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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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좋다고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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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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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하고 싶은 책... 여덟 권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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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추함
김용옥 / 통나무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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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잃어버려 다시 샀다ㅠㅠ 그래도 이정도 가격에 그것도 도올의 책이라면 이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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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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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고릴라

이 책은 1969년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전공투가 벌인 토론(1)과 그 토론의 참여자들이 (물론 토론이 있었던 이듬해 할복자결한 미시마 유키오를 빼고) 2000년에 만나 나눈 후일담(2)을 묶고 있다. 미시마와 동경대전공투는 폭력, 해방구, 정치와 문학 그리고 천황에 관하여 논하였다. 토론을 시작하면서 미시마는 남자가 한 번 문을 나서면 일곱 명의 적을 만[나는데] 오늘은 도저히 일곱 명 정도가 아닐 것 같아서 엄청난 기개"를 가지고 토론회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토론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 중에는 "미시마를 '두들겨 패버리는 모임'"으로 알고 온 학생(전공투 E)도 있었다고 한다. '엄청난 기개'를 가지고 이들을 찾았다는 미시마의 말이 분명 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공투는 전학련공[동]투[쟁]의 줄임말이다. 1968년에서 1969년에 걸쳐 대학생들이 조직한 자발적 운동체로 특정한 지도부나 투쟁의 방향성도 없는 '비정파 급진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해방구를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창출코자 했다. 동경대전공투의 문제의식은 조금 더 심각했다. 왜냐하면 “동경대학은 근대 일본을 틀지어온 참모본부였고, 베트남과 제3세계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하위 관료 양성소”(옮긴이 서문 중)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들이 부정하고 투쟁하려 했던 대상은 제국주의를 추구했던 과거의 일본이었으며, 여전히 제국적 야욕이 남아 있는 현재의 일본’이었다. 결국 이들이 부정하려 했던 것은 철저한 자기자신이었다.

토론을 주최한 전공투 학생(전공투 A)들은 미시마를 '근대 고릴라'로 칭하였다. 미시마는 토론회장 입구에서 자신을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유인물과 <<엽은인간>>에서 뽑아낸 인용문이 여기저기 풍자적으로 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그걸 보고 웃는 것을 보며 많은 학생들이 이중삼중으로 나를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고 미시마는 전한다. 학생들은 하필이면 미시마를 고릴라로 묘사했던 것일까. 미시마는 1967년에 자위대에 체험 입대하였고, 1968년에는 자위대에 함께 입대한 동지들과 방패의 모임을 결성하여 폭력의 필요성과 그것의 사용을 역설하였다. 그러한 미시마였으니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무식하고 폭력적인 우파, 즉 근대 고릴라로 비쳐지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부정하고 싶었던 동경대전공투에게 미시마는 부정의 대상을 넘어 불쌍하기까지 한 인간이었다.

 

전공투 C: 근데 그렇잖아요. 당신은 그래서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미시마: 안 넘어서도 되지. 나는 일본인이고,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죽는다. 이걸로 족한 거야. 그 한계를 나는 전혀 벗어나고 싶지 않아. 뭐 그래서 당신이 볼 때는 불쌍하게 보이겠지만 말이야.

전공투 C: 응,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경우에는. 

 

미시마가 전후 일본의 나약함에서 벗어나 힘센 고릴라를 동경했다면, 동경대전공투는 일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무엇이 되려 했던 것일까. 더 물어야 할 것은, 왜 전공투는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는가, 왜 미시마는 일본인으로 남고자 했는가, 이다. 일본인으로 남고자 했다는 이유로, 천황옹호자라는 이유로 미시마를 우익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미시마의 천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천황이 아니다. 미시마의 천황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이 토론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의 국가관에 대한 토론, 그것도 급진적 사상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의 토론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극우 미시마가 아닌 또 다른 미시마의 모습을 발견게 될 것이다. 이 발견에는 전공투도 예외일 수 없다.

 

미시마의 짜증

전공투는 자기부정을 통해 현재의 일본을 새롭게 창출하려는 전후세대의 고민의 집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일본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 이 학생들은 자신들의 내면이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일본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권력작용에 대해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비판의 초점은 여기다. 이들은 순수한 평화와 경건함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내면이 이러한 자기부정을 촉발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서 출발한 전공투는 터무니없는 방법론으로 현실을 구축하려 한다.

 

전공투 D: ……현실에 모든 것을 내건다면, 즉 진정하게 현실 속에 선다면, 그것이 하나의 모순적 구조를 갖는 한 자기 부정적으로 현실이 미래를 밝혀주는 그런 미래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 이것은 미시마 씨가 말한 젤리 상태의 미래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우리 자신이 목적의식적인 하나의 사건, 또는 변증법적인 시간을 가지며, 그러한 시간이 현실의 자기 부정적인 초월적 시간으로 전체화되는 구조를 갖기 때문에 우리에게 미래가 될 수 있겠죠. 그런 겁니다.

 

"현실에 모든 것을 내"걸고 "진정하게 현실 속에 선다"는 것, 그런 경건함과 비장함,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새로운 버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미시마는 이러한 전공투의 태도에서 전후 평화주의의 짜증나게 하는 전후 시민주의적 풍조[와] 가짜 시민주의를 읽어내고 있다.

미시마는 이 세계가 일종의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게임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표면 현상 혹은 강렬도에 상응한다.) 그러한 게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실체가 아닌 환영일 뿐이다. 그러한 환영이 타자를 창출한다. 그래서 미시마는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았다]"고 했다. "적으로 삼[았다]"는 말은 공산주의가 자신의 신념과 대치하는 필연적인 적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말이다. 그는 단지 게임에 뛰어들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환영을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우파적 태도 역시 가면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게임의 속성과 규칙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게임은 언제든 파국으로 치닿을 수 있고, 환영은 언제든 새로운 형태로 변모할 수 있다. 미시마는 이 위태롭고 나약한 세계를 지각하지 못한 채 안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릴라처럼 무식하게 저돌적으로 부딪침으로써 경종을 울리려고 했다. 그 울림 속에서 사람들은 세계의 위태로움을 깨닫고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미시마는 전공투 역시 "체제의 눈 속에서 불안을 보려는 자"들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전공투의 '자기부정'은 자기가 아닌 외부를 향해 있으며, 그 외부를 흉내 내고, 그 외부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식이라면 자기부정이 이뤄지지 않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사람들 앞에서 밖에 행해질 수 없는 전공투의 과시적 제스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놀이, 진실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전공투가 이것이 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진실인 양 엄숙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제군들은 항상 일루전을 가져야 합니다."라는 말 속에는 전공투가 만들어낸 해방구 역시 환영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미시마는 이러한 삶의 속성을 "캐치하지 못하면 제군도 성공하지 못하고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전공투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진실놀이에 빠져 그것이 진실인 양 착각하고 있다. 미시마는 이러한 학생들 앞에서 슬펐으리라. 그가 울었다면 그 울음은 고릴라의 울음처럼 컸을 것이다. 울 수 없는 그는 아무래도 참담했으리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러한 미시마의 참담함이다.

 

배설

토론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유를 배설함으로써 이 토론을 더럽혔다. 미시마가 <토론을 마치고>에서 언급한 방뇨에 대한 사유는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어 토론장 입구에서 교복을 입은 사회자를 만나서 화장실에 좀 가자고 했으나 강당에는 없어서 낙서투성이인 다른 건물 화장실에 다녀왔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해방구와 소변은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해방구에서는 학생들이 노상 방뇨를 했다고 한다. 해방된 인간의 감정과 소변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실제 패널 토론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요의를 느낀 학생들은 때때로 강단 위로 뛰어올라와 뒤쪽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왜 저러지 하고 궁금했는데, 화장실에, 아니 노상 방뇨하러 간 것이었다. 또한 토론회 도중에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뭔가 폭력적인 행위였던 것이 아니라 만원인 강당에서 화장실 갈 길을 못 찾아서 참지 못해 창문을 깨고 탈출한 학생의 행위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해방구의 지저분함은 인간 본능의 해방이 가져오는 배설 행위라는 가장 직선적인 행위와의 관련 속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람은 정신만의 해방만으로는 모자라서 즉각 육체의 해방을 요구하는데, 그때 육체의 해방이 가장 단적인 행위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게다가 단순한 배설 행위가 벌써 경범죄법 위반이라는 반체제 위법 행위로 전환된다는 사실.

 

이 학생들의 배설은 육체를 비집고 나오려는 오줌보다 못한 배설이었다. 미시마는 시종일관 이 학생들의 얇고 설익은 사유를 조롱한다. 조롱이긴 해도 온몸으로 육박해 오는 그런 종류의 조롱이다. 학생들은 이 조롱을 머리로 맞받아 치려한다. 하지만 미시마라는 육체의 현실성 앞에서 학생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초한다. 미시마는 쐐기를 박듯 천황이라는 철퇴를 내려친다. 학생들은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을 쳐다보는 돌중처럼, 철퇴는 신경도 안 쓰고 천황이라는 말에 개떼처럼 몰려든다. ‘천황이라는 말 속에 미시마의 얕은 사유와 모든 약점이 다 뭉쳐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학생들은 이 말만 물어뜯는다. 하지만 미시마에게 천황은 그의 가장 강한 무기이자 동시에 전투 원리다. 그 표면만을 물고 있으니 천황이란 말 너머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미시마를 이해할 수 없고, 토론은 지난해진다. 그들이 물고 늘어진 미시마의 검은 티셔츠에 그들의 허연 침이 배어나온다그리하여 토론은 또 다시 더럽혀진다. (이 책의 2부를 읽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이 토론을 더럽고 역겹게 만들고서는 뭐 대단한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떠드는 저들이 거울처럼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면 미시마의 '천황'은 무엇인가?

 

미시마의 '천황'

니체는 신()을 인간의 발명품으로 보았다. 강자(强者)에게 신이란 자신을 보여주고 자신의 죄를 떠맡기고 싶어 하는 힘의 표현이다. 신이란 그저 강자의 힘자랑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강자가 아닌 위버멘쉬(Übermensh)이고자 했던 니체에게 신은 필요 없었다.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버멘쉬는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표면 현상 혹은 강렬도에 몸을 맡기는 자다. 즉 진실놀이를 놀이로 간파하고 그 속에서 유영하는 자다. 거기에는 절대적 가치나 목적도 없다. 더욱이 인간도 없다. 그러니 철저한 허무주의며 철저한 유희다.  

전공투 C’의 논지를 알아들을 수 있게 다듬으면 이 정도다. 토론에 참여한 전공투 학생 중 전공투 C’는 그나마 자신의 논리를 개진할 줄 아는 얼치기였다. 하지만 그럼 피라미드는 만들 수 없겠네?”와 같은 말이 현재만을 긍정하는 자신의 논리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미래를 향한 현재의 축적을 주장함으로써 또 다시 헤겔적 사유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결국 전공투 C’ (자신이 말한 그런) ‘놈팡이’, 그것도 얼치기 '놈팡이'에 지나지 않았다.  

니체와 달리 미시마는 실체로서의 신이 필요했다. 진실로 천황이 필요했다. 그는 <토론을 마치고>에서 '천황'이란, 실체가 당위를 추동하며 다시 당위가 실체의 변혁을 촉진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자면 천황은 일종의 신전 같은 것이다. 신을 위하여 신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신전을 지어놓으면 이 텅 빈 신전 속에 비로소 신이 머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시마가 하이데거의 논리 속에 끼워 맞춘 '천황'에 지나지 않는다. 

미시마의 말들을 돌아볼 때 그의 '천황'은 니체가 말한 강자의 신에 가까워 보인다. 미시마는 (세계에 이름 부치길 거부하고 표면 현상 속에서 유희하는 위버멘쉬가 아니라) 강렬도 혹은 표면현상에 휩쓸리지만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참여하여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공간을 창출하는 강자이길 원했다. 미시마는 세계가 진실놀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놀이 위로 돌출하는 (현실의) 사물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물을 부여잡을 때 놀이라는 장막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시마는 그러한 지난한 투쟁을 지켜볼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그 신이 자신을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투쟁은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투쟁을 자기 자신이 지켜 볼 수도 있겠으나, 신이 쳐다본다면, 그것도 분명한 육체를 가진 신이 현실의 편에서 자신을 쳐다봐 준다면 이 싸움은 도무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미시마는 단지 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그 아득한 느낌이 만들어내는 황홀경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이런 곳(단상 위 의자)에 폐하가 앉아 계시면서 세 시간 동안 전혀 미동도 없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세 시간 동안 목석처럼 전혀 미동도 안 하셨습니다. 졸업식에서 말입니다. 나는 그런 천황으로부터 시계를 받았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은고가 있는 거죠.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묵묵히 쳐다봐줄 수 있는 사람, 더욱이 그 사람이 '천황'이라면, 자신의 영광은 얼마나 거룩하겠는가. 천황역시 한낱 진실놀이에 의해 창출된 환영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실체로 존재할 때 그것은 진실놀이로 돌출하는 현실이 된다. 즉 당위가 실체를 추동하고 다시 실체가 당위를 추동한다. 이것은 순환구조처럼 보이지만 비순환적이다. 왜냐하면 천황이 돌출할 때, 그 돌연한 출현 앞에서 그 이전의 것들은 효과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천황'이 일본 국민 개개인의 삶을 가끔씩이라도 바라봐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할 수 없는 것도 성공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인이고서도 일본인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이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재를 살아갈 가능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앵포르멜한 젤리 상태의 미래에 의지하지 않고도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2차 대전 말기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인간폭탄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천황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시마는 이 부정적 힘을 발하는 천황을 거부하고 문화적 '천황'을 주창했다. 이 '천황'은 인간이 가진 긍정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자다. 미시마는 이러한 '천황'을 순진하도록 철저히 믿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러한 미시마의 순진함이다. 미시마는 이 장난 같은 순진한 믿음에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그 순진한 믿음을 "어떻게든 유효성으로 만들"고자 했다. 미시마의 할복은 일종의 장난 같은 세계에 맞서는 미시마식의 장난이었다. 장난이었으되 결코 장난일 수 없는, 기필코 놀이를 뚫고 비집고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놀이 속으로 돌출하는 사물을 실연하였다. 즉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천황'의 출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여덟 명의 토론자 중 미시마를 유일하게 이해한 토론자는 미시마를 때려 주고 싶어서 왔다는 전공투 E’였다. , , ! 흥분해서 막말하면 바보 된다, ! 미시마 유키오한테 천황은…… 결국 자기 작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전공투 E’는 미시마가 생각하는 천황을 미시마의 작품이나 초월적 시간과 같은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미시마가 실체로서의 천황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차이를 빼면 그는 미시마를 가장 잘 이해하는 토론자였다.

 

남은 말

'전공투 E'는 다른 토론자들과 성격이 다른 것 같다. 전공투 A, C, H는 조금씩 서로를 알고 있는 듯 하며, 있으나마나한 전공투 B, D, F, G들과도 서로 친분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전공투 E'는 이들과는 전혀 초면인 것 같다. 이 책의 2부에 참여한 전공투 A, C, H는 자신들을 찬양하기에 급급할 뿐 '전공투 E'가 쌓아올린 공적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동경대전공투' 전체를 대표하고 싶어하는 전공투 A, C, H의 정치가 이 책의 2부에 녹아 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2부를 읽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전공투 A, C, H일 뿐이지 '동경대전공투' 전체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미시마유키오 대 전공투 A, C, H>>여야 한다.

이 책은 친절하지 않다. 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에 대한 정보가 실리고 그들이 왜 2부의 대담에 참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친절이 전공투 A, C, H에게서 기인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동경대전공투' 전체를 소유하려는 이들의 '정치'가 이 책의 2부에 드러나는 것 같아 역겹다. 이들의 정치 때문에 미시마 유키오도 '동경대전공투'도 또 다시 더럽혀진 것 같아 슬프다. 그러니 죽을 수 있을 때는 죽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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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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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서 읽어야 할 책이 한 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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