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 중독 - 남을 기쁘게 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헤일리 머기 지음, 정지현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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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 중독 : 그래, 착하다고 칭찬 받는 건 네가 호구라는 뜻이지.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싫어.”, “안돼.”.

누군가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두 단어를 쉽게 내뱉지 못하는 사람, 좋은 말로 ‘착한 사람’, 실제적으로 ‘호구’의 금기어다. 이를 피플 플리징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주장은 피플 플리징이 단순히 개인의 유약한 성격이나 우유부단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파고든다. 집단생활로 생존을 유지하던 인류의 과거에는 신체적·정서적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현재의 삶에서는 관계와 건강, 자존감을 해치는 적응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이 관점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 

나 역시 피플 플리저라는 말을 들으면 예전에는 그저 지나치게 착한 사람, 거절을 못 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보니 그것은 한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몸에 밴 생존 기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더 선명하게 읽힌다. 위계가 분명하고, 조직 안에서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 무난한 사람으로 취급되며, 윗사람의 기분과 분위기를 먼저 살피는 것이 오랫동안 미덕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면 튀는 사람처럼 보이고,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굴면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문화에서는, 남에게 맞추는 능력이 곧 사회생활의 기술이 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 피플 플리징은 개인적인 결함이라기보다 집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행동양식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그 점을 무시하지 않고, 왜 우리가 이런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면서도 이제는 그 방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차분히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피플 플리저에게는 이 질문이 의외로 가장 어렵다. 오랫동안 타인의 기대와 요구를 먼저 읽어내는 데는 익숙해져 있으면서, 정작 자기 욕구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찾으려는 노력도 안했다.

이에 저자는 원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가치부터 찾으라고 제안하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방향과 태도를 먼저 붙잡으라고 설명한다.

단순히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해 보자.라고 다그치는 건 아니다. 사실 그런 질문은 겉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자기감각이 흐려진 사람에게는 아주 추상적이고 막막한 주문이다.

저자는 그래서 가치 목록과 질문지를 통해 내가 존중하는 삶의 태도, 반복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주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활동, 분노를 느끼는 장면 등을 보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욕구를 직접 말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어떤 방향의 삶을 원하는 사람인지는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평소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차분히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것과 그냥 남들도 좋아하니 나도 원한다고 믿었던 것, 혹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습관적으로 갈망해 왔던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남의 시선 속에서 필요하다고 여긴 것들도 있었고, 정작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은데 괜히 붙들고 있었던 욕구도 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관심을 조금 내려놓게 된 점을 변화의 시작이라 봐도 좋을 듯하다.

책은 주문한다, 자기를 버리는 착함을 멈추자.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배려가 언제나 나를 지워 가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친절이 아니라 자기소외이다.


많은 사람이 경계라는 말을 들으면 차갑게 선을 긋는 것, 관계를 끊는 것, 혹은 갑자기 냉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책은 경계를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경계는 상대를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않을 것,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내가 응할 수 있는 것과 응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명확하게 아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 없는 관계의 정리이다. 요구사항에 경계를 두는 작업이 “착한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피플 플리저는 흔히 갈등을 피하기 위해 지금 당장의 평화를 택하지만 결국 더 큰 피로와 분노를 축적하게 된다.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만 누적시키는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한 소심함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즉각적 평온을 자기 욕구보다 더 우선시한 결과이다. 

나의 경우에도 꽤 닮아 있었다. 누군가 어떤 부탁을 하면 일단은 “그렇게 하자”라고 말해 놓고, 정작 돌아서서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쌓고 지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겉으로는 충돌을 피한 것 같지만, 실은 내 감정이 계속 누적되면서 관계 전체가 더 무거워지는 방식이었다. 책은 바로 이런 패턴이 장기적으로는 분노와 피로, 수동적인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 말이 꽤 아프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기대, 실망, 감정, 불편함을 너무 쉽게 자기 책임으로 끌어안는 경향을 버려야한다. 내가 정중하게 한계를 말했는데 상대가 서운해한다면, 그 서운함은 상대가 다룰 몫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쉽지 않지만 나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기꺼이 경계를 그려야 한다.

경계를 세우는 일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나를 먼저 챙기기 시작하면 당장은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기 욕구를 무시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 결과 자신을 돌보는 행동조차 죄책감과 함께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그런 죄책감을 무조건 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연민으로 전환하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불편한지, 왜 거절하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지, 왜 한계를 말하고도 스스로를 탓하는지 먼저 이해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다. 자기비난은 사람을 더 움츠러들게 하지만, 자기연민은 적어도 지금의 나를 조금은 덜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느꼈다. 우리는 생산적이어야 하고, 유능해야 하고, 늘 괜찮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산다. 그러다 보니 지치거나 힘든 순간에도 “이 정도는 다들 하지 않나”, “내가 더 참으면 되지”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런데 책은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 욕구를 무시하는 방식으로는 결국 오래 버틸 수 없다고 말한다. 회복은 단순히 싫은 것을 거절하는 능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안에서 사라져 버린 감각, 기쁨, 여유, 자기존중, 놀이와 쉼의 감각을 다시 되찾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늘 유용하고 생산적이고 필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쉬는 시간조차 뭔가를 해내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시간은 마치 낭비인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무목적의 시간, 빈둥거림, 여유, 놀이가 회복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피플 플리저는 늘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로 존재 가치를 확인해 왔기 때문에, 아무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일상 속에서 너무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나를 다시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꼭 대단한 취미나 특별한 휴식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하루 중 10분이나 15분 정도라도 잠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해 보고, 지금 내 몸이 어디에서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 보고, 손에 닿는 감촉이나 현재의 공기를 의식적으로 느껴 보는 것 - “현재”를 느껴보는 행위 - 만으로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자질은 또 다른 자원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울림이 있었다. 예민함은 관찰력이 될 수 있고, 망설임은 신중함이 될 수 있으며, 쓸쓸함은 자기 자신에게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을 열어 줄 수 있고, 분노는 자기 보호의 신호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람은 흔히 자기 안의 결함만 먼저 본다. 나도 그렇다. 우유부단함, 예민함, 지나친 배려, 쉽게 지치는 성향을 단점으로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무조건 없애야 할 고장 난 부품처럼 보지 않고, 방향을 잘 읽으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자질로 보게 한다. 이 시선의 전환이 생각보다 크다. 자존감이라는 것도 대단한 자기확신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질을 전부 결함으로만 보지 않을 때 조금씩 회복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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