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석산의 서양 철학사 - 더 크고 온전한 지혜를 향한 철학의 모든 길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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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의 서양 철학사 : 철학의 경계를 거닐다





*도서를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철학은 늘 경계 위에서 흔들린다. 이성과 믿음, 과학과 신비, 제도와 일상 사이에서 타협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걸어왔다. 『탁석산의 서양 철학사』는 그 흔들림의 역사를 전통적 교과서처럼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진동의 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 철학을 다시 살아 있는 사유의 현장으로 데려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낀 것은, 철학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 낮아진 문턱 너머로 펼쳐진 세계가 이전보다 훨씬 넓고 깊어졌다는 놀라움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부분은 철학의 개념과 논쟁을 과도한 전문어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일상어의 고유한 탄력을 믿고, 비슷한 비유와 구체적 사례로 독자의 눈높이를 조절했다. 물론 핵심 논증을 생략하지 않는다. 


고대 자연철학에서 근대의 합리·경험주의, 독일 관념론, 분석철학, 실존주의, 해석학,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일정한 리듬으로 전개한다. 각 장은 짧고 선명해, 긴 여정을 과부하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나면, 단편들의 나열이 아니라 서사의 호흡이 남는다.


철학은 삶에서 떨어져 혼자 자라지 않는다. 시대정신, 과학, 종교, 예술, 심지어 비합리의 세계가 사유를 길러왔다. 책은 이 맥락을 적극적으로 보여 주며, 이미지·도판 같은 시각적 장치로 독해의 손잡이를 만들어 준다. 텍스트의 밀도와 이미지의 여백이 번갈아 호흡을 맞춘다.


가장 신선한 지점은 오컬트, 연금술, 점성술 등 비합리의 역사가 철학사 외부에 존재하는 무시해야하느누흑역사가 아니라, 근대 이성의 탄생을 준비한 한 갈래의 토양이었다는 관점이다. 계몽의 광휘가 비합리의 어둠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연료로 스스로를 밝힌 측면이 있었다는 제안. 이 균형 감각이 책 전체를 놀라운 시선으로 읽어나갈 수 있게 해준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투박한 물음에서 철학은 출발했다. 자연철학자들의 답변은 원소와 질료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은 설명 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신념 선언이었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념을 형상과 목적이라는 더 정교한 언어로 다듬는다.


신학과 철학은 충돌이 아니라 공진화의 관계였다. 신의 도성에서 인간의 도시로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던 시간, 르네상스는 인간을 주제로 삼는 법을 배웠다. 미술과 과학, 인문주의가 사유의 모양을 바꾼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부터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까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태도가 시대를 관통한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은 인식의 기반을 닦고, 헤겔은 역사의 운동을 정신의 드라마로 재구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푸코의 권력-지식,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 페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의 개입까지. 철학은 더 이상 높은 담 너머에서 말하지 않는다. 일상, 몸, 차이, 주변부가 철학의 문장을 바꿔 놓는다.



문장은 과도하게 미끈하지도, 일부러 난삽하지도 않다. 설명과 비유, 정리와 질문이 번갈아 나와, 독자가 멈춰 생각할 틈을 남긴다. 각 장의 길이는 잠깐의 독서에도 리듬을 주며, 주말 몰아읽기보다 평일의 짧은 호흡으로도 충분히 전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독자를 신뢰한다는 인상이 크다. 이해를 돕되,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안내하되,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책의 두툼한 두께에도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어느새 질문이 한 문장 남는다. 이성은 무엇으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저자난 그 물음에 단 하나의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더 먼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이해라는 작은 조명으로 비춘다. 그리고 그 조명으로 충분하다고, 이 책은 조용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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