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좋은 의미 일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명예라는 인간 탐욕의 한 방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옛 사람들 중이 백성의 피를 빨아 먹었던 자들이 임지를 떠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비(碑)'를 세웠던 일들을 있었다. 백성을 착취한 자들이 이름까지 착취하는 탐욕이 나은 결과다.

 

좋은 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을 탓할 필요가 없지만 좋은 책을 내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 아무개'다. 그가 쓴 <이 아무개의 장자산책>(삼인 펴냄)을 손에 드는 순간 멈칫한다. '이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이 있나 의문이 들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 아무개는 목사, 동화 작가, 번역가이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들과 따끔하고도 넉넉한 말씀으로 많은 이들을 품어주는 이현주 목사임을 알게 된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1996년에 나온 <장자 산책>을 새로 다듬고 보완한 개정판이다. <장자>는 장주의 저술로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인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장자 사상의 정수이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내편>을 다루고 있다. 

 

사실 <장자> <도덕경> <사서오경>을 접할 때마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 2500여 년 전 중국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남긴 글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할 것 같은 <장자>를 읽는 것은 시간이 낭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젖은 이들에게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연이 바람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은 그 줄이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면 연은 곧장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장자의 생각이 수천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그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박혀 있기 때문이요, 근본을 붙잡은 그의 생각을 울가 잃은다면 21세기 눈부신 컴퓨터 문명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10쪽)

 

사실 <사서삼경>과는 달리 노자와 장자는 1명이 읽었다면 얼굴이 하나이고, 100명이면 100개, 100만명이면 100만개의 얼굴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기서 <장자>라는 텍스트가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치열하게 벼려진 거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실용주의가 나은 병폐는 심각하다. 이익만 되면 무조건 좋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존중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자본이 낳은 탐욕에 팔아버렸다. 이럴 때 2500여 년 전 <장자>를 통하여 오늘 우리 자신들이 빠져 버린 탐욕과 존엄성 훼손을 극복하는 일이 필요한 시대임을 분명하다.

 

이아무개 목사는 <장자>를 통하여 기독교와 불교 등을 오고간다. 장자가 어떻게 세상의 종교와 사상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장자와 기독교, 불교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텍스트에서는 서로가 다른 진리가 아니라 소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라고 하는 물건 하나 없애버리면 너 있는 자리가 곧 새 하늘 새 땅이요 네가 곧 곤이요 붕이요 남명이요 북명이요 9만 리 창공이요 회오리바람이라는 얘기다."(17쪽)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곤과 붕은 부처, 남명과 북명은 장자다. 이아무개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나’라는 관념에 예속된 사람과 그것을 벗어난 사람의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功) 다툼 때문에, 자기 이름 내기에 바쁘다. 이런 때에 '나'를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질 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길이다. 이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장자와 예수, 석가뿐만 아니라 노자, 공자, 간디, 아퀴나스, 소크라테스를 서로 불러모아 대화한다.

 

<공자> <맹자> <논어> <대학> <중용> <금강경> <산해경>, 조선의 선시, 수사(修士)의 글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진리와 인간 자신, 자연을 알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 놓았던 텍스트를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뚫고 나아가려 했는지, 무엇이 같고, 다른 지를 <장자>를 통하여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대는 죽은 시대다. 자연을 이해하지 않는 시대는 죽은 시대. 실용을 통한 이익 창출이 지배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말하고, 학문을 말하고, 문학을 말하는 철학, 어문학, 인문학, 기초학문은 이미 대학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이웃이 강도를 만나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연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이익의 도구인 이용가치로 평가하면서 결국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파멸로 가고 있다고 이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 아래 힘을 통하여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음을 말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파멸을 향한 지구의 운명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서 '힘'만을 볼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보아야 한다. 예술과 종교가 새로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르고 켜서 침대로 만들 재목으로만 볼 게 아니라 더불어 노닐며 생사를 함께 할 '이웃'으로, '어미'로 보아야 한다."(51쪽)

 

자신을 장사 지내는 것, 버림, 완전히 여읜 상태를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 에크하르트(M. Eckhart, 1260~1328)는 '무심'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어디에도 연루되어 있지 않음'으로 '초탈'이라고 이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초탈이야 말로 사랑, 겸손, 자비보다 고귀한 최선, 최상의 덕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최상의 덕이지만 가지는 것에 매어 달리니 사랑과 겸손, 자비는 찾아 볼 수 없다.

 

초나라 때 미치광이 접여(接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시들어가는 덕을 어찌하겠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돌이킬 수 없도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이 그것을 우리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자기 목숨 살아갈 따름이니 시방은 겨우 형벌이나 면하는 게 고작인 세상.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땅에 금 긋고 그 안에서 허둥대는 짓거리.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잘리우고 옻나무는 쓸 데가 있어서 베어지네. 사람이 저마다 쓸로 있음의 쓸모는 알면서 쓸모없음의 쓸모는 모르는구가."(200쪽)

 

모든 것이 썩어 무너진 세상이라는 말이다. 입신양명과 출세, 탐욕만을 위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자연을 버리고, 생명을 버리는 세상을 향한 장자의 일침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이름이 나면 높아지고, 높아지만 탐욕이 생기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 광우병을 보라, 대운하를 보라. 영어몰입교육을 보라. 파멸에 이르는 길이지만 그것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책 읽는 것조차 대학입시와 연관시키는 우리 시대에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분명 돈 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실용과 탐욕에 찌든 우리가 <장자>를 통하여 무심과 비움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과 함께 만물이 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문명'은 과연 인간에게 희망인가? 문명은 과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가? 문명사회는 과연 미개사회보다 선(善)인가? 우리 시대는 '그렇다'고 말한다. 문명사회는 천하기에 선하기에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가치, 삶, 희망이라고. 그리하여 오늘도 문명사회를 만들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거짓된 진실>은 '문명' 중심에는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가 숨겨져 있다고 선언한다. 문명 속에 숨어 있는 증오의 문화를 깨는 것만이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단언한다.

 

문명사회 속에 어떤 증오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기에 데릭 젠슨은 <거짓된 진실>을 통하여 문명을 깨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했을까?

 

1918년 미국 조지아 주 발도스타에서 흑인 열한 명을 무참히 살해한 백인들. 살해당한 흑인 남편을 둔 아내가 복수를 맹세하자 나무에 매달아 난도질하고, 불에 태웠고, 배를 갈라 아이까지 발로 머리를 짓이겨 죽였다. 하지만 그것이 수백 발을 그에게 발포했다.

 

90년 전에 일어난 오래된 일이라 인종차별이 사라진 우리 시대는 이런 잔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애써 변명하려는 순간 데릭 젠슨은 칼날을 들이댄다. 2001년 남미 콜롬비아 알토나야에서 ‘암살대’라는 이름으로 부활절 주말에 40명을 학살했다. 한 여성을 데릭 젠슨은 주목했다. 암살대는 그 여성을 전기톱으로 손을 자르고, 배와 목을 갈랐다.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붙이는 성냥이다.” (본문 11쪽)

 

데렉 젠슨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에 인류 문명이 인종과 성, 자본과 생산을 통하여 얼마나 참혹한 증오를 남겼는지 낱낱이 고발한다. 37-40쪽에서 사람들이 경찰 지시를 따르다가 죽음 당한 사실을 말한다. 이 증오는 과거에 일어난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인 사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 시 길거링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 갈랜드 카터, 17세, 1996년 1월 8일, 등 뒤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다. 대릴 하워턴, 1994년 9월 8일, 다른 사람의 집 지키는 개한테 먹이를 주다가 총알 여섯발을 맞았다. 티샤 밀러, 1998년 12월 28일, 고장 난 차에서 자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깨는 순간 총알 열두발을 맞았다. 1996년 6월 13일, 자신의 차에 앉아서 손을 허공에 올린 상태에서 총알 열여덟 발을 맞다(첫발을 쏜 다음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검둥이 넌 이제 죽었어.).”

 

주목할 점은 이 증오 문화를 통하여 잔혹한 희생을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흑인과 더불어 소수자, 유색인종,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루에 4~5명이 경찰관들에게 희생당하고 있다. 인종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여성 인권이 보장된 미국 사회도 '여성'에게는 ‘보이지 않는 증오’라는 성폭력을 통하여 희생당하고 있다. 강간을 통하여 경험한 여성들은 인간성을 파괴당한다.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성폭력은 증오범죄인데 남성 주류 사회는 이를 성범죄로 규정할 뿐이다. FBI가 데릭 젠슨에게 밝힌 사실은 이렇다. “강간은 증오범죄가 아니에요.”

 

어떤 여성들은 성폭력과 노동력 착취를 통하여 이중으로 인간성 파괴를 겪는다. '허위계약'을 통하여 '강간'을 통하여 문명은 여성을 하나의 도구로 삼을 뿐이다. 이는 미국 사회 여성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증오'보다 더 참혹한, 분명한, 증오범죄다. 1999년 프놈펜에서 '디나 찬'이라는 여성이 '제1회 젠더와 발전 전국 대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고 우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뼈, 피부가 있고, 심장이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이의 누이이고 딸이고 손녀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자입니다. 존중과 품위로써 대우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권리를 우리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인신매매를 당했고,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한 후 억지로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어 남자들이, 그래요, 남자들이 쾌락을 느끼게 해야 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수치심, 고통, 모멸감뿐이었습니다.” (본문 307쪽)

 

경제에 약자인 여성, 아니 백인이 아닌 그들은 이중고통을 통하여 인간성 파괴와 모멸감을 겪는다. 이 중심에는 자본이 있다. 자본에게  다이아몬드를 빼앗긴 남아프리카 원주민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긴 인디언들이 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땅과 다이아몬드 권리를 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리는 원주민이 아니라 정복자들에게 있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잔혹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자본은 여성을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인 증오범죄다. 개인과 가족, 사회까지 모든 빼앗아가 버리는 범죄다. 한마디로 하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과 도구에 불과했다.

 

"돈이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돈을 가진 자들이 더 힘이 세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결국 돈이 무엇인가? 종이다. 금속이다. 먹을 수도 없다. 종이는 열을 가하면 탄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갖다 붙인 의미를 제외하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본문 312쪽)

 

자본은 인간을 도구화, 상품화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일들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과거일 만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인 오늘에 더 가혹하게 일어난다. "민주주의는 금권정치, 즉 부자들의 통치에 기초한다"고 데릭 젠슨은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도 '노예' 전통을 이어갈 뿐이다. 과거보다 더 교묘하고, 잔인하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동자, 소비자는 자본이 목적하는 생산과 이윤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니 지구도 마찬가지다. 생산을 위하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 생산이 공동체보다 더 중요하고, 건강과 풍요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까지 생산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1984년 인도 보팔 시에서 일어났던 미국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물질이 배출돼 1만 명이 희생당하고 12만 명이 다친 사건을. 이 회사는 1930년대 웨스트버지니아 혹스네스트 터널을 뚫을 때 수백만 명이 죽었고, 공사 중 발생된 규산 분진으로 발생한 규폐증으로 죽은 이들이 764명이라는 사실을. 규폐증으로 죽은 이들이 흑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한 도급업자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이 검둥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다."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취급한 이들을 이토록 자본은 진짜 사람을 죽였다.

 

그 자본에는 유니언 카바이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초국적 기업 쉘은 아프리카에서 토착민 문화를 파괴하였고, 땅을 빼앗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목매단 제노사이드(Genocide)를 저질렀다. 카길, 엑손, 몬산토, 와이어하우저, 제너럴 일렉트릭, 타이슨, 맥삼 같은 대기업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이윤을 추구하면서 저지르는 잔학 행위는 나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데릭 젠슨은 말한다.

 

전쟁은 경제와 생산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다. 전쟁은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길이다. 전쟁을 통하여 자본은 그들 자신보다 더 귀중한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한다. 페르디난드 런드버그가 한 말을 데릭 젠슨은 이렇게 인용했다.

 

"전쟁 상황에서 비수처럼 핵심을 찌르는 물음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가 아니다. ……전쟁에서 누가 이익을 보느냐, 누구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느냐, 누가 이익을 지키느냐가 관건이다."(본문 367쪽)

 

그 돈이 과연 누구 주머니에 들어갈까? 자본, 부자들임을 잘 알고 있다. 부자와 자본을 배물리는 일을 위하여 국가는 언제나 '민주주의' '대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전쟁을 거짓된 진실로 만들어버린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만 일으킨 잔인한, 잔혹한 범죄가 아니다. 과거에도 존재했다. 히틀러는 잔인한, 잔혹한 증오를 만든 문명이 보여준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데릭 젠슨에 말은 가슴을 찌른다. "나치는 인간을 죽이고 있었고 지금 우리는 단지 지구를 죽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 루마니아인 등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우리가 야기하는 죽음은 모두 우리 경제 체제의 우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생산, 이익을 위하여 사람이 사람이 아닌 도구로 취급받으면서 죽었다. 인종 우월주의와 지배문화가 남긴 이 참혹한 증오범죄를 이제 우리는 끝내야 한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피부색이 다른 인종을 차별화하는 잔인한 범죄, 경제와 생산을 위한 인간의 물질화를 끝내야 한다.

 

"지배문화를 멈추게 못하면, 그것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죽일 것이다. 전부 죽일 수 없다면 죽일 수 있는 것은 다 죽일 것이다."(본문315쪽)

 

생명보다 생산을 높이는 것, 인간, 북극곰, 강, 산이라는 생명체보다 경제와 자본이익을 높이 평가하는, 개별 문화와 역사, 민족과 인종별로 다른 문명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흑인 남자, 중국인,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중국놈, 검둥이, 일본놈이라고 부르는, 여성 자체보다 여체를 담은 사진 자체를 더 중히 여기는 이 죽임과 증오만이 남아 있는 문화, 문명을 끝내야 한다.

 

그 방법은 증오문화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증오문화가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현실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정확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문제 해결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생산보다 생명을 위에 두고, 생명을 생산의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멈추게 하고, 생산을 위한 정복을 그만두는 것이며, 지구를 파괴에서 해방시키고, 마지막을 문명 제거라고 데릭 존슨은 말한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증오는 수억 년간의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들 각자를 키운, 우리의 틀을 만든 조건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 주입된 의문시된 적 없는 가정들의 결과다. 증오를 멈추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틀을 만드는 조건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맞다. 그게 바로 내 해법이다. 우리는 문명을 제거해야 한다." (본문 52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아이들 사계절 그림책
메리 윌리엄스 지음, 노성철 옮김, 그레고리 크리스 그림 / 사계절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는 우리에게는 생경한 지명이지만 유엔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분쟁지역이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취임 후 처음 방문한 지역이 '다르푸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르푸르는 평화의 땅이었다. '가랑이'는 작은 송아지를 돌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가랑이는 작은 송아지를 씻기고, 간호해주고, 풀밭과 샘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하나가 되었다. '살림'과 '평화'의 땅이었다.

 

이렇듯 살림과 사랑이 넘치는 평화의 땅인 다르푸르가 어느날 '죽임의 땅'이 되었다. 죽임이 난무하는 곳은 살림의 세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임의 땅을 뒤로하고 살림의 땅으로 떠난다. 그 중에 가랑이와 같은 아이들이 있었다.

죽임의 땅을 벗어나 살림의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걸었던 거리는 '1600km'나 되었다. 죽임을 경험했지만, 죽임이 뒤덮었지만 살림의 땅을 갈망하는 그들은 살림의 세상을 펼쳤다. 가랑이는 그 중심에 섰다. 아이들이 중심에 설 때 그들에게 죽임은 지배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만들었던 죽임의 땅이 서서히 살림의 땅, 살림 누리로 변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죽임의 장막은 쉽게 걷혀지지 않았다. 도처에 죽임의 세력들이 살림누리를 꿈꾸는 가랑이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숲에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군인들과 뜨거운 햇볕을 피해야 했으니까요. 또 나이 많은 아이들이 자기 몸을 돌볼 힘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맡아 돌보기로 했어요. 나는 우리 무리의 추티 볼이라는 아이를 맡기로 했습니다. 추티 볼은 겨우 다섯 살로 엄마를 찾으며 울곤 했어요." (본문 인용) 이 책은 페이지가 없음.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산다면 죽임의 잔치가 아니라 살림의 잔치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가랑이와 추티, 또 다른 아이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어른들이 이렇게 책을 쓰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은 걷고 걸어 에티오피아 난민 수용소에 정착한다. 톰 아저씨를 만나 밥을 먹고, 공부를 한다. 살림 누리를 찾아 떠난 아이들이 다시는 죽임의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배움이 필요했다. 그저 그대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랑이는 배움을 잊지 않았다. 배움이란 곧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내일 희망이 있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시 가랑이와 아이들에게 죽임의 기운이 드리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단 국경으로 쫓겨나면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많은 동무들을 잃는다. 하지만 가랑이는 좌절하지 않는다. 가랑이와 추티, 아이들이 마지막에 간곳은 케냐이다. 하지만 트럭을 탈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다. 추티만 트럭으로 간다. 나머지는 걸어서. 한 순간의 헤어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약속으로 헤어진다.

왜 어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지 못할까? 추티와 가랑이, 여타의 아이들처럼 하지 못할까? 트럭에 탈 수도 있고, 타지 않을 수도 있다. 못타면 걸어가면 된다. 하지만 어른들은 꼭 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른들의 세상은 죽임이 난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살림 누리를 스스로 만들어가는데 말이다.

"여러 주 뒤에 우리는 드디어 케냐에 있는 카쿠마라는 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수용소에는 사람들이 몇 천 명이나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추티를 찾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었습니다." (본문 인용)

그렇다. 살림누리를 찾은 가랑이는 추티를 찾는다. 살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무엇인지 안 것이다.

"나는 두렵지 않았어요.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기 위한 힘을 찾고야 말 테니까요. 나는 새로운 미래를 찾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아직 다르푸르는 평화의 땅, 살림의 땅이 아니다. 아직 죽임이 난무하고 있다. 20만명 이상이 생명을 놓았다. 수단 전 지역에 언제쯤 평화가 올 것인가? 가랑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죽임이 수단의 다르푸르를 뒤덮고 있다. 살림누리를 이루는 일은 이토록 힘든 것이다. 하지만 가야 한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충만해지는 다르푸르가 되는 그 날까지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꼭 읽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