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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샌드위치 - 서른살 경제학 유병률 기자가 뉴욕에서 보내온 컬처비즈에세이
유병률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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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테리아에서 더욱 진해지는 커피향을 천천히 음미하기, 카메라 둘러매고 자유로운 기차여행 떠나기..

그래도 가을이 허전하다면 이 책 '딜리셔스 샌드위치'를 맛보기 바란다.

'스티브 잡스는 알았고, 빌 게이츠는 몰랐다' .....? 도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몰랐다는 것인지 빌 게이츠가 들
으면 기분이라도 상할 아리송한 카피가 눈길을 끈다. 한동안 머리를 몹시도 쭈뼛거리게 하던 이 책은 문화에 의한 실로 적잖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문화가 우리의 저변 깊숙히 이토록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 조금 엉뚱한 얘기같지만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중 우리에게 익숙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젠 그 말을 '문화의, 문화에 의한, 문화를 위한 세계'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능동적이고 자각적인 문화홍수의 시대를 맞고 있다. 도대체 문화란 무엇이길래 수많은 사람들을 Culture의 실체 앞으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인터넷공간은 원더걸스의 텔미댄스가 잠깐 유행하다가 사라지거나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만 회자되는 곳이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수다나 떠는 공간 정도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중국에게 쫓기고 일본은 따라잡기 힘든 고약한 처지의 '샌드위치 한국'의 탈출구는 이 거대한 문화제국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입니다. 개인도 기업도 문화적 언어를 학습하고, 익숙해지고, 발전시켜야 합니다.문화적 언어는 이 거대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적 존재의 이미지를 담은 문화 제국주의의 해석이 사뭇 비장하고 진지해지는 대목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중국에 쫓기고 일본에 밀리는 실정을 억압되고 짓눌린 샌드위치에 비유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어진 생존환경에 따라 각 세대간에도 주관적 입장에 놓인 짓눌린 샌드위치세대가 존재한다. 그래서 이 책의 의미는 초라하게 쪼그라든 샌드위치가 아닌 맛있고 재미있는 딜리셔스함을 얻기 위한 바람들에 있다. 그 재료가 바로 문화(Culture)인 것이다.

 

"세계 기업들의 경쟁은 씨름판이 아닙니다. 몸싸움이 아니라 아이디어 싸움판이지요. 회사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라고는 고작해야 텁텁한 자판기커피 한 잔이나 비상계단에서 눈치보며 피우는 담배 한 대가 전부인 직원들이, 노천카페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웬지모르게 서글퍼지는 감정을 나만 느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왜 아니겠는가.. 수많은 직장인들의 엄연한 현실을 대변하는 이 글귀 앞에서 자신있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이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될지.. 아이디어 좋은 사람이 텁텁한 자판기커피와 눈치담배를 피우게 만드는 회사에 있을리도 만무하고. 여기 오붓한 노천카페에서 따스한 햇살 받으며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장본인은 다름아닌 스티브 잡스의 Apple과 최고의 검색엔진인 Google사의 직원들을 뜻한다. 언제부턴가 스티브 잡스를 매우 존경하게 된 계기도 그의 철학이 실적 운운하는 전형적 기업형 이미지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문화를 즐기고 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독특한 마인드 때문이다. 그들의 직원들을 위한 배려가 특별하다는 소식은 예전에 들어 알고 있지만 정말 특별함에서 한 술 더 뜬 각별한 무엇인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우리의 정서와 현실에서는 이런 팔자(?)를 재현하기가 쉽지않은 일이긴 하지만 부러운 것임엔 틀림없고 정작 명심해야 할 것은 '각별한 문화' 안에서 직원들 또한 독특한 마인드를 가지고 회사를 즐거운 놀이터삼듯 출근을 하고 일을 즐기면서 기업의 이미지와 위상을 격상시킨다는 사실이다. 비즈니스의 중심에 문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시켜 놓은 창안이야말로 컬처비즈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하는 문화적 마인드의 역할모델이다. 이 본보기에서 나오는 시너지는 세계경쟁의 중심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선도적인 역할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우리 나라의 기업들도 이를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며 앞장서주길 기대해본다. 

일 --> 아이디어 --> 크리에이티브 --> 문화적 마인드

 

인터넷스페이스에 자신만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UCC를 올리거나 자유로운 여론과 발언을 소통시킬 수 있는 오늘날의 웹2.0시대...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 문화의 중심 뉴욕을 통해 웹2.0의 문화적 마인드란 무엇인지, 현시대에 그것이 왜 필요한지, Creative를 유도하는 문화의 진정한 가치, 문화와 경제가 융합하는 컬처비즈를 통해 세계의 흐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진솔하고 흥미로운 느낌으로 문화의 키워드를 접해보시라!
 '앞으로는 문화적 (소통)능력이 경제적 능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문화와 친숙하지 않은 나에게 마음한켠의 부담을 주면서도 이미 새로운 눈을 뜨고 싶은 문화로의 열망을 재촉하는 의미인듯하여 지금부터라도 그 중심을 향해 차분히 한걸음씩 다가가고 싶어졌다. 문화에 대한 놀랍고 생생한 전언을 아끼지 않은 저자의 열의와 더불어 이 책을 보내어 읽게 해준 지인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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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
남재일 지음 / 시공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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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잘 것 없는 겉표지, 200여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두께. 가격이 좀 과한게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제목만큼은 책값을 지불하고자 하는 미묘함 같은 것이 있었나보다.

 편애의 관습이 떳떳한 자유로움을 발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당한 편애이고 균형을 지닌 아름다운 편애이다. 그러나 편애한다고 자유가 발벗고 따라붙는 것은 아닐테니 그만큼 치러야 할 댓가도 있을 것 같고 또한 누구나 편애의 방식을 통해 자유를 누리기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편애는 편견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열망과 현실성에 대한 극복을 동시 반향해야 할 성립구도를 지닌다. 그것은 자유를 향해 시대를 뛰어넘어야 할 벽 보다 높은 조준점을 향함으로서 자기만족의 시차를 극복하는 것이며 이를테면 재고의 여지없는 신념으로 무장이 된 강인한 관점이라 지목할 수 있다.

 여기, 편애를 통해 자기세계를 구축한 自由人 11인이 있다. 각 분야의 대표이자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로서 작가 김훈, 서영은, 장정일, 정치인 강금실, 영화인 이창동, 김기덕, 여성운동가 로리주희, 그외 일본작가 5人(무라카미 하루키, 시마다 마사히코, 무라카미 류, 마루야마 겐지)을 문화부 기자 남재일씨가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묶어놓은 책이다. 이들은 자기고집을 통한 세상살이의 여러 단면을 열정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시대와 자기성찰사이의 타협을 통해 얻은 철학과 소신으로 인간을 향한 편애의 방식, 세상을 향한 편견의 구애로서 내부 소통되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그 중 인상깊은 인물을 꼽자면 김훈, 강금실, 장정일이다.

 사실 김훈에 대한 관심이 쏠려 있다보니 그에 대한 관심만으로 이 책을 선뜻 집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섬세한 조각같은 이미지들이 문장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소통을 강렬히 호소하면서도 또한 실의에 빠지는 작가내면의 이중적 고뇌가 느껴지곤 했다. 그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소통불능을 호소하는 낙심의 궤변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와 문장에 대한 이해의 전반을 아우르는 편애주의자의 고독하고 치열한 감성의 초상을 드러낸다.

 예전 법무부장관 재임시절 대중적 새바람과 큰 인기를 한몸에 얻었던 강금실은 정치의 이면에 가려 잘 몰랐던 그녀의 인간적 모습들을 다시보게 만들었다. 정도가 있고 구김없는 개방적 마인드의 소유자로서 신뢰와 기품이 느껴졌다. 자기만의 위치에서 그 능력의 입지를 위해 지켜야 할 소임을 충실히 이끌어내는건 공과사 모두에 순수하게 투영된 강건함과 신조에 의한 바탕이었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호인으로서의 호감을 지닌 여성상이다. 문화를 즐기는 한사람으로서 춤을 좋아해 살풀이를 배우게 된 일화도 소개되고 있다. 

 이상하게 책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인물에만 관심가는 것이 장정일이다. 아무래도 문단의 이단으로 지목되는 파격적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독특하고 개성있는 입지를 만들고 있는 점 때문일 것인데 어짜피 호기심때문에 그의 책을 또 읽어보게 되겠지만 이래저래 그에 대한 편견들은 묘한 긴장과 기이함이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이제까지야 그랬다치더라도 이제그만 섹슈얼리티로 사고하는 관점에 집착되지만 않으면 좋겠다. 성적 욕망, 성적 행위, 성적 환상에 대한 美의 예술성은 이미 과거에 다 주조해 놓았는데 신선하게 재해석 해내지 못하면 그만큼 위험한 수위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의 사고와 상상력은 파격적이지만 그의 성은 문학적 예술성으로 회귀하지 못하니 그 생산적인 힘이 다른 소재로 전달된다면 좋은 작품들을 또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 책 속에서도 장정일이라는 인물은 참 독특하고 재미난 구석이 있다.

  이 외의 인물들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편애의 방식을 선택한 개개인들로서 자유로운 감성과 감각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자유주의자 11인의 단상은 독자의 참여 가능한 대화의 구심점으로서 신선한 삶의 체험들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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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ㅣ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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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발 끝에서 차분히 밀려오는 아늑한 두근거림을 맞으며.

하지만 갑자기 나는 알았다. 책의 제목만으로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이 침묵의 심연에서 나는 멀리 떠나고 싶은 감정으로 명백해졌고 한없이 망망한 감정의 파도에 실려 나의 왕국과도 같이 유혹하는 저 섬으로 노를 저었다.

멀리 멀리 일상적 삶을 벗어난 곳을 막연히 그리워하고 꿈꾸던.. 나날의 절치부심으로부터

달아나게 해달라고 간청한 바램이.

 

우리는 누구나 섬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이율배반적임에도.

섬은 일상의 헤어짐을 고하고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곳곳을 떠다니며 가슴속에 잠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을 그리는 것은 어찌보면 황홀을 찾아 멀리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 이전에, 소통에 대한 소원함과 불만에서 비롯되는 착시일지도 모른다.

섬의 어원이 그렇듯 외딴 곳에서의 내 존재가 격리되는 것을 예고하면서 소통의 그늘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숨막히는 해방감에 이율배반이다. 우리는 정신적 해방을 위해 간절해지는 섬의 환상 앞에서 육체적 피난처를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이는 모르겠으나 나의 고립감으로부터 찾게되는 외로운 모습은 그런 단면을 지니며 섬에 대해 갖기 쉬운 자만을 형상하곤 하니까.

 

 

카뮈와 김화영, 그리고 장 그르니에.. 프랑스문학의 신뢰를 확인시켜주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정신적인 면을 지향하며 그것의 휴양을 위한 여행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섬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발견하는 여행에 이르게 하고 오늘의 카뮈를 이끌어낸 스승으로서 지대한 사상의 영향을 내려준 것 이상으로 <섬>을 대하는 내 방황스런 내면의 공허함에 따사로운 빛 한줄기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줬다. 섬의 존재는 어떤 명답을 얻고자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지척의 발견에 대한 여지를 확인해 나가는 열정과도 같고, 이렇듯 무엇인가를 그리는 인생의 여행은 끝이 없는 지점을 향하여 무한히 그리게 되는 섬으로서의 의미와 맞닿아 있음과 같이 내 존재의 정신적 기품을 확인하게 만드는 그 정적인 영혼의 투명함이 대가다운 침착한 명상을 통해 이어져 온다. 페이지가 바람결 같이 느껴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책일 것임이 틀림없고 카뮈에게 고취된 나는 그를 가르친 장 그르니에를 내 스승의 한분으로 마주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또 다른 제자로서의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 마음이 되었다. 무엇인가 망연히 무의미하게 떠다니기만 하던 내 가슴의 건조한 섬에 난바다의 시원한 기류가 흐르는 느낌으로 나는 진실 앞에 환기되듯 기분이 너그러워진다. 이 책은 내 안의 섬을 찾도록 노력하며 사는 길을 일깨워 주고 있다. 

참으로 단정하고 아름답게.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p. 14  섬에 부쳐서 중  알베르 카뮈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무.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p. 16~7 글의 침묵 중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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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김씨를 위한 책 이야기
전사섭 지음 / 시공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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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하는 독서는 지향하는 독서와 구별된다. 행하는 독서는 일상을 하루하루 반복순환하듯이 주어진 활자의 수용범위를 자연스레 허용하는 것에 가까운 흐름의 순행인 반면, 지향하려는 독서는 편독의 룰을 지니는 독단적 취향이며 흐름에 역행하는 성질이 있다. 이 두가지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1인칭으로 규합하는 동시조건을 이룬다. 내가 빈틈없는 독서의 동시조건을 취하고 있다해도 타인의 독서는 나와 별개로 떨어진 독립적 형태의 규범을 지님으로서 동반자적이다. 그런 관계의 울타리를 인식하다보면 타인속의 나와 타자의 동시조건에 대한 규합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책을 위한 이야기거리의 소재로 시중엔 꽤 다양한 책들이 나와있는데 장충동 김씨를 위한 책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저자가 월간 PAPER에 매달 실었던 글을 한데 묶어놓은 이 책의 제목을 읽어보면 구수한 서민의 감정이 물씬 풍긴다. 장충동 김씨는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애칭이다. 전사섭이라는 저자는 누구라도 단번에 알아차릴만큼의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만의 열렬한 독서환경을 구축한 애서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류의 책 한두권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나와 다른 독서의 관행을 호기심으로 따라가보게 된다. 저자가 읽고 쌓아둔 책더미들은 빛나는 성탑처럼 거대해 보이며 그만큼의 양질적 독서를 구가하지 못한 일반 독자들의 시기를 건들이기에 충분한 부러움의 대상으로 남는다. 흔히 이런 책은 내가 무슨 책을 읽어 지금의 나를 이루어왔는지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자칫 신변잡기식의 단절감을 주는 책도 있는 반면에 장충동 김씨는 책과 절친하던지, 전혀 문외한이든지 편안한 만남이 가능한 개방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무엇을 위한 결론을 배제하고 과정의 친목을 위해 소박한 어조로 낮게 이야기한다. 그 친목의 시간에서 거론되는 책들의 발견은 새롭고 또 반갑다. 낯설지만 신선한 느낌이 발동하여 읽고 싶은 책이 있는 반면애 좋은 느낌으로 읽었던 책도 다시 재회되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신선한 책의 발견이라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와 레즐리 스티븐슨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가지 이론'이 있고 재회의 반가움이 있던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있다. 저자가 밝히는 독서의 의미는 책과 인생을 맞닥뜨린 중압감을 피하며 읽고자하는 재미를 우선순위로 시작해서 삶의 기쁨을 갖는 넉넉하고 자연스런 여행의 시점으로 책의 고유명사를 전달한다. 반드시 책을 읽어야만 교양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남다르게 시사하고 있으며 책을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의 말을 흘려 듣는 것처럼 가볍게 읽으면 부담없이 괜찮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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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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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야성의 반항과 보고

 

수많은 책들을 대하다보면 저자의 기이한 편력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독자의 인식을 통해 수용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갈등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독자를 시험에 들게하는 책으로 분류될듯 하다. 그리고 현실적인 잣대로 보면 선입견의 거친 돌멩이에 몇번이고 걸려 넘어질지도 모른다. 좀 더 심오하게 말해 나의 본질이 이쪽이냐 저쪽이냐 저울질하게 만드는 이 책의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굶기의 예술과도 같은 곧고 굳은 자기원칙론, 그 원칙은 자기우월론의 바탕앞에 당당하듯 마초증후군 환자의 느낌마저 풍긴다. 마루야마 겐지의 실제 인상과 이 책을 들여다보자면 그는 모질어도 한참 모진 인간임이 분명하다. 마초라는 것이 남성우월적이고 여성비하적인 성차별에서 오는 관념이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단정지을 순 없고 무엇보다 그의 내밀한 일상을 따라가보면 이해불가한 면들이 이해가능한 현실로 탈바꿈하기위해 얼마만큼의 극단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자칫 '이거 뭐 이래' 하던 불편한 감정들로 나는 그 진상의 이면앞에서 좌절할뻔 했으니. 나는 그가 이 세계의 야성(野性)처럼 느껴졌다.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불러들이는 초유의 자립성. 그 자립의 거친 숨결이 마루야마의 독단적 행위의 본질이다. 빗대어 말하건데 하루하루 격변하는 이 문명의 고도는 야성을 점점 상실해 간다. 야성이 사라질수록 자립 또한 힘든 것이리라. 인간 개개인의 자립이 타락해가는 사이의 틈을 비집은 현실은 문명의 고도화를 축적하는 눈부심과 편리함을 낳곤 있지만 이것은 존엄한 삶의 방편으로서 우리의 태생적 본질을 점점 망각시키게 되는 작동원리의 원칙아래 우리를 점점 나약하게 만드는 나날의 구속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은 하나의 뿌리박힌 근본처럼 되어 있고 문명은 나약한 인간의 표본 위에서 군림하는 막강의 새로운 근본이 되어버렸다. 과연, 문명은 진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 진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진실이란 말인가? 우리 삶의 울타리를 위해 건재하는듯한 그 진실의 실루엣 너머엔 마루야마가 극도로 질타혐오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불안처럼 드리워 있다. 허깨비의 진상속에서 나약한 인간들은, 강한 것인척 위장가능한 착각에 빠져 큰 소리치듯 현실의 이 광기어린 야성을 향해 혐오를 외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각자의 본질이 이도저도 아닌 중립에 있다면 저울질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다. 이것은 하나의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과의 공존. 인간의 의식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두고 미래에 협착되어갈 것인지 야성을 회복할 것인지의 문제가 놓인다. 불분명하고 아득한 의문의 시대에서, 독자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명분 앞에서, 마루야마의 체험들은 야성을 회복하려는 한마리 야수이다. 또한 그것은 자국 무사도 정신의 칼날처럼 더도 없이 날이 오똑하게 선 오만과 표독의 섬광을 지니고 있다. 그 자태를 지니고서 그의 체험들은 강하다 못해 타협조차 불사하고 있으며 우리는 과연 그가 왜 그러한 강직성을 띠는지 각자만이 지닌 의문의 칼을 꺼내어 갈아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은 야성을 회복하는 땅끝의 체험이다.  자기극복의 본질을 강하게 육화시키는 그 땅끝 너머에 마루야마의 행위에 대한 보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김훈은 마루야마가 이 책을 펴낸 것에 대해 작가의 자필적 입지를 두고 다소 가볍게 우려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다분히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평했을 것이라 본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자신의 펜대에서 직접 씌인 것이 아니라 제3자를 통해 전기나 평전으로 출간 되었더라면 그의 면모들은 섣부른 오해를 잠식시키며 더욱 근사한 풍모를 갖추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정작 마루야마 자신은 홀연한 원초적 바탕 아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다시 붙잡기 위해 이 책을 쓰고자 했던 필연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명한건 그 어떤 본질도 이 각오의 뜨거움을 막기엔 다소 역부족이라는 것. 이런 체험이 없는 그 누구도 그를 폄하하기엔 이르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도 편하지도 않은 묘한 감정은 현실적 기능 앞에서 낙조의 반영처럼 한순간 사그러드는 야성이지 않길 바라마지 않는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뭔가 설명이 부족한 이 사람. 작가를 넘어 인간으로.. 인간을 넘어 고독한 자연이 되려는.. 마루야마 겐지의 이 고집스런 영역을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까. 체험이 없는 땅 위에서, 체험하기를 거부하는 조류속에서 그의 고집은 피처럼 붉고 강하다. 질끈하는 마루야마의 외마디 각설들은 고독과 자유의 지면을 할애하여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연다. 가당치 않은 비판조로 그의 말들은 자칫 오해를 살만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형평성을 온전히 배제하여 중립에 놓는다면 부정적인 오해들은 줄고 긍정을 더욱 값지게 섭취하려는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 현실에 놓인 그 어느 우수한 규범이 아닌, 단지 원초적인 뜨거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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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일푼에다 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내던져져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젊은이들은, 정도나 모습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에는  강한 그 무엇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강함 이외의 모든 것은 임기응변이고 거짓이며 착각이고 도피가 아니겠는가. 강한 방향이란 고독이나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마침내 나약함을 배제하고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체득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강물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여주면 된다.

 만약 내가 '인간이 어떻게 살든 그건 당사자 마음이다'와 같은 범상한 잣대를 갖고 있었다면 펜을 쥘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토록 강압적으로 소리치는 까닭은 '내가 해냈는데 당신들이 못할 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젊음에 부여된 그칠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그만 쓰기로 한다. 할 말은 다 했다.나로서는 이것이 독자들을 위한 유일한 서비스였다. 동시에 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되었다.그러나 뒤돌아보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다. 나는 앞을 보고, 그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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