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국내에서 1-2위를 인기작가라는 사실은 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기억 1,2권"은 작가와의 첫 만남이다. 책 읽기 좋아하는 모습을 자주 보던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가에는 베르나르 전집이 꽂혀 있다. 사 모은 책 권수에 비해 몇 권 읽지 않은 작가는 몇 있다. 대표적으로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데 읽은 것은 링컨차와 시인 단 두 권이다. 두께가 두꺼운 편이라 우선 순위에 밀리다 보니 책 등표지는 자외선으로 변형이 되지만 한 번 방문 없는 갈대 숲이 되고 있다.
베르베르 경우에는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전집을 보유하고 있는데 말이다. 전자책이라 눈에 덜 보인다는 문제도 있다. 살 때는 신나게 사 놓고 막상 읽을 때는 한차례씩 뒤로 밀린 케이스. "기억"은 그래서 최신 발매작인 동시에 처음으로 만나는 소설로 정해 마음을 굳게 먹고 페이지를 넘겨 나갔다.
우연히도 최근 읽었던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도 기억을 주제로 다루는 소설이었다.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시대. 영화 "메멘토"처럼 일정 시점 이전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단기간만 지속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시점에 항상 등장하는 의학적 사례가 있다.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의 사례. 특정 시점 이후의 과거를 기억 못하는 사나이가 등장한다. 몰레이슨이라는 사람은 뇌전증을 치료받기 위해 해마절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나 치료가 되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수술 전의 기억은 모두 정상적으로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단기적으로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모든 일을 기억하지만 어제 일은 오늘 아침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마는 장기기억을 부호화 하여 저장하는데 이를 절제하여 나타난 후유증이다. 의학계에서는 의사들의 두뇌연구에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이런 사례를 기본으로 고바야시 작가는 한 명이 아닌 인류 전체에 大망각이 일어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메모리를 인체에 삽입시켜 기억을 연장하는 사회의 폐해를 소름 끼치는 스토리로 엮어내고 있다.
세대가 지나 같은 증세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면 새로운 인류는 특정 시점 이후가 아니라 모든 기억이 10분만 기억되고 나머지는 메모리에 저장되기 때문에 메모리 자체가 영혼인 동시에 인생이 되는 상황이 되는 셈이다. 존재의 의미는 영혼이나 육신의 차원이 아닌 메모리 속에 저장된 디지털 데이터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로서의 존재는 기억뿐이다.
그에 반해 베르나르는 기억을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차원에서 조망한다. 우연히 과거 퇴행 최면술로 인해 각성하게 된 르네는 과거의 전생에 살았던 자신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단순히 과거의 이미지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에서 두 명의 내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실질적 교감이다. 서로는 상대가 겪은 인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전생이라 해도 기억은 제거되었기에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면 된다. 다만 과거의 행동과 사건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미래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생명의 근원적인 성격이 일치하는건지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심지어 위기 상황에서 확실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누구나 전생의 나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은 가지지 못했으나 과거의 내가 가졌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경험을 무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관찰하는 다른 사람들에겐 이 놈이 미친 거다.
역사교사란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은 전설에 불과한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를 꺼내며 실제로 존재했다 주장하고, 아틀란티스 인과 교류가 있었다 주장하며 평상시의 온순함을 버리고 폭력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 놈이 미친 거다.
정신병원 go go.
책을 읽어가면서 르네의 머리속에 펼쳐지는 환상과 전생이 실제 한 것인지, 아니면 이놈이 사실은 미친 건지 독자는 둘 다 가능성을 가지고 봐야 한다.
전자라면 앞으로 남은 페이지에 환상적인 모험이 펼쳐질 것이고, 후자라면 마지막에 가서 다 꿈이야 하고 시시하게 결론짓는 사기꾼의 소설 나부랭이를 읽고 있는건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야 한다.
대략 2권으로 책이 바뀌면 무슨 의미인지 독자들은 공감하리라 믿는다. (이런 묘미가 책 읽는 기쁨 아니던가.)
1권에서 2권으로 넘어가다 책 말미에 작가가 글을 쓰며 들었다는 음악리스트가 있어 호기심에 확인해 본다.
사계 : 클래식 버전과 락 버전
피터 가브리엘 : In your eyes
핑크 플로이드 : Shine on your crazy diamonds
수퍼 트램프 : Fool's overture
Rene Aubry : steppe
오호! 취향이 나랑 비슷하네.
르네 오브리는 처음 듣는 뮤지션이므로 스포티파이에서 검색해 본다. 심지어 주인공 이름하고도 같다!
리스트에 있는 음악 모두를 이미 알고 있어서 처음에는 핑플 노래가 가장 책읽기에는 어울리겠다 생각했는데 이 노래를 들어보니 바로 이 노래. 책의 분위기 딱 맞고, 쟝 피에르 주네 감독이 영화에 가져다 쓰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다.
(르네의 다른 노래들도 마음에 든다. 필립 글래스 느낌도 물씬 나고~ - 고맙습니다, 베르베르 선생님)
주인공은 과거 전생의 인물 중 1번째인 게브에게 가장 매혹당한다. 나머지 전생들이 별볼일 없던 이유도 있겠지만 전설 속의 공간에서 살고 있고, 존 레넌의 노래처럼 아무 것도 없는, 전쟁도 종교도 정치도 종교도 없고 비프 스테이크도 없이 사랑만이 가득한 그곳을 파라다이스로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걱정없이 사는 평온한 일상생활만으로도 꿈같은 세계지만 실존할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만 이 천년 전에 있었다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여성 파트너가 등장한다. 현재의 파트너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 바뀌지만 멋진 만남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동지인 동시에 모험을 즐기며 세상에 태어나 나란 존재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 하고, 과거의 나와 교감하기위해 끝임 없는 노력을 한다. 어쩌면 이 역시 정해진 운명이로 이어진 인연인가?
챕터 별로 책에 등장하는 사건의 근간이 되는 이론을 짧게 기술하는 것은 공부하는 느낌없이 스토리를 술술 이해하기 쉽게 도움이 된다. 주인공이 노트북에 만들어 놓은 메모 형태인데, 므네모스 파일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므네모스는 그리스 신화 므네모시네에서 따온 듯하다. 이 여신은 바로 "기억의 여신"이다. 메모리의 어원 정도 될 거 같다.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작가가 소설에 숨겨놓은 보물단지 같은 느낌이다.
중간에 재밌는 부분이 하나 있다. 권력 또는 정치의 탄생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아틀란티스의 재앙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지도자의 필요성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하는데, 문득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유인원들이 어느 날 검은 돌에서 가르침을 받고 각성하여 손에 무기를 잡으며 폭력의 진화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장면이 떠올랐다. 장렬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오버랩 되며 흥분시키는 장면이었는데 저자는 간결하게 끝을 서둘러 맺어 아쉽다.
계속되는 주인공들의 질문.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가?"
자유의지에 대한 헛갈림은 주인공이나 글을 읽는 나 자신에게도 생각할 여운을 던진다.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모든 일들이 원래 정해져 있던 궤도로 간다면 이것은 자유의지인가 아닌가?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화병을 조심하라고 한 것은 자유의지를 허용한 것인가 결정된 운명의 수레바퀴인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험담으로 스토리 속의 주인공들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작가는 자꾸 이 문제를 거론하며 발을 슬쩍 걸고 있다.
베르베르의 필연적인 작법인거야? - 다른 책을 읽다 보면 못된 -물론 흔쾌한 반어법이다. -버릇인지 아닌지 체크해볼 수 있겠지.
하나 배운 게 있다.
3+1 원칙이란 것이 소개된다.
이 책에서 얻은 값진 심리학 교훈. 3가지 긍정을 상대방에게 유발하면 마지막 자신이 필요한 한가지는 쉽게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써먹어 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