의 실시간 디지털 시대와 묘하게 겹쳐지며 신선한 웃음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한 범죄 오락물로 가볍게 소비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이면에 깔린 식민지의 비극 때문이다. 한 해 동안 조선에서 채굴된 금 16톤 중 무려 10톤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통계는 극심한 국부 유출의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책을 읽는 내내 기괴한 범죄 내용만큼이나 흥미와 분노를 동시에 자아냈다. 모든 의사 결정과 법적 판단, 그리고 부의 흐름까지 침략자의 손아귀에 장악당한 채 힘없는 자들은 일본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대.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책 곳곳에 등장하는 독립투사들의 굳건한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절로 숙연해진다.


어떻게 이런 낡은 자료들을 일일이 찾아서 시대를 반영하고 엮어 내셨는지 작가의 노고가 문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귀중한 책이다. 억울한 사람, 괘씸한 사람,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이 엮어낸 이 두꺼운 식민지 조선의 기록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기담을 넘어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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