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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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항해에 나선 뒤 최악의 상황을 만난다면 십중팔구 죽을 것이므로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죽음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솔로 호를 잃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나는 결국 재기할 게 틀림없었다. 13p

지쳤을 때는 어머니와 같은 대지의 품을 필요로 하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은 바다인 셈이다. 34p

바다에는 품을 분노라는 게 아예 없다. (......) 바다는 그저 광활하고 위력적이며 냉담한 그대로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나는 냉엄한 바다나 그 앞에서 너무도 미약한 내 존재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항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바다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뼈에 사무치게 일깨워준다. 45p

구명선에서 살다보면 좋은 날씨를 즐길 수만은 없다. 편안하고 느긋한 휴식도 불가능하다. 나쁜가 아니면 더 나쁜가, 불편한가 아니면 더 불편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09~110p

(......) 요즘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인간은 작은 고통 하나에도 연약해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이란 (......) 제 삶을 좌자우지한다고 우리는 모두 믿고 싶어한다. (......)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났다. 그게 사실이라 믿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다. 122p

이 책은 저자 스티븐 캘러핸의 76일간의 생존의 기록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기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매일매일의) 생존을 위한 희망의 투쟁기,라기보다는 유머와, 그리고 좌절하는 법, 기다리는 법이다.
표류한 지 76일, 눈앞엔 푸른 물 대신 초록의 육지가 보이고, 만새기떼를 잡기 위해 다가온 어선들마저 바로 코앞이다. 그러나 캘러핸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그들에게 소리친다.

"아니, 나는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물고기를 잡아요, 물고기! 여기 물고기가 많다니까. 잡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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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3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3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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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한마디로 "그때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내가 알고 있는(/알지 못하는) '그때' '그곳에서는(/그리고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누가 어떤 일을)' '있었나(/해냈는가/저질렀는가)'...

단 오 분, 늘 온몸을 전율케 했던 영상은 삼백여 페이지의 책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앞의 두 권 역시 더없이 훌륭했지만, 이번 권은, 더이상 훌륭할 수는 없다, 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을 왜 눈으로, 머리로 읽지 말고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지는 이 책의 프롤로그만 읽어보아도 이미 충분히 짐잘할 수 있다.
지금의 이 순간을,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 스스로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감동과 유머보다 앞선 감정, 그리고 더 오래가는 감정은 반성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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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
데이비드 리프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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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에드가 키네 가로수 길로 난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시몬느 드 보봐르의 무덤이 있고, 정중앙 길을 따라가면 어머니가 묻힌 구역이 나온다. 새뮤얼 베케트의 유해를 덮고 있는 수수한 잿빛 화강암 석판에서 백미터 거리에, 광택 나는 검은 석판 아래 한때 미국의 작가였고 1933년부터 2004년까지 살았던 수전 손택의 방부처리된 유해가 누워 있다. 어머니의 친구였던 작가 에밀 시오랑의 무덤이 그 맞은편 약 이백미터 거리에 있다. 사르트르, 레몽 아롱, 그리고 저 유명한 보들레르도 그곳에 묻혀 있다.

여기저기서 짜깁기된 인용문이 아니라, 완결된 수전 손택의 글을 처음 본 것은, 2001년 10월이었다. 9.11 테러가 있은 바로 다음달 초, 어찌어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처음 갔었고, 전시장 입구마다 경비가 삼엄했다. 미국관에 한번 들어가기 위해선 매번 가방검사에 몸수색까지 받아야 했다. 베레모를 쓰고 장총을 세워든 미군을 세계적 규모의 도서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때가 때인지라 (당연히--그때 난 아직은 세상물정 모르는 이십대였다) 조금은 두려운 일이었다. 
일단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더이상 눈에 띄지(는) 않았으므로, 온갖 종류의, 세계 각국의 책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으로 흥분되고 설레던 일주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10월의 독일 하늘이었고, 전시장 밖에는 무표정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전 세계가 아직은 한달 전의 '그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뉴욕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던 그 비현실적인 버섯구름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Dienstag 11. September 2001>. 토니 모리슨, 폴 오스터, 주제 사라마구, 존 업다이크, 수전 손택... 등 이십여 명 필자들의 9.11 사태 직후의 기고문들 중에서도 "슬퍼는 하되 바보가 되지는 말자"며 미국의 반이성적 태도를 꾸짖는 수전 손택의 짧은 글은 빛났다.  

2004년 12월 28일, 이 아름다운 반백의 여인은 눈을 감았다. 이미 열여섯 살에 "언젠가 내가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썼던 그녀가, 아직 쓰지 못한 글을 쓸 시간이 필요하다고, 살면서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너무 많이 했으니, 이제 드디어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혈액암 선고를 받은 그해 3월, 일흔한 살 때였다. 이 책은, 언제나 진실을 향한 갈증으로 목말랐던 이, '살아 있음'을 탐닉했던 이에 대한 마지막 몇 개월간의 기억의 기록이다.(저자는 수전 손택이 죽고 나서도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책을 썼다.)

수전 손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녀의 글은 단호하고 아름다웠다. 이 책을 보며 다시 한번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였는가, 생각하게 된다. 삶에 대한 단순한 애착, 갈망, 그리고 낙관적인 희망만이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나는 두려움이 얼마나 대단했을까를 감히 상상해보게 된다.

"명랑하라. 그리고 감정에 휘말리지 말라. 차분하라. (...) 슬픔의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는 날개를 펴라."

아직, 그대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전 손택 홈페이지 http://www.susansont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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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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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산스크리트어에 릴라lila라는 것이 있다. 논다는 뜻이다. 창조와 파괴, 그리고 재창조가 이어지는 놀이, 우주를 열고 닫는 놀이, 성스러운 놀이다. 자유롭고도 심오한 릴라는 기쁘게 즐기는 것인 동시에 신이라는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이다. 이는 또한 사랑을 의미한다. (...) 릴라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우주를 열고 닫는 놀이"라니, 이 책을 읽는 즐거움과 커다란 수확은, 이 구절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도 싶다. 사실, 제목만으로도 이미,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바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창조력의 선결조건들은 놀이, 사랑, 집중, 연습, 기술, 한계의 힘 사용하기, 실수의 힘 사용하기, 위험,포기, 인내, 용기, 그리고 신뢰다. 창조력은 반대방향의 힘들이 이루는 조화다.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슴은 안다. 어쩔 수 없이 위험부담으로 가득한 창조적인 삶은, 멋진 놀이인 동시에 놀이와는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아마도, 놀이의 즐거움을 상상하고 즐기기보다는 그 반대편의 두려움에 대한 걱정이 늘 앞섰던 것일까. 얼마 전부터 생각하곤 한다. 다시 태어나면 꼭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이 되어야지... 음악에, 바람에, 내 안의 어떤 목소리에 온 맘과 온 몸을 내맡길 수 있는 사람.

또하나의 정말 중요한(?) 구절.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응답하는 법을 배워왔지만 그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바람에 멋진 경험을 놓치는 일이 지금도 종종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중요한 무언가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이다.

자,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일단은 작은 것들부터.
걷는 대신 깡총깡총 뛰어보기, 지름길 대신 경치 좋은 길을 택하기, (억지로 마시는) 맛없는 야채주스보다는 더더더 많은 향기로운 커피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을 (제대로) 즐기기.
그리고, 직관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매순간-실은 너무도 많은-, 그 순간들을 용서할 줄 알기.

* 최근 이런저런 일들로, "아름다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책에서 발견한 이런 구절. 역시, 아름다운 것, 이 최고다.
"아름다움은 진실이다. 진실한 아름다움은 지상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것,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_John Keats

* 이 책에서 또하나 재밌는 것이, 에로스-자아의 확장을 이끄는-의 문제. 이것은 다음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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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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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예순의 김훈 선생에게 이런 탄식(?)을 하게 만들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려나.
하지만 내가 읽은 이 책은, 앙드레 고르의 뒤늦은 (여자인) 아내에 대한 고백이기 이전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고뇌, 글쓰기 작업 그 자체(혹은 그 고충)에 대한 것이 먼저였다.
그 다음이, (한 여자로서의 아내가 아니라) '글쓰는 사람의 동반자'인 아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 

난 그때 존재론적 위계질서에 따라 타인과의 개인적 관계를 구분하는 논문의 제2권을 쓰고 있었습니다. 내게는 사랑의 문제가 특히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사랑을 받거 싶어하는지, 왜 다른 사람은 안 되는지 그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가 하고 있던 사랑의 체험 속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랑의 기반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말하곤 했지요.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살고 있다고. 또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홀로 되어 밤이고 낮이고 어느 때건 메모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펜을 내려놓은 다음에라도 글쓰는 작업은 계속되며 밥 먹다가도 이야기하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갑작스레 그 작업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 홍수같이 넘쳐흐르다 단단한 결정結晶이 되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단어들, 끊임없이 단련되는 문장의 조각들, 암호나 상징으로 기억 속에 고정시키지 못하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어렴풋한 생각들.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글 쓴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지요. "그러니 어서 써요!"

글 쓰는 사람의 첫째 목적은 그가 쓰는 글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쓴다는 행위입니다.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라져서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문학적 구상의 소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루는 '주제'는 그 다음에야 제기되는 것입니다. (.....)

실존을 거부하면서 실존에 대해 쓰다보니, 문학은 나를 실존에 이르게 해주었습니다. (......) 책은 처음에는 예견치 못한 여러 가능성과, 타인들과의 관계에 나를 대면케 하면서 점점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 글쓰는 활동은 물질적 현실의 무게와 타인 앞에 나서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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