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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그녕 ㅣ marmmo fiction
류현재 지음 / 마름모 / 2026년 1월
평점 :
"내가 내 이름 백은영'을 '빼그녕'으로 쓴 건, 천재성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지만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자의 고뇌와 비애, 혹은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4p)
『빼그녕』은 일곱 살 소녀 빼그녕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은 이야기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시골 마을 송백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범상치 않은 소녀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빼그녕은 마을의 책을 혼자서 모두 읽고, 동네 초등학생 언니들의 숙제를 도와줄 만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천재 소녀다.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기억력은 그녀의 천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재능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송백리지만, 그 이면에는 어른들의 욕망과 권력 다툼, 그리고 노골적인 차별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세계를 빼그녕이라는 어린 소녀의 시선을 통해 드러낸다. 아이의 눈으로 포착된 어른들의 말과 행동은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섬뜩하다.
빼그녕 곁에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있다. 친구 춘입과 법학생 똘배, 그리고 신선이 된 할마까지. 비범한 아이의 주변에는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이들이 함께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잘 커야 돼. 넌 내 친구니까. 특별한 내 친구 빼그녕."(201p)
빼그녕의 친구 춘입은 마을 어른들에게 차별받는 인물이다. 마을의 법대생 청년을 따라 마을로 들어온 춘입 앞에서만큼은 빼그녕은 자신의 천재성을 숨기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선 우정을 나누며, 멸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이 소설은 '별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농촌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였기에 둘은 서로의 특별함을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빼그녕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들은 종종 웃음을 자아내지만, 웃음 뒤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아이의 눈으로 비춰진 어른들의 폭력과 이기심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으로 포장된 진실은 언제나 불편함을 남긴다.
『빼그녕』은 아이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깝다.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아이, 아이보다 더 미성숙한 어른들. 그 대비를 인식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