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 감독이 참여한 첫 공식 도서 - 첫 작품부터 현재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와 비밀
톰 숀 지음, 윤철희 옮김, 조 퍼글리스 사진, 전종혁 감수, 크리스토퍼 놀란 대담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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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의 방대한 코멘터리와 만나다
 
빨간 이동진처럼 멋들어진 영화평론가가 되었다면 좋았을까?
“영화감상이 취미예요”라고 제일 먼저 말머리를 꺼내던 시절.
한 편에 천 원짜리 비디오대여점이 생겼다는 소식에 구름 같은 사람이 몰리던 아주 오래전 이야기.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아직도 쌩쌩 돌아가서 4K 플레이어는 언제 살 수 있을까 블랙 프라이데이를 기다리던 작년.
 
평균보다 한 다섯 배 정도는 영화를 더 봤을까?
지금까지 수 백장 모아온 블루레이 디스크가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세계에 주저앉아 너는 헛돈을 쓴 거야 자괴감이 문득 들지만,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나 스탠리 큐브릭 컬렉션, 007 전집 같은 디스크가 주는 만족감이 아직까지는 자존심을 살려준다.
 
언제부터 인가 영화 사 모으는데 돈을 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압박으로 예스24 플래티넘 등급이 일반으로 떨어졌지만, 결국 구매하게 된 최근의 블루레이 타이틀은 "테넷 TENET".
다른 영화는 포기하더라도 이 감독의 영화는 어쩔 수가 없다.
지난번 작품이었던 " 덩케르크 "는 기대했던 서사와 방향성이 달라 한 번 감상하고 먼지가 조용히 쌓이고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놀란 감독의 디스크들은 한 해 두세 번씩은 만나게 된다.
이제 감독을 책을 만난다는 즐거움과 대면했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무게는 그의 역량과 현재 영화산업에서의 위치를 가늠케 해준다.
책은 언제나 영상에서 보여주는 스토리를 넘어선 확장성과 디테일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현란한 스토리에 빠져드는 상황이 감독이 원했던 관객의 조건이라면, 책을 읽는 독자는 예리한 눈빛으로 그간 필름에서 놓쳤던 장면들의 의미와 작가의 숨어있는 표현까지 찾아 이해하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을 작업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책에 숨겨진 이면의 스토리는 새로운 지식과 감독이 의도했던 대단했던 영화의 이상을 만나게 되는 설레는 흥분 그 이상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연대기로 훑어가며 영화의 컨셉을 잡는 상황이나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다양한 선배 감독들의 작품들, 그리고 영화제작을 위한 로케이션과 배우와의 만남 등의 다채로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배트맨 비긴즈”는 삼부작 중에서 가장 손이 덜 가는 작품이다.
처음 보았을 때의 임팩트가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약해진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달리 성인이 되어가는 주인공이 외딴 공간에서 칩거하며 단련에 몰두한다는 설정은 시리즈를 관통하는 어두운 느낌과 동시에 성장을 위한 합리적인 과정을 여타 히어로물에 비해 잘 표현해낸다.
하워드 슈즈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큰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혼자 힘으로 19살에 신탁관리자로부터 재산 통제권을 찾아오고 본인이 하고 싶던 일을 마음껏 하는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 그가 배트맨 비긴즈는 물론 인셉션에도 차용된 인물상이라는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인 연결이다.
 


테넷을 보며 미뤄왔던 벽돌 과학책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을 오랫동안 숙성시킨 시간을 뒤로 하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 나가며 앤트 맨의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다시 한번 이론을 정리할 수 있었고 우주의 기원과 팽창하는 우주, 그리고 블랙홀에 대해 몰랐던 내용까지 머리 속에 쏙쏙 집어넣고 있다.
자연스럽게 놀란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인터스텔라"로 연결된다.
한 페이지에 요약본을 그려가며 놀란 감독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족이라는 커다란 유대가 자리를 잡고 탄탄한 천체물리학의 이론이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에서 보던 블랙홀의 생소했던 모습이 실제 촬영한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치밀한 준비와 완벽을 위한 과학적 세팅, 물론 대단한 조력자들의 모습도 감독의 역량이라고 봐야한다.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면,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를 가득 채우는 가족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자연재해로 활력을 잃어가는 지구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환경재앙을 나사 Nasa의 관료나 대통령의 연설 모습이 아닌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인터뷰 장면, 그리고 끝없이 불어 닥치는 모래폭풍과 저녁 식탁에 쌓인 먼지 덮인 접시들의 컷으로 감독은 끝없이 하루의 삶을 짓누르는 비극의 인류와 희망을 걸고 우주로 나가려는 이유를 말없이 설득한다.
마스크를 쓴 채 살아가는 2021년의 우리 모습의 또다른 상징처럼 여겨져 우울함을 가져다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면의 이야기를 다양한 인터뷰와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작품으로 빚어낸 이 책의 가치는 영화 매니아라면 누구나 공감할 정도의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완벽주의자다운 놀란 감독의 치밀한 준비과정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현재의 직업이나 삶의 현장에서 그토록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한 사람의 감독이 자신의 추구하는 영상과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삶의 태도를 스스로 견지할 것인가에 주목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모습, 오랫동안의 고민과 이상의 실현은 작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우리가 찾아야 하는 과제 아닐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근작 “테넷”은 다른 작품들 보다 꽤 늦게 서야 감상할 수 있었다.
코로나로 극장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블루레이 스틸 북은 디자인이 불만이라 패스했고, 다운로드 영화로 만나보긴 싫었다.
다른 놀란의 영화들에 비해 복잡한 구성임은 분명하다.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는 "메멘토"는 조금만 집중하고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의 흐름 속에 빠질 수 있는데 "테넷"은 조금 고민이 필요하다.
한번 보고 난 후 극중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냥 느껴봐요."
이 영화의 첫번째 감상은 느끼는 대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큰 흐름을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해석본을 찾아 공부를 좀 하고 두번째 감상하면 눈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을 되돌리는 기계인 턴스타일에서 역방향에서 먼저 들어간 사람이 순방향에서 왜 먼저 튀어나오게 되는지 같은.
스파이물의 구조적인 면을 따왔지만 본드의 본질적인 내용은 증발시켰다고 감독은 이야기한다. 심지어 영화를 제작하면서 본드 시리즈를 멀리했다는 에피소드는 독자적인 영화 만들기에 그가 얼마나 몰입했는지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자주 작업하는 작곡가인 한스 짐머가 아닌 루드비히 고란손이 스코어를 맡은 것도 영화 전반에 흐르는 다른 작품과 결이 다른 - 강렬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사운드를 위해서 아니었을까?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르지만 정작 시간여행 이야기는 처음이라는 이야기에 어, 그렇네. 라는 동감을 표시하면서도 뭔가 다른 이 영화의 매력과 메시지를 떠올려 본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원폭 이후 원죄를 얻게 된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들려오는 책 내용도 인상적이다.
"나는 이제 여러 세계의 파괴자인 죽음 (또는 시간)이 됐다."라는 힌두교경전의 문구가 두려움을 전달한다.
 
테넷 덕에 한동안 읽지 않고 꽂아만 두었던 과학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나보다 늙어버린 딸을 바라볼 때 나는 어떤 아버지의 모습일까 상상하며 조금 더 멋진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놀란의 영화가 작지만 개인의 성찰을 만들어주었다.
거장들이 처음부터 대단한 결과물을 내고 성공을 한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기존 세상과 남다른 시선과 사고를 끝없는 노력으로 창조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삶에 어떻게 투영할지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그의 작품을 기대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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