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열린책들 세계문학 251
서머싯 몸 지음, 이민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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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 고전 시대의 스파이와 만난 여름날의 기쁨



우연하게도 고전 첩보물 2권을 내리 읽게 되었다.
한 권은 존 르 카레의 "스파이의 유산".
50년 전에 나왔던 그야말로 클래식 스파이 물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프리퀄 작품이다. 누렇게 변한 종이책의 질감 마냥 영국첩보부 서커스 안가 뒤뜰에서 파낸 상자 속에 들어 있었음 직한 오래된 이야기를 노쇠한 전직 스파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스타워즈 프리퀄에 환호했듯이 스파이 정통물의 알지 못했던 숨겨진 뒷 이야기들이 색다른 묘미를 주었다.
이제 또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셔머싯 몸의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어? 제목은 스파이 이야기라는 걸 대놓고 이야기해서 OK인데, 이 양반이 웬 첩보물을? 형, 왜 거기서 나와?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달과 6펜스"의 거장인 그의 등장은 사실 깜작 놀랄 일이다. 장르문학을 한 수준 낮은 단계로 보는 웃픈 현상은 지금도 없지 않은데 1920~30년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만큼 작가와 스파이물은 연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 소개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양반, 전직이 스파이였네."
스파이 출신 작가라 굽쇼? 아니, 작가 생활 중 잠시 스파이활동을 병행했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실제 1,2차 세계대전때 영국의 스파이 활동을 했던 - 007같은 빡 센 업무가 아닌 비밀 정보원 느낌이라 보면 된다 - 작가의 경험을 잘 살려 16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연작 소설이라 보면 되겠다.
= 사진을 보라. 젊었을 때나 나이 먹었을 때나 진짜 스파이처럼 멋있다.... =

실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서두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듯, 현실세계의 에피소드는 밋밋하고 때로는 급격한 결말로 치닫는 경우가 많아 그대로 소설에 옮기기에는 따분하다. 따라서 모티브를 따오더라도 작가는 독자가 흥미를 느낄 만한 요소를 삽입하고 이야기의 실타래를 살짝 꼬아야 그나마 이야기 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법은 지나친 설명에 빠지게 되고, 긴장감 떨어지는 배경설명을 하는 일도 빈번할 수 있기에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할 것이다. 작가로서의 몸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라, 반전 없는 스파이물, 스릴러....보고 싶은가?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도 등장해야 소비자는 욕구를 해소한다. - 모두 다 유주얼 서스펙트가 원죄의 근원은 아닌지? 하지만 항상 악당들이 사건의 전체 개요를 읊어주다가 역전당해 골로 가는 어이없음은 피할 수 없는 영화의 장치가 되어 버린다.
스파이 소설이라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물이나 액션 씬 가득한 장면을 기대했다가는 이 책은 중간에 접어야 한다. 작가는 74년생이다. 1874년.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 느낌의 소설이라 보면 대충 비슷하다. 사건은 느릿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사건이란 거 자체도 숨막히는 긴박감 같은 것은 없다. 심지어 호텔 안에서 만나는 스파이들끼리 서로 얼굴을 알아보는 소박한 수준에서 얼마나 기가 막힌 반전들이 등장하겠는가? 
하지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오래전 전설 속의 스파이들의 오래된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고 대화하는 모습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코난 도일의 소설들을 만날 때 느꼈던 그런 담백함 말이다. R이란 불리는 정보부 간부와 2시간의 대담 후, 스파이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상상이 안되지만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현실성은 충분히 있는 일이고, 깔끔하다. 
미션 임파서블의 원형도 등장한다. - 이 일을 맡게 되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해도 인사치례가 없을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도움은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죠? 
몸은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캡틴 잉글랜드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비밀임무, 매력, 우정, 사랑, 배신, 내적 갈등.....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리묘사가 걸작인 작품, 스파이 소설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다. 
근래에 나온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두 편의 소설을 읽고 나니 클래식 영화를 보았을 때 생기는 아련한 모노 음악의 포근함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물론이고 태어나기도 전에 등장했던 좋은 작품들은 끝없이 서재를 채울 수 있지만 읽을 시간이 모자를 뿐이구나 째깍 째깍 시계바늘만 보게 된다. 
여름에는 역시 스릴러, 스파이. - 핏물 고인 수박의 시원함과 함께 즐기세요,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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