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나이토 히로후미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 와인 잔에 담긴 인류 문명의 대서사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일본의 역사 작가 나이토 히로후미가 저술한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는 유럽의 식탁을 지배했던 와인을 통해 바라본 인류 문명사의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현재 역사, 지리, 세계사, 문화 분야에 특화된 전문 기고가로 활동하며 “제대로 이해하는 영국의 역사”, “처음 읽는 감염병의 세계사” 등 역사를 색다른 시점에서 조망하는 책을 집필해왔다. 이번에는 와인이 어떻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와인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와인은 고대 문명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과 함께해온 '신의 음료' 또는 ‘신의 물방울’이러는 찬사를 받으며, 때로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고, 때로는 경제적 동력으로, 때로는 사회 변혁의 촉매제로 작용해왔다.

한 잔의 와인 속에는 고대 문명의 지혜와 중세 수도사들의 헌신, 그리고 근대 상인들의 야망이 복잡하게 뒤얽혀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보르도 특권에 관한 이야기다. 12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보르도는 영국왕이 부여한 특별한 특권 덕분에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254년 영국의 헨리 3세가 부여한 이 특권은 베르쥬락 등 보르도 인근 지역에 집회권, 특별세 면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와인 수송권을 보장했다.

하지만 진정한 보르도 와인의 혁신은 네덜란드인들의 혜안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은 메독 지구의 늪지대를 간척하여 포도밭으로 변모시켰고, 이는 훗날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같은 전설적인 와인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단순히 땅을 개간한 것이 아니라, 보르도 와인이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떼루아(terroir)'를 창조해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르도 와인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깊고 복합적인 맛이다. 생선류의 와인 안주과 페어링 되는 경우가 많아 화이트 와인을 선호하는 나지만, 때로는 보르도의 묵직한 레드 와인 한 잔이 주는 여운을 만끽하기도 한다. 대형마트 와인 코너에서 시음할 때 만난 저렴한 보르도 와인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는데, 이제 그 와인 한 잔에 담긴 수백 년의 역사를 알게 되니 더욱 의미 깊게 느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의 이야기를 통해 신대륙이 어떻게 구대륙의 와인 패권에 도전했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18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미사 용 와인을 위해 처음 포도를 심은 것에서 시작된 캘리포니아 와인은, 19세기 골드러시와 함께 본격적인 발전을 이뤘다.

특히 1861년 헝가리 출신의 오고스톤 하라즈시가 유럽에서 포도묘목 10만 주를 가져와 캘리포니아에 심은 것은 미국 와인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1831년 장 루이 비뉴가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을 가져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와인을 생산한 것이 캘리포니아 최초의 유럽종 포도 와인이었다.

하지만, 1920년 금주법의 시행은 캘리포니아 와인업계에 치명타를 가했다. 700여 개가 넘던 와이너리는 금주법 철폐 후 겨우 140여 개만 남았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UC 데이비스와 프레스노 주립대학의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와인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1976년의 파리의 심판이었다. 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캘리포니아의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와 스태그스 립 셀러스 카베르네 소비뇽이 각각 화이트와 레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프랑스 와인 우위의 신화를 깨뜨렸다. 이는 미국 와인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토카이 와인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 중 하나다. 헝가리 북동부의 작은 마을 토카이에서 생산되는 이 달콤한 와인은 '왕들의 와인이며 와인의 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와인의 왕이자, 왕의 와인"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토카이 와인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1650년 라코치 가문과 연결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헝가리 독립을 위해 싸웠던 라코치 가문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토카이 와인을 외교적 선물로 활용했다. 이때 토카이 와인은 단순한 특산품이 아니라 헝가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전쟁 수행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토카이 와인의 독특함은 '귀부병'에 있다. 보트리티스 시네리아라는 곰팡이가 포도에 감염되어 수분을 빼앗아 가면서 당도와 향이 극도로 농축된 포도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카이 아수는 푸토뇨시라는 등급으로 분류되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더 달콤하다.

흥미롭게도 18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토카이 와인의 최고급인 에센시아에 '임페리얼 토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토카이 와인을 선물받고 "이 와인을 만든 땅에 축복이, 이 와인을 보낸 여인에게 축복이"라고 감탄했다. 책에서 알게 된 제품 중 가장 맛보고 싶은 No.1으로 표시해놓았다. 시중에 2~3만원대 부터 100만원이 훌쩍 넘는 리스트가 보이는데 동네 새로 생긴 전문점에 한 번 기웃거려봐야겠다.


독일 와인을 세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린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이야기는 정치와 와인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를 주도하며 유럽 질서를 재편한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1816년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부터 라인강 유역의 요하니스베르크 성을 하사받았다. 이곳은 1775년 세계 최초로 슈파트레제(늦수확) 와인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장소였다. 당시 풀다의 주교가 수확 명령을 내렸는데 전령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포도에 귀부병이 생겼고, 이를 양조한 결과 놀라운 품질의 와인이 탄생했다.

메테르니히는 단순히 와인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직접 포도재배에 참여했고, 셀러마스터에게 스파클링 와인 양조법을 조언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의 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1851년에는 프러시아의 재상 비스마르크를 초대하여 이곳에서 회담을 갖기도 했다.

메테르니히가 받은 조건은 매년 수확의 1/10을 합스부르크 왕실에 바치는 것이었는데, 이 계약은 현재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이는 와인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유산임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와인 경험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와인은 맥주 대신 적당한 안주가 있을 때 마시는 것으로, 다른 주류에 비해 하루 한 잔 정도는 오히려 건강에 특히 심장병에 좋다고 알고 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단 한 방울의 와인도 건강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금주하는 게 아니라면 그래도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지중해식 안주들과 함께 더 건강한 선택은 아니라고 해도 덜 해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느낌일까?

술은 아무래도 안주에 따라 종류가 정해지다 보니 연어회를 즐겨 찾는 내게는 화이트 와인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대형마트 와인 행사장에서 시음하면서 마음에 들면 한두 병씩 들고 오곤 한다. 최근에 동네 주류 판매 전문점이 생겨서 몇 번 들러서 주인이 추천해준 와인을 서너 병 구입했는데, 퇴근길에 저녁에 마실 와인을 한 병 챙겨오는 발걸음도 꽤 즐거운 것 같다.

코로나 때 집술러들이 많이 늘어서 장사가 잘 된 모양인데 예전만큼은 아니라서 좀 아쉽다. 이제는 새로운 와인용 안주를 찾아보려고 한다. 맨날 크래커에 치즈 얹어먹는 것은 자제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와인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문명의 교차점에서 역사를 만들어온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은 민주정치의 기반이 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신성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원이 와인 양조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항해시대에는 와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와인의 역사는 또한 혁신과 도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샴페인의 발명, 코르크 마개의 개발, 병 저장법의 발견 등은 모두 와인의 품질을 높이고 보관 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혁신들은 와인 산업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와인을 통해 세계사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딱딱한 정치사나 경제사가 아니라 와인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통해 복잡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특히 각 장마다 등장하는 구체적인 일화들과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책은 단순히 서양사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 일본의 와인 문화 등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와인 이야기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와인이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소중한 유산임을 깨닫게 해준다. 앞으로 전문점에서 새로운 와인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안주를 찾아 페어링을 시도할 때마다 이 책에서 배운 지식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결국 와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문명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며 인류의 소중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