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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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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결같고 강력한 것인지를 종종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게는 너무 좋은 나머지 옳아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선호일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이성과 감정이 도통 쉬이 일치하지 못 하는 탓에 늘 내가 좋아하는 걸 남이 좋아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아, 그건 아니지, 하고 반박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삐쳐버리는 시간을 꽤 많이 겪었다. 어떤 친구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됐다. 아, 이 친구는 이걸 좋아하겠구나, 이건 좋아하지 않겠구나.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어떤 친구든 좋아하지 않을 만한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에 이르렀는데, 그 결과 내가 주변에 널리 알리지 못한 비운의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구병모'다...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내 지인 중 나와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구병모 작가를 좋아한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남들이야 좋아하건 말건, 일단 한국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항상 내가 구병모의 책을 추천했으며, 간간히 sns로 그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 탓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조금 더 사설을 이어가보자면, 그런 까닭에 나는 구병모의 작품을 거진 다 읽었다. 2009년 창비 청소년 문학상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이후, 구병모는 주로 장편 소설을 많이 집필했다. <아가미>, <피그말리온 아이들>, <방주로 오세요>, <파과>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 장편소설군 때문에 구병모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 구병모의 장편소설은 하향세였다. <피그말리온 아이들>과 <방주로 오세요>는 물론이요, 최근작 <파과> 역시 <위저드 베이커리>가 주었던 그 느낌을 전달하지 못 했다. <아가미>는 신선했으나, 그 역시 특출나지 않았다. <위저드 베이커리> 역시 5번-6번 정도 읽었는데, 사실 서사, 사건적 측면 보다는 그 결말과 소설 속에 숨은 시니컬함에 미덕이 있는 그 소설은 '앞으로의' 전망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었지 그 자체로 역작은 아니었다, 라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물론 나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정말 좋아하지만 말이다.)

 

이런 판단을 내린 나를 확, 그녀의 세계로 끌어간 건 구병모의 첫 단편집 <고의는 아니지만> 이었다. 많이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그 책 속 단편들 하나하나가 내보인 그녀의 서늘하고도 다정한 시선은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이후 문예지에 실린 '학문의 힘'이나 문지문학상 수상후보에 올랐던 '이창' 역시 찾아 읽었고, 그녀가 내뱉는 단편의 호흡이 나와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병모의 두번째 단편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애타게 기다렸던 건 그 이유가 크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있고, 끝 부분에 윤경희 평론가의 평론이 더해져있다. 단편집이 으레 그러하듯, 이 단편집의 구성마저도 사실 '문학적'인데, 첫 단편과 끝 단편의 제목만 보아도 그 사실은 쉽게 유추되어질 수 있다. 처음을 여는 작품의 제목은 이렇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그리고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어디까지를 묻다'다. 처음에는 어디론가 계속 올라가고 싶어하던 친구의 장례식장에 간 화자를 세워 책을 열고, 점차 이기적인 사람들의 행태와 속내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뒤로 가면 갈수록 그 어조에 묘한 힘과 동정, 의지 비스무리한 것이 실린다. (사실 이것을 '의지'라고 말하기는 참 그렇다.) 조금씩 작가의 어조가 따뜻해지는데, 그 마저도 아주 직접적이지는 않다.

 

구병모는 <고의는 아니지만>에서부터, 그리고 그녀의 장편 내내 그래왔듯 묘하게 환상적이고 장르적인 소재를 잘 사용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특히 이 소재를 고대, 혹은 원형적 소재와 잘 겹쳐 이용하는 듯 하다. <파르마코스>나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 특히 그렇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희생양, '파르마코스'라는 개념을 일종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겹쳐 만들어낸 전자도 그렇지만, 사실 이 단편집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재미있게 봤던 소설은 <덩굴손 증후군의 내력>이다. 인면수라는 소재는 나 자신도 습작을 하며 썼던 것이고, 이토 준지의 만화에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나 구병모가 이 단편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 나무에 대한 시선은 꽤 독특하며 다정하다. 결국, 내몰리고 내몰리고 참고 참던 사람들이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일상 속에서 덩굴이 된다. 아주 소수만이 그들을 돕는다. 그들을 베어내는 하청 업자들마저도 결국엔 그들이 되지만, 거대한 자본은 여전하다. 백화점은 망하지 않는다.

 

소설집은 뒤로 갈수록 점점 몰입도가 더해져 가는데, <덩굴손>, <어디까지~>를 보면 사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가 앞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한강의 <소년이 온다> 후반부 같은 느낌? 작가의 열정, 그로테스크한 광경 속에 묻어둔 인간적 온기와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요 근래 워낙 세상이 뒤숭숭해서 인지, 마음에 콕콕 박혀와서 나를 돌이켜보게 하는 구절이 꽤 많다. 몇 군데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해고 되고 실직 당한 사람들의 몸에서 덩굴이 자라나 도시를 뒤덮는다는 <덩굴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고, 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거기에 비도 내리지 않는다면, 뜻있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수백여 톤의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지므로. (중략) 윗선에서는 겨울이 찾아와 메마른 강풍이 세상을 덮치고 눈이 쌓이면 소강상태로 접어들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궁극적으로는 이 도시에 그리 변할 마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일 터다.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 줄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p. 239

 

 

언뜻 시니컬한 현실비판처럼 읽히는 이 뒤로, 방금 전까지 함께 얘기하던 사람이 덩굴이 된 것을 본 주인공 U, 본인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진 그녀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어떤 선명한 연민이나 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거기 있기 떄문에 U는 무심결에 그리로 손을 들어 올린다. 이어서 닿는 순간 손가락에 감겨 오는 줄기들의 감촉을 느끼지만 그는 잡아채지 않고 그대로 버티어 선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p.240

 

구병모의 이 은근한 시선, 이 묘한 따뜻함이 앞서 나온 모든 그로테스크한 광경 속에 묻어있다.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섬뜩하므로' 다정한 구석이 그녀의 매력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아마도 <고의는 아니지만> 이후 내가 가장 아끼는 구병모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흔히 판타지 세대라고 불리는 현재 20대가 은근히 이 작가를 잘 모른다는 점이 항상 참 아쉽다. <파과>의 뒷면, 평에는 구병모가 항상 '새롭다'라고 적혀있다. 적확하다. 그녀의 스타일은 유지되지만, 글은 항상 조금씩 바뀐다. 여기 저기를 넘나드는 솜씨가 수려하다. 그 탓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 역시 명확하지만, 그녀가 내는 장편소설을 보면 스스로도 그런 점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점점 글이 좋아져서 뗄 수 없는 작가, 언젠가 '구병모' 하면 모두 '아~'하고 알게 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언제나 응원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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