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러가 살아남는다 - 발견, 비즈니스 현장에서 깨달은 이야기의 힘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회의실 불이 꺼지고 첫 슬라이드가 뜨는 순간, 나는 늘 긴장했다.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한 상품 설명이라도 청중의 눈빛이 흐려지는 순간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원들이 판매하게 될 보험 상품에 대한 상품설명 PT를 준비하면서 전혀 다른 시도를 했다. 상품의 스펙과 수치를 나열하는 대신,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갓 태어난 딸의 작은 손을 잡은 사진과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모로서의 책임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딸이 첫 걸음마를 배우다 넘어진 순간의 사진, 응급실에 갔던 일화, 그리고 그때 느꼈던 무력감. 이런 개인적 경험들 사이사이에 보험 상품의 핵심 담보와 혜택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청중들의 눈빛이 살아있었고, PT가 끝난 후 "제 이야기 같았어요"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 느꼈다. '이야기'에는 데이터와 논리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항상 궁금했지만 막상 책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적었던 것 같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스티브 잡스가 맥OS 체계를 바꾸기 위해 OS9의 장례식을 치른 일화를 소개한다. 단순히 "새 운영체제로 전환합니다"라고 발표하는 대신, 관 속에 OS9을 담고 추도사를 낭독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잡스 답다!
이 극적인 스토리텔링은 직원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논리가 아닌 감정으로 각인시켰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우리나라에도 휴대폰 수만대를 불살라버린 전설의 퍼포먼스가 있지 않았던가!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 우리는 넘쳐나는 데이터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이메일,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이 쏟아진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기억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명확하게 답한다. 스토리텔링!
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스토리 형식으로 전달된 정보는 그렇지 않은 정보보다 기억될 확률이 20배 높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뇌과학적 근거가 있다.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뇌의 여러 부분이 활성화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뇌활동이 일치하는 현상까지 관찰된다. 스토리는 인간의 본능적 소통 방식이며, 신화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장 강력한 설득의 도구다.

책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설계법은 'SUPERB’ 이라는 6단계로 구성된다. 신화시대부터 인간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야기 구조를 비즈니스 언어로 재해석했다.
S: Shared Experiences (공유경험)
SUPERB의 첫 단계이자 가장 강력한 도구는 '공유경험'이다. 청중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내가 딸아이 이야기로 PT를 시작했을 때 효과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가 다쳤을 때의 당황스러움, 무력감,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경험한다. 이 공유경험은 청중과 나를 즉시 연결시켰다.
저자는 공유경험 하나만 제대로 활용해도 스토리텔링의 절반은 성공한다고 강조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도 대부분 이 공유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보편적 감정, 공통된 고민, 누구나 겪는 일상의 순간들 - 이것이 스토리의 시작점이다.
U: Ultimate Triumph (최종혜택)
두 번째 단계는 최종혜택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많은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결론을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사족이 길다"는 말이 바로 이를 지적한다.
여행자보험 콘텐츠를 만들 때 나는 이 원칙을 적용했다. 기존의 보험 안내는 "보험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 장황한 설명을 거쳐 마지막에 혜택을 나열했다. 하지만 나는 대화식 스토리 구조로 바꾸면서 처음부터 명확히 했다. "해외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으면 3천만원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험 하나면 전액 보장됩니다." 결론부터 제시하고, 그 다음에 디테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콘텐츠 체류시간이 3배 증가했고, 전환율도 크게 올랐다.
P: Problem Definition (문제정의)
세 번째는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스토리에는 해결해야 할 갈등과 문제가 있다. 비즈니스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청중이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를 선명하게 그려내야 한다.
자동차보험 과실비율 콘텐츠를 만들 때, 나는 법률 용어와 복잡한 규정을 나열하는 대신 스토리로 접근했다. "퇴근길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A씨의 차에 B씨가 뒤에서 추돌했습니다. 명백히 B씨 과실인데, 보험사는 A씨에게도 10%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으로 문제를 정의하니, 추상적이던 과실비율 개념이 생생한 현실 문제가 되었다.
E: Explore Options and Objections (대안 및 반대 의견 탐색)
네 번째 단계는 옵션에 해당하지만 상황에 따라 매우 효과적이다. 청중의 잠재적 의구심과 대안을 미리 다루는 것이다. "이런 방법도 있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선제적으로 답하면 신뢰가 쌓인다.
보험 교육에서 나는 은행원들에게 "보험 대신 저축을 하면 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토리로 답했다. "제 동료는 5년간 매달 50만원씩 저축했습니다. 3천만원이 모였죠. 그런데 6년째 되던 해, 큰 수술을 받았고 비용이 5천만원이었습니다. 3천만원으로는 부족했죠." 대안을 제시하되, 그 한계를 스토리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R: Real (현실제시)
다섯 번째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장미빛 미래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방치했을 때의 구체적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이 행동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B: Best of Both Worlds (두 종류의 청중 모두 만족시키기)
마지막은 서로 다른 니즈를 가진 청중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다. PT 현장에는 감성적 접근을 선호하는 사람과 데이터와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공존한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양쪽 모두를 포용한다.
내가 진행했던 PT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 있다. 아기 사진과 감성적 에피소드로 시작했지만, 중간중간 명확한 수치와 데이터를 삽입했다. "출생 후 1년 이내 응급실 방문률 68%", "영유아 의료비 연평균 120만원" 같은 구체적 정보가 감성을 뒷받침했다. 스토리는 감성을 건드리고, 데이터는 이성을 설득한다.
저자는 SUPERB의 모든 단계가 필수는 아니지만, S(공유경험)와 U(최종혜택)만은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해도 스토리텔링의 기본 골격은 완성된다
AUTHOR 기법이라는 프레임워크도 인상적이다. 이는 전문 작가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식을 비즈니스에 적용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R은 'Rewrite', 즉 다시쓰기를 의미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깊이 공감했다. 자동차보험 과실비율 콘텐츠는 처음 버전과 최종 버전이 완전히 달랐다. 초고는 법률 조문과 판례를 중심으로 작성했다. 하지만 몇 차례 퇴고를 거치며 법률 용어를 모두 빼고 일상 언어로 바꿨다. "피해자", "가해자" 대신 "A씨", "B씨"라는 구체적 인물을 등장시켰다. 복잡한 과실비율 산정 방식은 "신호위반 50점, 중앙선 침범 30점, 속도위반 20점" 같은 점수 시스템으로 단순화했다.
저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글쓰기 시작 단계에서는 아날로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디지털 도구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소개한다. 나 역시 중요한 PT를 준비할 때는 노트에 손으로 스토리 구조를 스케치한다. 키보드로 타이핑할 때보다 생각의 흐름이 자유롭고, 전체 그림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
책을 읽어가며 제일 유용했던 부분은 스토리 수집 방법이다. 좋은 스토리텔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일상에서 스토리를 포착하는 능력이다.
작은 이야기들이 쌓여서 거대한 스토리 라이브러리가 된다. 새로운 PT나 콘텐츠를 준비할 때, 이 라이브러리에서 가장 적합한 스토리를 꺼내 쓴다.
저자가 강조하듯, "누구나 기회만 주어진다면 흥미로워할 이야기를 갖고 있다". 훌륭한 스토리텔러는 타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사람이다.
스토리는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소통 방식이다. 우리는 태초부터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을 전달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공동체를 형성해왔다. 데이터와 논리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다
비즈니스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에 끌리고, 이야기로 연결되고, 이야기로 설득된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