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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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보통 인간의 생명력이 쇠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자연과 인간, 그것도 생이 쇠해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대결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인간 존재가 지닌 본연의 생명력이 가장 적나라하고 처절하게 드러난다


청새치를 만났을 때 노인이 느끼는 순수한 기쁨과 힘겨루기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드러나는 노인의 생명력이 인상깊다. 고통은 존재의 위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통을 통해 존재는 자신을 인식한다. 노인은 청새치에게 걸린 줄을 온 몸에 감고 버티었고, 청새치 역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벗어나려 했다. 순수한 존재끼리의 교감이다. 청새치라는 존재를 온 몸의 근육으로 버티는 데서 오는 고통을 통해 노인, 한 인간의 육체적, 나아가 정신적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에서 청새치와 이틀동안 힘겨루기를 하는 그 제일 정적인 시간이 이 소설에서 제일 생명력 넘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청새치와의 대결이 정적이지만 고통을 통해 생명력 본연의 힘을 나타냈다면, 상어떼와의 대결은 필사적이고 동적이었지만 생이 포함해야할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이 느껴지는 대결이었다. 상어떼와의 대결의 끝에 남은 청새치의 뼈와 노인의 모습에서는 그래서 생의 처절함만이 느껴졌다.


자연 앞에서 순수한 인간이 그 자체를 걸고 대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순수한 생명력과 또 이후의 생의 처절함까지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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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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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마시멜로 한다.


지금. 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지나가버리고 나면 기억. 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는데, 시간 자체가 형태가 없듯이(현재라는 시간은 존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총체이므로) 기억도 역시 규정된 형태가 없다. 다만 이러한 기억들은 다시금 지금, 현재 존재하는 한 대상과 반응하여 구체적인 형태로 재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최초로 그 기억을 형태화시키는 촉매가 무엇이냐에 따라 기억의 형태가 보통은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 촉매들은 감각, 감정, 의식적 노력 등 다양하다.

나는 현재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감각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세계가 무한하기 때문에) . 그리고 그러한 감각들 중 일부를 인식한다. 인식하는 순간 감각들은 현재라는 시간에 유착되고, 함께 기억된다. 그런 감각들 중 또 다시 일부만이 같은 자극에 의해 재감각화되어 인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감정에 의해 감각에 대한 욕구로 드러나거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언어화될 수 있다.


내 자신의 세계의 일부이자 시간의 단편들인 기억은 이렇게 개인 내에서 사적으로 형태화된다. 이렇게 사적으로 형태화된 기억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을 기억화하는 과정에서, 또 기억을 다시 형태화하는 과정에서 개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같은 시간을 교감하기 위해서는 다의적이면서 함축적인,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순간의 아주 포괄적인 감각들을 자극함으로써 나와 타인이 인식하는 감각적 차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내 자신의 기억을 형태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 언어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즉, 그 언어는 은유의 형태를 띄어야 한다. 


나와 너의 시간을 모두 함의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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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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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심'이라는 것은 귀엽고 순수해 보인다. 다만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즉 어른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각도다.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아이들의 행동, 언어에는 그 나름의, 그 자체의 논리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심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순수하고 귀여워보이는 아이들의 행동과 생각들 속에 어른들이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자기 고뇌, 불안 등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라는 존재는 분명 아이들이 자라가는 연속선 상에 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이들의 행동에서 순수함과 귀여움만을 읽게 되어버린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그 연속선 상 어느 시점에서 그들과 단절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어른들은 내가 어렸을 때, 즉 아이였을 때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었지. 하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아이들에게 공감한다. 하지만 그 과거의 기억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일부일 뿐이다. 즉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 기억들은 나의 변화에 맞게 합리화되고 다듬어지고 편집되어 내가 세계를 '어른스럽게' 바라보는 프레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다시 내가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내가 아이였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추억이란 망각의 한 형태일 뿐이다.

2. 사회내에서 개인들은 각자의 위치와 역할, 입장을 갖는데, 그런 입장의 차이는 이상하게도 개인과 개인 사이의 위상(높낮이)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그런 위상이 역할과 입장의 위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상으로 확대 해석되고 그로 인해 차이(다름)의 문제가 도덕(옳고 그름)의 문제로 왜곡된다는 데에 있다.

이런 위상의 왜곡에 의해 사회는 권력 구조를 정당화시킨다. 특정 사회적 역할에 도덕적 위상을 높게 부여함으로써 사회 내에 권력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도덕은 언제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 수정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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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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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시작한 고전 탐독에 어느새 내게도 좋아하는 작품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소위 '취향' 비슷한 것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서사 속에서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흥미진진한 인물들의 동선을 상상하고 몰래 뒤따라가는 일보다(물론 이런 관음적인 시선도 즐겁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도, 어제와 같은 일을 오늘 또 지루하게 하는 인물을 그려내더라도, 전세계인들의 각각의 독특한 개별성들을 대상으로 그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공통성을 관통하는 바늘같이 날카로운 작가의 안목과 공통성의 조각들을 통해 삶을 다시 재단하는 재봉틀같이 정교한 문장들에 감탄하게 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삶 속에서 사고와 사유없이 반복되는 일상적인 순간과 대상들을 픽션화시키면 삶의 가장자리에 있던 무명의 조약돌은 삶의 무대에 출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로 인해 일상은 사건이 되고, 삶의 외연은 확장된다.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하는 60억의 개인들은 60억개의 모든 다른 양상을 띄는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마는,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의 독특한 작품으로 의미화되지 못하고 '일상'이라는 표준으로 마모되어 개성을 잃은 채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그렇게 독특한 모양을 잃은 채 시간의 지층 사이로 화석화되어가는 삶의 일상들을 조심스럽고 아주 정교하게 캐내어 복원시킴으로써 비일상화시키는 작품이다.
그로 인해 내 삶의 일상적인 부분이 비일상화되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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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양장)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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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3요소는 교육자(교사), 피교육자(학생), 교육과정 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교육목적은 이름 그대로 훌륭한 하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 학교에는 피교육자만 존재할 뿐, 교육자와 교육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없이 언제나 침착하며 동요하지 않고 주인에게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섬기는 인간상, 이것이 이 학교의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섬기는 행위가 완벽해질수록 섬겨지는 대상은 섬기는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또다른 요구를 하게 된다. (너무나 완벽하게 섬기고 시중들기에 섬겨지는 대상은 시중을 드는 행위 자체에 애착을 가질 수도,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학교의 학생들은 교육받을수록, 이 학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에 가까워질수록 각자가 가지고 있던 개성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희미해져간다.
'하인'이라는 단어와 '학교'라는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완벽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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