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야성의 반항과 보고

 

수많은 책들을 대하다보면 저자의 기이한 편력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독자의 인식을 통해 수용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갈등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독자를 시험에 들게하는 책으로 분류될듯 하다. 그리고 현실적인 잣대로 보면 선입견의 거친 돌멩이에 몇번이고 걸려 넘어질지도 모른다. 좀 더 심오하게 말해 나의 본질이 이쪽이냐 저쪽이냐 저울질하게 만드는 이 책의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굶기의 예술과도 같은 곧고 굳은 자기원칙론, 그 원칙은 자기우월론의 바탕앞에 당당하듯 마초증후군 환자의 느낌마저 풍긴다. 마루야마 겐지의 실제 인상과 이 책을 들여다보자면 그는 모질어도 한참 모진 인간임이 분명하다. 마초라는 것이 남성우월적이고 여성비하적인 성차별에서 오는 관념이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단정지을 순 없고 무엇보다 그의 내밀한 일상을 따라가보면 이해불가한 면들이 이해가능한 현실로 탈바꿈하기위해 얼마만큼의 극단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자칫 '이거 뭐 이래' 하던 불편한 감정들로 나는 그 진상의 이면앞에서 좌절할뻔 했으니. 나는 그가 이 세계의 야성(野性)처럼 느껴졌다.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불러들이는 초유의 자립성. 그 자립의 거친 숨결이 마루야마의 독단적 행위의 본질이다. 빗대어 말하건데 하루하루 격변하는 이 문명의 고도는 야성을 점점 상실해 간다. 야성이 사라질수록 자립 또한 힘든 것이리라. 인간 개개인의 자립이 타락해가는 사이의 틈을 비집은 현실은 문명의 고도화를 축적하는 눈부심과 편리함을 낳곤 있지만 이것은 존엄한 삶의 방편으로서 우리의 태생적 본질을 점점 망각시키게 되는 작동원리의 원칙아래 우리를 점점 나약하게 만드는 나날의 구속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은 하나의 뿌리박힌 근본처럼 되어 있고 문명은 나약한 인간의 표본 위에서 군림하는 막강의 새로운 근본이 되어버렸다. 과연, 문명은 진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 진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진실이란 말인가? 우리 삶의 울타리를 위해 건재하는듯한 그 진실의 실루엣 너머엔 마루야마가 극도로 질타혐오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불안처럼 드리워 있다. 허깨비의 진상속에서 나약한 인간들은, 강한 것인척 위장가능한 착각에 빠져 큰 소리치듯 현실의 이 광기어린 야성을 향해 혐오를 외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각자의 본질이 이도저도 아닌 중립에 있다면 저울질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다. 이것은 하나의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과의 공존. 인간의 의식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두고 미래에 협착되어갈 것인지 야성을 회복할 것인지의 문제가 놓인다. 불분명하고 아득한 의문의 시대에서, 독자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명분 앞에서, 마루야마의 체험들은 야성을 회복하려는 한마리 야수이다. 또한 그것은 자국 무사도 정신의 칼날처럼 더도 없이 날이 오똑하게 선 오만과 표독의 섬광을 지니고 있다. 그 자태를 지니고서 그의 체험들은 강하다 못해 타협조차 불사하고 있으며 우리는 과연 그가 왜 그러한 강직성을 띠는지 각자만이 지닌 의문의 칼을 꺼내어 갈아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은 야성을 회복하는 땅끝의 체험이다.  자기극복의 본질을 강하게 육화시키는 그 땅끝 너머에 마루야마의 행위에 대한 보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김훈은 마루야마가 이 책을 펴낸 것에 대해 작가의 자필적 입지를 두고 다소 가볍게 우려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다분히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평했을 것이라 본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자신의 펜대에서 직접 씌인 것이 아니라 제3자를 통해 전기나 평전으로 출간 되었더라면 그의 면모들은 섣부른 오해를 잠식시키며 더욱 근사한 풍모를 갖추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정작 마루야마 자신은 홀연한 원초적 바탕 아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다시 붙잡기 위해 이 책을 쓰고자 했던 필연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명한건 그 어떤 본질도 이 각오의 뜨거움을 막기엔 다소 역부족이라는 것. 이런 체험이 없는 그 누구도 그를 폄하하기엔 이르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도 편하지도 않은 묘한 감정은 현실적 기능 앞에서 낙조의 반영처럼 한순간 사그러드는 야성이지 않길 바라마지 않는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뭔가 설명이 부족한 이 사람. 작가를 넘어 인간으로.. 인간을 넘어 고독한 자연이 되려는.. 마루야마 겐지의 이 고집스런 영역을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까. 체험이 없는 땅 위에서, 체험하기를 거부하는 조류속에서 그의 고집은 피처럼 붉고 강하다. 질끈하는 마루야마의 외마디 각설들은 고독과 자유의 지면을 할애하여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연다. 가당치 않은 비판조로 그의 말들은 자칫 오해를 살만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형평성을 온전히 배제하여 중립에 놓는다면 부정적인 오해들은 줄고 긍정을 더욱 값지게 섭취하려는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 현실에 놓인 그 어느 우수한 규범이 아닌, 단지 원초적인 뜨거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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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일푼에다 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내던져져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젊은이들은, 정도나 모습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에는  강한 그 무엇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강함 이외의 모든 것은 임기응변이고 거짓이며 착각이고 도피가 아니겠는가. 강한 방향이란 고독이나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마침내 나약함을 배제하고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체득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강물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여주면 된다.

 만약 내가 '인간이 어떻게 살든 그건 당사자 마음이다'와 같은 범상한 잣대를 갖고 있었다면 펜을 쥘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토록 강압적으로 소리치는 까닭은 '내가 해냈는데 당신들이 못할 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젊음에 부여된 그칠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그만 쓰기로 한다. 할 말은 다 했다.나로서는 이것이 독자들을 위한 유일한 서비스였다. 동시에 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되었다.그러나 뒤돌아보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다. 나는 앞을 보고, 그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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