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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평점 :

시인 : 한국문학의 대가가 그려낸 김삿갓 시인의 알려지지 않았던 굴곡의 삶
좋은 책 고르는 법에 항상 끼는 항목이 있다.
"전집으로 책을 구매하지 말 것"
세계문학의 사례를 봐도 출판사별로 번역의 수준 차이가 나는 작품들이 있어 A 작품은 ㄱ출판사, B는 ㄴ출판사 공식이 있다.
전집의 가장 큰 폐해는 10권 세트, 100권 세트 가리지 않고 상당수의 분량이 장식용으로 낭비될 소지가 큰 것. - 원래 목적이 장식이라는 말만 하지 말아 줘. -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작가 별 전집은 그래도 용납이 된다.
첫 번째 딜레마는 빗겨 나가기 힘들지만 두 번째 문제는 오히려 자극제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전집이 아니었으면 읽지 않았을 작품을 강제로 펼치거나, 다른 간행본으로 구할 수 없는 중단편 소설 - 에세이와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
이는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라 한 두 개가 이가 빠져 있으면 기어코 빈 자리를 채워야 한다.
꼭 출판사에서 기획된 전집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작가나 음악가가 있다면 연대기처럼 한 권, 한 장씩 모아서 개인적 전집을 완성하는 묘미는 자취생 라면끊이는 맛 정도의 감칠맛이다.
당신은 나만의 연대기를 만들어갔던 애지중지 작가가 있는지?
지금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 이문열 작가가 그랬다.
이 양반에게 꽂힌 작품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제목부터 광고 카피 같은 날카롭고 매력적이며, 내용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 -중량감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다소 있으나- 유려한 필체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역시 대가의 향기가 충만했다.
이 작품을 접한 이후로 한동안 이문열 작가의 책들만 골라서 사고 열심히 읽어갔다.
어린 시절 읽기에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한자로 무장된 단어나 복문의 문장, 때로는 책의 일부분을 사상으로 점철된 토막을 밀어 넣어 책을 덮을까 고민하는 경우도 생겼지만, 우상이 된 존재감은 상당했다.
작가에게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한 작품은 "변경"이었다.
처음 1,2권은 몰입도 있게 읽어 나갔지만 3권부터 책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후 12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완간된 덕에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야기가 끝없이 늘어지고 작가 개인사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고픈 독자의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이렇게 작가와 거리가 멀어지는 시점에서 놓친 소설 하나가 "시인"이다.
흥행 면에서 다소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국내외 문단에서는 호평을 받았고, 심지어 이문열 작가 전성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평가도 다수 있다.
출간된 지 30년이 된 시점에서 새롭게 복간된 책을 앞에 들고 나이를 훌쩍 먹어버린 나 자신과 작가와의 관계를 떠올려 보니 쓴 웃음이 절로 쏟아진다.
어느 시점 이후 정치적인 색이 크게 드러나며, 개인적인 친밀감이 멀어진 부분도 있고 변경 12권 완간 이후 과거에 보여주었던 내공 가득한 작품들이 뜸해진 탓도 있다.
물론 개인적인 독서 취향이 먹고 살기 위한 경제경영 도서 - 국내에도 다양하게 소개되기 시작한 SF소설로 노선이 바뀐 영향이 더 크지만.
시인은 우리에게는 김삿갓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시인 "김병연"의 생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잘 알고 있지만 단편적인 일화 몇 개로 각인되었을 뿐, 그가 살아온 삶의 역경이나 방랑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 이유는 잘 모른다. 어쩌면 그가 내노라 하는 시인들과 겨루던 시구조차 떠올리기 힘들다.
독특한 캐릭터와 실력으로 현대에 가져다 놔도 기인으로 불릴 만하고, 능력 하나만으로 풍족하고 호화로운 인생을 즐겼을지도 모를 전설의 문인이지만,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을 따라가보니 일생을 지배한 어두움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역적의 후손으로 하루아침에 풍지박산 난 가문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평온한 가정환경이었다면 오늘날까지 명성이 자자한 그의 실력은 어떤 분야에서 빛을 발했을까 궁금하다.
삼족지멸의 화를 면했음에도 사회에서 가해지는 간접적인 압박에 시인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화자인 작가는 자신의 과거에 얽혔던 굴레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김삿갓이라는 인물에 투영하며,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부조리함을 체념과 방랑의 해결책으로 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몰락한 가문을 과거시험을 통해 복원하려는 늙은 어미의 마음은 김병연의 마음에도 오랫동안 짐이 되었다.
책을 읽는 독자들도 무모하지만 희망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노모의 한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는 심정 이해할 수 밖에.
조정은 만만치 않다.
대역죄인의 자손에게 죽음을 면하게 해준 너그러움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김병연이 체감하는 이상의 대역죄인인 큰아버지(할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냉엄한 현실이었고, 설령 시간이 흘러 면죄부가 확실하게 주어졌던들 매관매직 시대에 가난뱅이 선비에게 주어진 벼슬은 없었다.
능력보다 배경이 더 중요했던 조선 후기의 어지러운 시대상이 요즘 빈부차가 갈수록 커짐에 따라 부의 대물림이 세습화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오늘과 닮아보이는 착각이 든다.
오랜만에 읽어가는 문장은 역시 작가 특유의 미학이 묻어난다.
사전을 뒤져봐도 네이버에는 검색되지 않는 생소한 한자단어들이 중간에 툭 튀는 경우도 있지만, 문맥상 큰 어려움은 없었고, 문장이 이어져서 스토리가 되어가는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몰입도가 높았다.
확실히 2020년대에 출판되는 소설과는 호흡과 향기가 다르지만, 대가다운 면모가 페이지 곳곳에 묻어난다.
이 책은 왜 이 시기에 복간되었을까?
오래 전 이문열이라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추억을 가진 중장년층에게는 커다란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있는 문학적 감동을 다시 찾아내는 반가움.
한 번도 접할 기회가 없던 청년들에게는 한국 문학의 굵은 획을 그었던 작가의 예술적 울림을 공유하는 기회.
세대 간의 멋진 만남이 책 한 권을 통해 실현되는 기대되는 행로가 시작되는 궤적이 되길 희망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