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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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빨래, 청소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여러 가사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머릿속 노동’,
즉, 가시적인 노동 이외의 ‘인지노동’을 누가 더 많이 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어떤 물건이 떨어져 가는지 체크하고,
아이들이 더 건강한 식사를 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일상의 계획을 세우는 일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생각과 판단, 계획을 저자는 ‘머릿속 노동’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내가 그동안 직접 행동하고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노동만을
가사노동으로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행지를 정하기 위해
여러 후보지를 찾아보고 정보를 비교한 뒤
“a, b, c 중 한 곳으로 가면 될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상대방은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겉으로는 함께 여행지를 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상당 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성 커플과 퀴어 커플을 포함한 172명의 커플을 심층 인터뷰하며
실제 가사노동이 어떻게 분담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여성의 노동 분담이 남성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 이유를 ‘성격 차이’로 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상대방이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 역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퀴어 커플 역시
한 사람에게 가사노동이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다만 이성 커플에 비해 그 격차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이 결과를 보면서 나는 가사분담의 차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성별보다 ‘성격의 차이’로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꼼꼼한가 가 아니라,
어떤 노동이 누구에게 자연스럽게 맡겨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또한 가사노동을 비교적 공평하게 분담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얼마나 많은 일을 분담하고 있느냐보다
자신의 바람과 실제 삶이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만족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됐다.

지금까지 나는 가사분담을 할 때 눈에 보이는 일들을 기준으로 생각해 왔다.
누가 설거지를 했는지, 누가 청소를 했는지를 세어보며
나름대로 공평하게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시각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시 바라보니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남편이 하지 않았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내가 맡아오면서도
그것을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양만으로 우리의 관계를 판단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바람과 실제 삶이 얼마나 일치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돌아보면,
나는 지금의 결혼생활에 꽤 높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물론 결혼 초반에는 자잘한 문제들로 싸우기도 했다.
남편이 쉽게 개선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마주할 때면 답답하기도 했고,
결국에는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간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때 내가 왜 불편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단순히 ‘남편이 이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떤 일을 누가 먼저 알아차리는지, 누가 기억하고 계획하는지,
누가 자연스럽게 책임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니
그동안 막연하게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우리 집의 가사분담은 공평한가?’라는 질문에서 끝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인지노동까지 바라보며,
각자의 상황과 바람에 맞게 어떻게 분담해 나갈 것인지 고민하게 했다.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를 단순히 숫자로 나누는 것보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노동까지 서로 인식하고 조율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내게 알려준 가장 중요한 것이자,
가사분담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느꼈던 불편함을 비로소 구체적인 언어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불편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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