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홍이
박경란 지음 / 하늘퍼블리싱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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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타고 내려온 아픔의 역사.
그리고 그 아픔을 끝마치기 위한 또 하나의 '안녕'


이야기는 3대에 걸쳐 대물림된 상처의 시간을 따라간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 징용, 한국 전쟁, 파독 간호사,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이 소설은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길게 관통한다.

일본인 순사에게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 홍이는 전쟁이 끝나기 전 간신히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기엔 그녀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 일본 군수공장에서 끌려갔다 돌아온 태구를 만나 서로의 상처를 위안 삼으며 살아가지만, 한국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홀로 딸 현자를 낳은 홍이는 침묵 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현자는 파독 간호사가 되어 독일로 떠나고, 현자의 딸 은수는 아빠의 죽음 이후 계모인 현자의 손에서 자란다. 그러나 은수는 뿌리를 알지 못한 채, 설명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 여자의 삶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시간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홍이라는 인물이 선택한 '침묵'이었다. 딸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과거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삶. 그 침묵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을지, 나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상처를 말하지 않는 것이 곧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홍이를 통해 더 분명해졌다.


"침묵했던 할머니들은 한참이 흐른 후에야 상처를 이야기했다. 상처가 치유되어서가 아니라, 상처를 안고 저무는 인생이 더 두려워서였다."(109p)

한 번 구겨진 종이는 다시 필 수 있어도 남은 주름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며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 이 아픔은 3대에 걸쳐 이어져야 했을까. 답 없는 질문을 되뇌는 사이, 이야기는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늘 홍이가 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인물, 모든 고통이 그녀를 향해 모이고 다시 흘러간다. 홍이의 삶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결국 한참을 멈춰 서야 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홍이라는 인물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상상하는 순간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그들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땅에서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이렇게 참 많은 상처를 품고 있다. 그 시간을 직접 겪지 않은 나는, 그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는 사실마저 마음을 무겁게 했다.

홍이들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새기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고통의 역사다.
그리고 이 소설이 건네는 '안녕'은, 이별이 아니라 끝내 잊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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