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 승자의 기록에 가려진 약소국의 피,눈물, 그리고 오늘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휘발유 가격이 2천원 턱까지 차올랐다.

설마했던 전쟁의 후폭풍은 머나먼 한반도의 동네 주유소까지 충격파를 가한다.

자국민 3만명을 살상한 독재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처벌은 누구나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바라지만,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까지 감내하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일으키는 전쟁에 마냥 응원을 보낼 수는 없다.

약소국의 설움은 과거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전 지구적 규모의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약소국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근대적인 무기와 군인들의 사기에 의존하여 피를 흘리는 것뿐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그랬고, 허약한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강력한 미국의 무기체계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이란의 모습이 그렇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음을 떠나, 약소국이 강대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어떤 비극적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냉혹한 현실이다.

역사의 기록은 결국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서 우리가 보았던 강대국 간의 치열한 전투 이면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들의 피 말리는 생존 투쟁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강대국 중심의 역사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졌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책 “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는 바로 그 잊혀져간 약소국들의 핏빛 생존기를 먼지를 털어내고 책으로 초대한다.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그저 못사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 에티오피아의 비극은 약소국의 씁쓸한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유일한 독립국이자 아프리카의 명예를 한 몸에 짊어진 국가였으나, 무솔리니의 야욕에 사로 잡힌 침탈 앞에서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그때보다 낫지만, 당시 국제연맹의 제재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침탈하듯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막아설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 두 나라의 전쟁을 수수방관하기로 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라는 거대한 미치광이를 견제하고 달래는 데 급급한 유화 정책을 펼쳤을 뿐이고, 미국은 먼로주의를 내세워 대륙 밖의 비극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방관이 자신들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결과로 다가올줄 몰랐다.

결국 에티오피아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으나, 그들이 가진 무기는 50년 넘은 구식 소총과 전근대적인 무기, 그리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욕뿐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폭격기를 상대로 대공포 하나 없이 소총을 쏴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전쟁 초기 에티오피아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이탈리아군이 내세운 무기체계의 허접함이다. 책을 읽어보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군이 주력으로 사용한 '탱켓'이라는 소형 트랙터 수준의 얇은 장갑차와 기관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엉성한 실력을 가지고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겠다고 덤벼들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와 그 이후에도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게 비웃음을 살 만도 하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군 역시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20세기 현대전의 한복판 에서 그들은 "야간 전투는 피한다", "상관을 죽이면 전쟁은 끝난 것으로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낡은 전통과 풍습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는 역부족이었지만 개전 초기 스스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기회마저 전략 부재와 무모함으로 날려버린 셈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허접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에티오피아는 독립국으로서의 오랜 명맥과 아프리카의 희망이 꺾인 채 침몰했다. 한 번 주권을 빼앗긴 국가는 민주주의와 경제 등 모든 사회적 기반이 붕괴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뼈아픈 후유증을 앓는다. 에티오피아가 오늘날까지도 가난과 분쟁 속에서 신음하는 이유다. 한국전쟁 당시 낯선 이국땅에 유엔군으로 참전해 피를 흘려주었던 그들의 미약한 부활과 험난한 역사를 떠올려보면, 같은 약소국의 설움을 겪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에티오피아의 사례는 유럽 한복판에서도 비슷한 사례로 나타난다. 

유럽 한복판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베네룩스 3국이 바로 그들이다. 에티오피아가 '국제사회의 도덕적 개입'을 순진하게 믿었다면, 베네룩스 3국은 '국제법상의 중립 선언'이라는 종잇조각을 맹신했다.

과거 전 세계의 바다를 호령했던 부국 네덜란드는 막대한 부를 쌓았음에도 이를 국방력으로 환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자신들이 중립을 외치면 독일이 알아서 피해 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환상에 빠져 연합군과의 군사 공조를 철저히 거부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독일 공수부대와 기갑사단 앞에 네덜란드의 중립 선언은 5일 만에 찢겨 나갔고,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으며 국민들은 52개월간 나치의 노예로 전락했다. 힘이 거세된 평화주의와 외교적 호소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반면교사다.



이념과 명분을 고집하다 파멸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 저자가 책에서 좋은 사례라고 언급하는 핀란드는 약소국 생존의 또 다른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에 맞서 경이로운 항전을 펼쳤으나, 살아남기 위해 결국 서구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과 손을 잡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을 택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의 뒤통수를 치며 자신들이 내주었던 영토에서 내쫓았다. 저자는 핀란드의 이러한 행보를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국가 멸망을 막기 위해 이념마저 헌신짝처럼 버린 눈물겨운 애국심과 극강의 실용주의로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핀란드의 항전은 단순히 방어적 생존을 넘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하고 소련의 영토까지 탐낸 '대핀란드주의'라는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이 섞여 있다는 사실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한다. 오스트리아 역시 자발적으로 히틀러를 환영하고 전범 행위에 깊이 가담했음에도, 냉전이라는 틈새를 영악하게 파고들어 전후 우리는 첫 번째 피해자'는 프레임을 씌우고 책임을 회피했다. 생존을 위해 역사를 윤색하고 전범의 꼬리표를 잘라낸 이들의 행동을 단지 훌륭한 실용 외교로만 포장하기에는, 그들이 외면한 역사적 진실과 도덕적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이 부분이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책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네덜란드, 핀란드의 궤적을 찬찬히 넘겨보다, 결국 그 모든 역사는 100여 년 전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었던 조선의 비극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조선의 멸망 과정은 이 세 국가의 치명적인 과오를 모두 합쳐놓은 종합 선물 세트였다.

조선은 에티오피아처럼 강대국의 선의와 도덕적 동정에 기댄 외교적 호소에만 매달렸고, 네덜란드처럼 국방력이 철저히 붕괴된 상태에서 서류상의 전시 중립 선언으로 나라를 보전하려는 헛된 꿈을 꾸었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일본은 이탈리아의 허접한 탱크와는 차원이 다른, 철저히 시스템화된 무기와 군사체계를 가진, 무려 항공모함만 25대 이상 운영한 근대 군사 강국이었다. 조선의 힘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겠는가?

무엇보다 조선에는 핀란드와 같은 처절한 내부 결속과 무장 저항의 실체가 없었다. 일본이라는 외세가 총을 겨누기 전에, 이미 조선은 수십 년간의 내부 권력 투쟁과 민생 파탄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국가적 전면전도 치러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국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스스로 피를 흘려 지켜낼 힘과 통합된 의지가 없는 국가는, 결국 열강들의 회담 테이블 위에서 냅킨 조각에 선이 그어지며 분할되거나 삼켜진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엔이 창설되었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면 모두가 파멸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약소국들에게도 번영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 정세가 증명하듯, 국제법의 얇은 껍질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속에는 여전히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야생의 정글이 도사리고 있다. 


강대국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승자의 역사 뒤안길에서 피 흘리며 스러져간 이 약소국들의 처절한 기록은, 여전히 지정학적 단층대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경고로 다가온다.


두툼한 책을 읽어가며 저자가 써놓은 방대한 지식과 식견에 놀라고, 중간 지루할 때 쯤 등장하는 지도나 당시의 희귀한 사진들에 흥미가 배가 된다. 전쟁사, 특히 2차 세계대전사를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 그동안 어렴풋이 들어왔던 유럽과 아프리카의  “그 외” 나라들에게 전쟁이 얼마나 가혹한 현장이었던가 다시 한번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멋진 도서가 출판될 수 있어 역사 애호가로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