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4분 33초 : 명작은 이미 쓰여졌으나 독자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4분 33초"란 시간은 왜 제목으로 등장했을까?
책의 표지를 처음 접하며 시간이 쓰인 제목과 의미에 사로잡혀 가물가물 머리속에서 뭔가와 접목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낯익은 시간, 특히 33초로 끝나는.
첫 페이지를 넘기자 바로 등장하는 이름은 존 케이지 (John Cage). 시대를 초월했던 한 아티스트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제목에 있던 4분 33초가 생각이 번쩍 기억났다. 아주 오랜 학창시절 Progressive Rock에 빠져 살던 시절, 음악잡지에서 존 케이지라는 음악가를 알게 되었고, 위대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를 잔뜩 끌었다. 그리고, 4분 33초라는 희한한 곡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곡의 의미에 알게 되며 처음에 이게 뭐 야 했던 불신이 풀리던 기억이 난다.
머스 커밍햄의 이야기도 책에 등장. 백남준의 1984년 새벽에 방송했던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의 바로 그 전설의 무용가! (소설에는 오렌지 주스를 커밍햄 이름으로 달아 놓는 케이지가 벌이는 희대의 코미디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이기동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면 갑자기 등장하는 존 케이지. 어라 뭐 지? 연관도 없는 두 명 주인공 이야기가 번갈아 주거니 받거니 나오니 독자로서는 작가의 의도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언젠가 후반부로 가면서 어떤 연결 고리로 인해 하나로 합쳐 지리라는 패턴임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이 분야에서는 끝판 왕이었다. (사실 이 메시지는 챕터0에서 이미 선언을 했지만)
앞부분은 소년의 성장소설로 시작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은 아버지의 가출로 곤궁에 빠지지만 열심히 김밥을 마는 어머니와 어머니 형제들의 도움으로 일단 이불 덮고 잘 공간은 확보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와 가출로 고아원을 전전하게 되는 일반적인 루트를 최소한 피해갈 수 있는 보호막인 셈. 어머니의 말발이 형제들을 설득하는 마법의 힘도 작동하니 다행이었다.
공부에 도통 재질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정말 크다. 남들에게 우리 아들은 의대를 갈 거라고 자랑스러워한다. 물론 아들은 문과라는 게 문제다. (이 대목에서 정말이지 빵 터졌다.)
인연이란 무섭다.
학창실적부터 단짝인 일등이란 친구와 재수를 시작하게 딘 주인공은 노량진 학원가에서 장수생 누나와 한 팀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남들과 친하지 않아서 왕따끼리 뭉친 느낌이 드는 3명의 기괴한 조합.
남자 둘, 여자 하나. 항상 이 조합에서 생기는 한 명의 승자와 한 명의 패배자. 약간은 식상한 설정이지만 사실 은근히 이런 일들이 많으니 인정할 수 밖에. 이 조합은 둘 중 하나다 먼저 누가 고백하지만 이미 다른 한 명 이랑 썸 타는 관계, 아니면 처음 대쉬한 남자는 망하고 가만히 있던 남자가 불타올라 커플이 되는. 어떤 경우의 수가 당신에게는 그래도 좋을까? 이런 관계가 결실을 맺고 알콩달콩한 사이가 되는 건 현실이나 소설이나 보는 사람도 즐겁긴 하다. 치명적인 사랑이야기는 아니니 부담도 적고. 하지만 지속되는 입시실패 속에 서로의 관계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는 것 같다.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하게 된 주인공은 김원영이라는 동아리 여선배와 인연이 닿고 훈훈한 러브 스토리가 하나 또 등장할까 하지만 그들의 운명이 뜻대로 쉽게 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앙숙 인줄 알았지만 이기동을 리딩 하는 그녀의 속셈은 사실 이성적인 접근이라 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따라오지 않는 후배를 동화하고 싶은 뒤틀어진 욕망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나오게 되지만 남들에게 무조건적인 강요를 한다고 될 일은 아닌데 그녀는 가능하리라 본 것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하지만 학창시절의 패기만만했던 행동들의 결과로 원하는 삶에 안착하는 게 실패했지만 꿋꿋하게 살아간다. 본인이 원하는 삶은 분명 아니지만.
이기동의 아버지는 홀연히 집으로 돌아와 어느 정도 충실한 가장 역할을 잠시나마 하는듯 싶더니 역시나 또 가출하고 만다. 그리고 죽음. 유산으로 남겨진 것은 일기장인지 소설인지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흘려 쓴 노트. 그러나 내용은 이기동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새롭게 고쳐 쓰는 고군분투 속에 신춘문예에 입상을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반쯤은 뜯어고쳤으니 이기동의 오리지널이라고 봐도 되겠지만 갑자기 그의 소설가로서의 자질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의문스럽다. 노량진 시절 소설을 하도 많이 봐서 문장력이 늘은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조금 부족하다. 하는 일 없이 백수 신세나 면할 수 있을까 하던 비루했던 삶이 작가로의 눈부신 비상을 하게 된다.
그는 숨어있던 작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오랫동안 멋진 작품들을 발표하며 쾌적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야기는 중간 중간 존 케이지와 그의 아내 그레이스 이야기로 넘어갔다 돌아오고는 한다. 남들은 미치광이라고 조롱하지만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이끌어내려는 케이지의 집요함과 진지함을 작가는 유머를 섞어가며 그가 만드는 세계와 주인공 이기동의 작품세계와 연결이 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려주려 한다.
수많은 작가지망생은 물론 짧은 전성기를 구가한 채 잊혀 가는 작가들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같은 진지한 글쓰기를 지금도 하고 있고 고뇌를 하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아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공간에서 무명작가들은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열심히 글과 문장들을 채우고 가고 있으며 소중한 결과물들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을 뿐이다.
주인공 이기동은 작가의 분신이다. 신춘문예 당선 후 마땅한 차기 작을 내놓지 못하고 방황을 했다. 절실했던 상황, 그리고 스스로 작가의 자질이 있었을까 물었을 대목들이 주인공 이기동의 고뇌에 묻어난다. 위트 있는 문장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야기를 끌어 가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 묵직함이 있는 소설이 될 수 있었던 힘일까, 다시 세상 독자들에게 노크를 했다.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놀랍고 든든한 원군을 동반하여. 지하 서점 한구석 먼지를 맞아가며 서점 주인과 눈을 하루 종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결론에 대한 불만과 함께 먹먹한 느낌도 든다. 진지한 고민과 체험도 묻어난다. 그리고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된다. 즐거운 책 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