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 윤대녕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1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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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시를 통과한 소설’(신형철)이라 부를 만하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169).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던 것이다.(175)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져요?(192)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194)

 

빛의 걸음걸이에서 따온 문장들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179)와 같은 문장은 여동생이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했는지를 단 한 문장으로 각인시킨다. 최소한의 언어로 어떤 사건 전체를 강렬하게 꿰뚫어버린다. 시가 함축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시의 무기인 이미지를 윤대녕은 시인만큼이나 잘 다룰 줄 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입양되는 아이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고아처럼 동생은 결혼을 해버렸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동생이 가진 절망은 무엇인가, 어쩌다 그런 질량의 절망을 가지게 된 것일까. ''는 난데없이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175)다고 말하는 것일까? ''와 여동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 말할 때 비로소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에 그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의 지향점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빛의 걸음걸이는 빛이 응집된 하나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응축된 빛을 풀쳐내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 빛이 닿아 따사로운 자리와 그렇지 않은 어둡고 거친 과거까지를 '맨발'로 오간다제일 먼저 '' 찾은 곳은 해바라기밭이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어느 여름날 누나와 여동생과 자신을 한 줄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일이 있다.

 

안 그래도 빛에 그을려 시커먼데다 렌즈에 익숙지 않아 저마다 찡그린 얼굴들을 하고 있어 우리는 마치 유엔식량가구에서 각국에 배포하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처럼 나왔다(165~166).

 

그런데 이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나나 여동생이 가져갔을 것인데 는 그 사람이 여동생임을 확신한다. “해바라기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194) 동생은 그 사진을 가져가 자신의 사진첩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 사진을 가져갔던 것일까? 동생은 와 어느 여름날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춘 일이 있었다. 그 불가해하며 불가능한 사랑을 여동생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가 인도네시아의 수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끈 달린 하얀 신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얀 신은 자연스럽게 흰 운동화만 세 켤레인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던여동생을 떠올리게 한다. 기실 가 좋아했던 것은 수전이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와 같은 문장은 근친성애를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치명적이다. 윤대녕 소설의 아름다움은 이런 파격적인 충격을 감추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른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 라는 비평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대녕 소설이 아름답다 혹은 시와 같다, 라는 찬사는 어쩌면 윤대녕의 소설은 그 아름다움이 전부다, 와 같은 언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좀처럼 잘못 읽기 어려운 작품(황현경)이란 이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윤대녕의 소설은 잘못 읽힐필요가 있다. 반달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는 친구와 함께 새우잡이 배에서 며칠을 보내고 한가해진 어느 날 술을 마시게 된다. 열흘 만에 마시는 술도 술이려니와 그날 밤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하늘에 떠 있는 반달과 바다에 떠 있는 배의 경계가 뒤섞여 마치 배가 아니라 반달에 드러누워 있는 느낌이 들만큼 고요했다.

 

하얀 달 위에 우리 둘만이 외롭게 남아 있군. 달은 원래 이렇게 적막한 세계인가보이. 안 그런가?”(71)

 

그런 친구의 말을 신호로 둘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성교를 하게 된다. 반달역시 불가해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동성성애가 하나의 현상일 수도 있으니 이를 두고 불가해하다느니 불가능하다느니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성교의 대상이 동성 친구이긴 하지만, 친구 대신 나의 어머니를 기입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반달이 있던 밤은 어머니와 가 왕새우 소금구이를 먹기 위해 들렀던 한 마을에서 이미 체험했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던가.마을 사람들도 이 모자의 관계를 연인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근디 사내 쪽이 행결 젊구먼. 족히 이모뻘은 돼 보이지 않어.”(52)

윤대녕은 동성간의 성교를 넘어 모자간의 성교도 가능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윤대녕의 말을 빌리자면 우주의 순수한 허기때문이다이것이 그의 소설이 가진 비밀의 핵심일 것이다. 윤대녕은 아름다움을 밀어붙여 아름다움을 초과하는 지점까지 몰아간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친여동생, 동성인 남자, 여기까진 그러려니 해도 친어머니와의 성교는 인간의 상식 수준을 초과한다. 아무리 불가능한 사랑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일진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이것이 윤대녕의 전략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불가해한 지점'까지, 그리하여 아름다움이 아닐 수도 있는 지점,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닌 지점까지 밀고나가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되묻는 일, 이것이 윤대녕의 지향점일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윤대녕은 이러한 불가해한 신비에 매몰되는 법은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러한 비의를 풀려고 나아갔던 많은 예술가들은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낯선 곳에 부유하지 않았던가)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공허했던 밤에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순수한 허기를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적은 후 작가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런데 그것이 정녕 사랑이었을까?”(72)라고 되묻고 있다. ‘정녕 사랑이라고 적긴 하였지만, 여기에는 인간의라는 말이 빠져 있을 것이다즉 윤대녕은 ‘인간의 사랑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인간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묻고 있다. 윤대녕 소설은 이러한 물음을 집요하게 던져왔으며 여전히 던지고 있다.

로렌스(L.H. Lawrence)의 후기 소설이 비의적인 아름다움과 신비에 빠져 다시는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윤대녕은 비인간적 차원의 아름다움으로까지 소설을 끌고 가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와 인간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의 압력에도 윤대녕이 소설이 여전히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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