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사북 사계절 1318 문고 34
이옥수 지음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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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체! 보아라. 아빠가 너희에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구나.

34년 전, 아빠가 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났던 옛이야기다. 34년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사태'라는 말을 항상 듣고 살았어. '사북사태', '광주사태'라는 말을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읽고, 보았다. 그런데 항상 여기에는 '빨갱이', '폭도', '폭동'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아빠 역시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구나, 우리나라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과 텔레비전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알게 되었고, 아빠가 얼마나 속아 살아왔는지 가슴이 찢어지도록 깨달았다.

34년간 우리나라는 정말 많이 변했다. 34년 전 이야기를 옛이야기로 말하여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빠가 얼마 전에 <내 사랑, 사북>이라는 책을 읽었다. 34년 전 '사북사태'라는 사건이 일어난 동네의 이야기였다. 사북은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사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탄을 캐는 동네였다. 석탄을 캐기 위하여 지하에 수천 미터까지 내려가야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수천 미터를 내려갈 수 있는 너희도 궁금하지,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수천 미터에 들어간 사람들은 생명을 존귀함을 아마 우리보다 더 많이 알 것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아빠는 생각하고 있다.

위험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광부'라고 한다. 광부 아저씨들은 정말 생명을 언제 잃을지 모르는 작업을 하지만 돈을 조금만 받았고, '진폐증'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진폐증에 걸린 광부 아저씨들은 오래전에 석탄을 캐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아직도 병원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광부 아저씨들은 더이상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데모를 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 행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광부 아저씨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 가면서 행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아빠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 국가, 집단은 분명 잘못되었다. <내 사랑 사북>과 '사북 사태'는 이것을 고발하고 있다.

그래, 우리도 '사람이다!'

31년 전 광산의 사장들과 경찰과 공무원들로 구성 권력집단, 어용 노조는 광부 아저씨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부 아저씨들을 빨갱이, 간첩, 폭도로 만들었다. 그때에는 '빨갱이'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때였다. 너희는 상상이 가지 않지. 아빠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사북과 '사북사태'에도 사랑은 있었음을 <내 사랑 사북>은 말하고 있다. '사랑'은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한 단어로 나타내라고 하면 아빠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사랑 사북>이다.

그 사람들 중에 '김수하'라는 누나가 있다. 나이는 16살. 작가가 왜 수하 누나의 나이를 16살이라고 했을까? 아마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나이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헌이와 서헌이가 벌써 16살이 되었는데 너희도 누나와 같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거대 자본과 권력집단을 향하여 외치는 광부 아저씨들의 딸이 수하 누나이다. 수하 누나는 정욱 오빠를 사랑하면서 사북의 광부 아저씨들도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다.

수하 누나는 사북이 싫었다.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지장산. 자기를 따라다니는 광호, 엄마의 꾸중은 정욱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북이었다. 수하 누나는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반하는 사북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는 환경이 싫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가에 물을 긷는 순간 오빠를 만나게 되면서 수하 누나의 삶은 완전히 변화를 이룬다. 오빠는 수하 누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사북 탄광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노력은 하지만 사장들과 권력자들은 사람답게 대우를 하지 않으려는 사북을 알게 되었고, 오빠를 통하여 수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사북이 안고 있는 인간을 반하는 근본적 악을 알게 되었다. 이 사북을 수하 누나는 사랑한다.

'사랑'은 수하 누나가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인생의 전환점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 진리를 깨닫게 알지 못하고 죽어갈 수도 있다. 그중에 사북의 권력집단, 사장, 어용 노조가 사람임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자들이다. 너희는 결코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수하 누나는 아빠가 갱도 안에서 사고를 당한 후,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왜 아빠와 사북의 광부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아빠가 '사람답게 살아 보자'라고 외칠 때 아빠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오빠를 만나고, 사랑을 알고, 아빠의 사고를 경험하고 사람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너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면서 살기를 바란다

나의 아이들아! 그래 너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면서 살기를 아빠는 바란다. 수하 누나처럼 말이다. 비록 사북의 광부아저씨들이 그때에는 좌절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오늘, 우리는 그래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룬 것은 바로 수하누나와 정욱 오빠, 그리고 아빠가 사람답게 살아보자 외쳤기 때문임을 기억하기를 아빠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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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방송화면 갈무리

 

일베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이미지를 사용했던 SBS가 이번에는 노 대통령을 파렴치한 '색한(色漢)'으로 비하했습니다. 충격이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는 16일 오후 '종이로 만든 세상, 종이 아트'란 주제로 가위를 이용해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는 '신의 손' 송훈 씨를 소개했다.

문제는 송훈 씨가 제작한 신윤복의 '단오풍정' 그림을 원작과 비교하면서 발생했다. 원작이라고 소개된 '단오풍정' 왼쪽 상단에 노무현 전 대통령 이미지의 얼굴이 합성돼 있었던 것.

원작에서 동자승이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것을, 동자승 자리에 노 전 대통령을 대치함으로써 마치 노 전 대통령이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색한'인 양 비하한 것.

네티즌들은 문제의 그림이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합성 사진, 그림 등을 양상해온 '일베'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동일한 작품을 찾을 수 없어, SBS 직원중에 '일베'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어 SBS의 해명이 주목된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방송화면 갈무리

이에 SBS 관계자는 <티브이데일리>에 "명백한 실수"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이 외주 제작사에서 맡아 제작하는 프로"라며 "피디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구글에서 사진을 내려받았는데, 작업을 할 때는 전혀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이러한 문제가 자꾸 되풀이 되는데, 문제는 구글 검색인 것 같다. 그래서 '구글 검색이 위험하다'고 몇 번이고 주의를 시켰는데 외주 제작사 피디라서 지침이 잘 내려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구글 검색에 책임을 돌렸는 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쿠키뉴스>는 네티즌들은 "구글에서 단오풍정을 검색해도 노 전 대통령이 합성된 이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의도적인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첫 페이지에서 해당 합성 이미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고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SBS가 노 대통령을 비하하는 이미지를 올린 것이 이번에 처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SBS는 앞서 지난 2013년 8월에도 메인뉴스인 '뉴스8'에서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한 이미지가 담겨있는 도표를 사용해 물의를 빚었고, 지난 3월에는 '런닝맨' 방송 중 일명 '일베마크'가 그려진 고려대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했던 SBS프로그램들


누리꾼들은 "SBS <세상에 이런 일이> 는 일베충이 숨어있나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합성 사진이 버젓이 공중파에 노출. SBS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죠. 방송국에 숨어있는 일베충들을 빨리 박멸해야할듯",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에서 또 다시 전직 대통령님이신 노무현대통령님을 비하하는 합성사진이 방송을 탔습니다. SBS에서 벌써 세번째입니다. 철저한 조사와 징계필요합니다.",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들이 없다!!!  SBS는 이번에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선 안된다. 이번에도 대충 때우려 한다면 당신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니."라고 분노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노무현 비하, 과연 박근혜 대통령을 이렇게 비하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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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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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시 차다의 <마하트마 간디>를 읽었다. 문득 생각났다. 연평도가. 한반도가 생각났다. 전쟁을 못해 안달이 나 외치는 이들이 생각났다. 대통령은 "전쟁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북한이 다시 도발하면 "몇 배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간디를 그저 '비폭력주의자'로 칭송을 하고 있지만 그가 비폭력주의자의 삶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간 비폭력의 삶을 왜 우리들의 삶에는 적용하지 못하지는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

간디는 누구인가?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길이란 어떤 길인가?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른 대로 그것은 사티아그라하다. 진리파지(眞理把持)이다. 참을 지킴이다. 또 세상이 보통 일컫는 대로 비폭력운동이다. 사나운 힘을 쓰지 않음이다. 혹 무저항주의란 말을 쓰는 수도 있으나 그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이름이다. 간디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다. 다만 폭력, 곧 사나운 힘을 쓰지 말자는 주의다." (본문 35쪽 인용).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그는 불의 항거했다. 항거의 방법, 총과 칼, 인간의 생명을 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와 진리 그 자체로 저항했다. 간디가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저항주의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불의에 항거했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은 간디의 삶의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요게시 차다의 <마하트마 간디>를 통하여 본 간디라는 한 인간의 삶의 결론 '지독한 신념'으로 살아온 여정이었다.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으로 그를 단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비폭력'이라는 말을 쓴다. 자신이 갈 수 없는 길이면 쉽게 말하면 안 된다. 간디의 삶의 여정을 존경한다는 말 한마디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사적 이익의 도구로 사용한다.

간디는 인도의 힌두 계급의 카스트 중 제3의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바이샤 출신이다. 인도라는 국가는 사상 속의 국가는 존재하였지만 정치, 행정체제로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현실의 문제는 그가 영국 유학을 끝내고 남아프라카로 가기 전까지는 얼마나 자기를 노예화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남아프리카에서 경험된 인도와 인도인의 문제는 사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이었다. 브리마 차리아, 사티아그라하는 그를 지독한 신념을 통하여 현실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을 설정하게 되며 자신의 삶이었고, 자신이 된다.

"우리는 폭력도, 유혈도, 사람들이 요즘 이해하고 있는 방식의 외교도 채택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진리와 비폭력만 채택했습니다. 무혈 혁명을 이루려는 이러한 시도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계는 유혈로 인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세계는 탈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탈출구를 열망하는 세상에 탈출구를 보여주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인도의 특권일 것이라는 믿음에 자부심을 자기고 있습니다." (본문 538쪽 인용)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레바논에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입에서 정의와 평화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간디의 이 말이 그들에게는 어떤 뜻일까? 의미일까? 부시 미국대통령은 오늘도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철군하면 베트남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비폭력이나는 신념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될지라도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었고, 원수라는 인간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용납할 수 없게 한다. 인도로 돌아와서 그가 보여준 사타그라하 운동과 자치운동, 인도 독립을 향한 열정을 무엇으로 담을 수 없는 그릇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원래 종교란 근원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기에 이슬람과 힌두종교의 하나를 위하여 싸웠지만 현실 사회가 추구하는 정치성이 결국 분열의 씨앗이 되게 하는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된다.

비폭력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도 결국은 '폭력'의 이름으로 죽었다. 중심에는 종교가 있었다. 종교만큼 평화를 외치는 것도 없지만 종교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음을 비폭력주의자 간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 지구상에 벌어지는 모든 전쟁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인류의 비극이 종교에서 싹트고, 잉태되고, 만들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간 길을 우리는 왜 가지 못할까? 그러니 그를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비폭력주의자'라고, 치열한 비폭력의 삶의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간디를 입에 담는 것은 간디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금 한반도에 간디가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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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은 말한다 -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구본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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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좌판이 고맙고, 반가운 사람이 있다. 이른바 '악필'이다. "악필은 천재"라는 말도 안 되는 위로해보지만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수밖에 없다. 어릴 적 동무들끼리, 아닌 마음에 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악필은 한으로까지 남아 있다.

 

악필도 부담스러운데, 글씨가 그 사람 성격과 인격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펴낸 이가 있다. 구본준 검사(현 법무연수원 교수)다. 구본준 검사는 <필적은 말한다>에서 '글씨는 뇌의 지문'이라는 필적학의 주장을 바탕으로, 항일 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구본준은 항일 지사(6백 점)와 친일파(3백 점)을 통하여 왜 어떤 이는 목숨을 바치며 불의에 맞서고, 어떤 이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좇았는지 그들이 남긴 글씨들을 통하여 살펴보고 있다. 

 

 구본준은 항일지사는 절개를 지켰으니 좋은 글씨를 남겼을 것이고, 친일파는 나라를 팔아 먹었으니 나쁜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선입관으로 글씨를 단순 평가하지 않았다. 구본준은 조직폭력, 마약, 살인 따위 강력범죄 수사를 20여 년 해오면서 그들이 남겼던 글씨체가 일반인들과 달랐음을 알았다고 한다. 글씨와 인격에 무언가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들(범죄자들)의 글씨는 하나같이 둥글둥글하고, 글씨 크기와 간격도 들쑥날쑥했다. 내용은 온통거짓이도 글씨체까지 꾸며내진 못하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필체는 그들의 거짓된 인격이나 기질을 반영하고 있었다."(29쪽)

 

읽는 이에 따라 약간 부담스러운 생각이 들지만-나 역시 마찬가지-그는 필적은 그 사람 인격을 말한다고 단언하기 까지 한다. 구본준은 항일지사와 친일파가 남긴 간찰(簡札)에 주목했는데 이유는 온 정성을 다 드려 쓰는 서예보다는 선인들의 정신과 생활상을 알 수 있고, 꾸미지 않는 맨 얼굴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본준이 항일지사와 친일파 글씨를 분석해 내린 결론은 이렇다.

 

김구 선생(왼쪽)과 을사오직 이완용(오른쪽) 글씨

"항일 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다. 글자 간격은 좁고, 행 간격은 넓으며,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반면 친일파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다. 글자 간격이 넓고, 행 간격은 좁으며, 규칙성은 떨어진다."(93쪽)

 

그럼 항일과 친일 중 대표적인 사람인 김구 선생과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 글씨를 한 번 비교해보자. 돈으로 김구 선생와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두 사람의 글씨에 매기는 가치는 130×30㎝ 반절지를 기준으로 백범 김구 선생 글씨는 1000만~1500만원이고,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는 30만~50만원 정도 나간다고 한다. 오직 돈의 가치로만 따져도 30배 차이가 난다.

 

구본준은 김구 선생 글씨는 웅혼함과 강인, 철옹성 같은 기개, 꾸밈이 없는 천진함이 느껴지고, 언뜻보면 졸렬하고 어눌한 듯하나 자주 대하면 달빛에 매화 향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은은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여 이완용은 당대 명필(?) 답게 '잘 썼지'만 꾸밈을 앞세워 가벼움만을 좇는 기운이 사사롭고, 글자 크기, 행 간격이 들쑥날쑥한 것에서는 예측하기 힘든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소식은 '옛날에 글씨를 논함에 겸하여 그 생평도 논하면서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이완용의 글씨가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생각하고 천년이 가도 썩지 않고, 전해질' 김구 선생의 글씨를 능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13쪽)

 

눈길을 끈 내용은 김구 선생과 이완용 같은 알려진 인물에 대한 글씨체 평가보다는 큰 일을 남겼지만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만큼 큰 이름을 남기지 않은 자결과 무력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 편지글들이었다. 

 

홍문관, 사헌부, 요직을 거친 이만도는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 단식으로 자결한다. 이만도 글씨를 "조용하고 엄숙하며 우아한 맛을 풍기며 학식과 인품과 정조가 고방하게 묻어난다"고 구본준은 평했다.

 

성균관전적, 통훈대부를 지낸 전남 곡성 출신 정재건은 조선을 일제가 병탄하자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면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런 그를 "시원시원하고 청량하며, 성정이 고결하고 단아하며, 포용력이 큰 사람임을 보여주는 필체"라고 구본준은 평했다.

 

자결한 항일지사들의 글씨는 더 반듯하고 더 규칙적이며 상당히 정돈되어 있다. 글자의 선은 곧고 각진 것이 많다. 이들 특징은 일반적인 항일운동가와 다를 바 없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마음먹은 것을 곧 행동에 옮기는 습성, 빠른 결단력, 이것이 속도의 빠름과 관련 있다. -148쪽

 

또 의병장 양한규의 쌀 한 섬을 빌려 달라는 편지, 의거를 앞두고 가족을 부탁하는 김지섭의 편지,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곽종석의 포고문, 의병장 정경태의 '창의통문', 의병장 유인석이 최익현에게 눈물로 보낸 간찰, 만주 투사 이종혁의 옥중 편지 따위들은 글 내용으로서뿐만 아니라 글씨체를 통해서도 그들이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필적은 말한다>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유명인사들 글씨를 평했는데 책을 닫으면서 문득 든 생각하니 이명박 대통령 필적은 어떻게 평가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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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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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문명의 중심에는 콘크리트가 있다. 콘크리트 없는 도시문명은 설명할 수 없다. 편리함과 견고함, 속도감이다. 콘크리트는 오늘도 현대 문명의 이기로서 열심히 그 탑을 쌓고 있다. 문제는 콘크리트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다고? 그렇다. 60년 이상 농사를 지은 농부라 할지라도 콘크리트에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을 매도 생명은 잉태되지 않는다. 땅은 그렇지 않다. 땅은 생명이다. 볍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땅에 씨를 뿌림으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땅은 생명의 보고이다. 그러기에 땅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

‘냉이, 제비꽃, 괭이밥, 씀바귀, 마디풀, 방가지똥, 지칭개, 개쑥갓, 황새냉이, 벼룩나물, 명아주, 쑥, 사철쑥, 상치, 꽃마리, 나팔꽃, 사과나무, 함박꽃 나무, 강아지 풀, 녹두’ 따위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땅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잡스러운 풀’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귀찮음과 밟힘을 당하지만 꿋꿋이 창조 이래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잡스러운 풀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증명한다. 비바람과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자기를 들어낸다. 인간의 숱한 개입이 있을지라도 원망하지 않고 생명을 이어간다. 얼마나 존재 가치가 없으면 잡스러운 풀이라는 본명을 인간으로부터 하사받았을까?

그러나 화려한, 고귀한 자태의 꽃들은 이제 사람의 손길이 아니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설파하기 위하여 살아나고자 하지만 스스로 생명을 찾거나 유지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자기 생명도 잉태할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가? 그들도 그 옛날에는 생명을 얻고, 주고, 함께 나누는 자들이었지만 인간의 눈으로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병으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더 예뻐져라 외치고 있다. 그들 삶이 얼마나 힘들까? 언제쯤 그들도 잡스러운 풀처럼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으로 해방될 수 있을까?

고귀한 꽃들이 아름답다는 이유-물론 사람의 눈에 아름다울 뿐-만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잡초는 인간에게 아무 필요 없는, 피해만 끼치는 존재일지라도 그들도 생명이며, 인간에게 생명을 선물한다. 황대권은 공간적 닫힌 공간에서 타인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잡초를 경험함으로써 공간적 열린 공간에 사는 이들이 콘크리트라는 올무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 때에 그는 생명을 경험한다. 곧 자유이다. 육체의 억압을 넘어선 정신과 마음과 인간 자체의 자유를 말이다. 복된 일이다. 마음대로 바깥세상을 다닐 수 있는 신세들이지만 이 시대 우리는 어쩌면 가장 불행한 사람들 아닌가? 자유가 없다.

<야생초 편지>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유와 진정한 가치를 상실한 우리네 인생을 말한다. 자본의 노예, 성공의 노예, 건강의 노예, 공부의 노예로 전락한 우리이다. 육체만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고 참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잡스러운 풀이라 교도소 내에서조차 귀찮은 존재인 ‘잡초.’ 아니다. 이해인 수녀님 말씀처럼 ‘들에서 생명을 뿜는 풀.’ 왜 사람들은 야생초를 귀찮은 천덕구니로 생각할까? 그냥 뽑아 내면 다 끝나는 것,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더럽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돈이 된다면, 이익이 된다면 잡초 인생에서 벗어나 고귀한 꽃으로 신분 상승을 얻을 수 있다. 신분 상승의 주체가 잡초 자신이 아니라 인간임이 또한 불행의 씨앗이다. 황대권이 건강한 정신을 가졌기에 세속 인간이 범한 오만함의 극치를 범하지 않고 야생초들에게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우리보다 나은 이유이다.

야생초와 황대권은 옥중동지가 된다. 동지란 이념과 신념, 사상, 종교인 목적을 위하여 생명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잡스러운 풀이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과 동지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비난할지라도 그들은 동지가 되었다. 생명을 서로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생명을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 나은 세상이다. 살기에 바빠, 이기적 삶이 바빠 다른 이들과 생명을 공유하지 못하는 세상은 생명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된다.

사람들을 말한다. 교도소에 갇힌 놈이 무슨 생명을 논하고, 인간을 논할 수 있느냐고, 이미 버림받은 인생이 고상한 척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그렇지 않다. 나쁜 놈으로 감옥에 갇힌 자가 아니라 고상하고 의로운 인간이지만 정말 그럴까? 자본에 사로잡힌 인생들이 잡스러운 풀이기에 아무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마구 뽑고, 타오르는 태양 앞에 말라가는 잡스러운 풀을 보면서 웃음 짓는 인생들 아닌가? 이글거리는 땅바닥에 던져버린 잡초를 본 적이 있는가? 타들어가는 그네들을 보면서 사실 기분 좋은 일들이 더 많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익을 가져다는 곡식에 더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황대권은 닫힌 곳에 살았다. 열린 공간에 사는 여동생과 닫힌 공간에 사는 자신 사이에 오간 편지를 통하여 자신은 닫힌 공간에 살았지만 결코 죽임의 자리에 있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생명을 논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전쟁을 하는 이들도 생명을 말한다. 생명을 죽이는 폭격을 하면서도 생명을 말한다.

죽임의 잔치가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전쟁의 포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건지고 연장하는 일에 거부되고 있으며, 같은 땅과 같은 핏줄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달리 취급받고 있다. 이것이 죽임의 잔치가 아닌가? 생명의 가치가 한없이 타락했다. 타락한 생명의 가치를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잡스러움으로 비난받는 잡초, 아니 야생초를 통하여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죽임의 잔치에 참가하면서 우리는 살림의 잔치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황대권은 닫힌 공간에서 살면서 야생초를 통하여 죽임이 아니라 생명, 살림의 공간에 살았다. 그가 부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수많은 들풀을 그냥 우리의 이익에 규정하여 필요 없는 것으로 정죄하였다.

국가 권력은 그들의 권력에 도전한 황대권을 닫힌 공간으로 인도하였지만 그는 생명과 살림의 공간에서 진정한 삶의 목적을 알고 살았다.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명을 얻었고 자유를 누렸다.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자유한 자라 말하고 있지만 진정한 자유를 우리는 자본과 건강과 성공과 학벌과 이기심에 사로잡혔다. 가장 억압의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갇힌 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범죄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것이 자유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야생초 편지는 공간과 육체의 갇힘이 결코 정신을 갇히게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갇힌 자들이다. 정신과 문명이 이미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를 통제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황대권이 감옥에서 코카콜라 병에서 청개구리를 키웠다. 컵라면 용기에 잡초를 심었다. 코카콜라 병과 컵라면 용기는 문명의 이기이며, 또한 자연을 해하는 일선에 자리 잡은 자들이다. 그들이 황대권에게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 생명의 잔치를 한 번 꿈꾸어 보자! 살리는 일은 한 번 해 보자! 인간의 이익에 눈멀지 말고 우리 한 번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어보자! 황대권이 잡스러운 풀과 생명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는 데 왜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생명을 함께 나누는 동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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