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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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자가 토마시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토마시에게 인사하는 순간 테레자의 배에서 난 꼬르륵소리(그녀가 영혼과 육체가 가장 일치하길 바랐던 순간의 불일치의 이미지)에서 테레자는 태어났다. , ‘육체의 배신의 이미지에 의해 테레자의 사랑의 근본적인 의미가 변화한다.

 

테레자에게 육체는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보편성이었고, ‘영혼은 타인과 나를 구분짓는 유일한 특수성이었다.

이 술주정뱅이와 수치심을 모르는 늙고 추한 육체를 가진 어머니로 대표되는 저속한 보편성의 세계에서 테레자가 갖는 특수성의 유일한 징표이며, ‘정조가 토마시의 수많은 여자들 속에서 테레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이었다.

 

토마시는 책을 통해서 저속한 세계 속에서 버둥거리던 테레자의 영혼(특수성)에게 말을 걸었고, 테레자는 사랑에 빠졌다.

 

테레자는 수많은 다른 토마시의 여자들도 지니고 있는 보편성의 영역인 육체를 제외한, 절대적인 정조의 확실성 위에서만 그들의 사랑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중요한 점은 테레자가 확실하게 그렇게 믿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테레자는 영혼의 형태에 맞추어 육체를 그에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테레자는 욕망이 좌절되는 현실 속에서 욕망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영혼과 육체로 존재를 이원화시키고 각각에 모순되는 욕망을 부여한 후 억지로 이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욕망을 존재에 투사했던 것이다. 그 본질적 모순은 육체의 배신이란 형태로 해소된다.

 

테레자의 정조가 무너진 순간, 즉 다시 한 번 테레자의 육체가 영혼을 배신한 순간, 테레자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현기증이란 추락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추락에의 욕망 그 자체이다). 안간힘을 쓰며 영혼과 육체를 일치시켜 왔던 테레자의 육체의 배신, 테레자의 존재를 지탱하던 본질인 특수성이 무너진 순간, 그 특수성 위에서 유지되던 사랑의 의미도 변화했다.

 

정조에 기반한 사랑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테레자는 강하게 시골, 전원시의 이미지를 느꼈다. 시골, 전원시의 이미지는 낙원에 대한 향수이며 인간이 인간의 노정에 던져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말한다.

 

우연히 토마시가 약해졌음을 느낄 때,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토끼의 형태로 변해 다가왔다. 이 이미지는 이제부터 두 사람 모두에게(상대방에게, 또 스스로에게) 존재 이상의 것을 요구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로 테레자는 전원적인 사랑을 느낀다.

 

전원적인 사랑이란 갈등, 진화가 없는 사랑이며, 서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으로 카레닌과의 사랑으로 대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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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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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망각이란 축복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처럼 현재의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어떤 이미지도 탈락되지 않고, 어떤 작은 감각조차 희미해지지 않는 과거란 현재와 무엇이 다른가), 수없이 중첩되는 현재와 지나간 현재들 속에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지속적으로 '잃기'때문에 또다른 현재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망각은 또한 저주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수명은 길어도 100년 정도이고, 한 세대의 기억은 다음 세대가 지나면 거짓말같이 잊혀진다. 시간은 다시 돌아흐르지 않고, 공간의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덧칠되기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스쳐지나가며 중첩되다가 죽음과 함께 사실상 소멸한다. 망각은 한 인간의 개인의 삶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다가 결국 개인의 존재 자체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워 버린다.

 

이런 망각의 힘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규명하고 스스로를 불멸의 형태로 남기고자 노력한다.  

 

우리가 어떤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한 개인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수많은 삶의 순간들이 망각의 힘에 의해 탈락되고, 수없이 중첩되어 드러난 현재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한 개인의 삶을 전부 드러내지 못한다. 그건 불가능하다. 몇몇의 특징적인 개인의 삶의 순간들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규명되고 그 편집 과정 속에는 개인의 의도가 작용한다.


개인의 문제를 한 국가의 역사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약 반만 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약 반만 년의 시간과 한반도와 주변 어느 정도의 공간,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이 교차했던 곳에서 일어났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역사란 망각의 부산물이며, 그 동안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고 탈락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다.(그 편집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개입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란, 우리나라를 구성해왔던 수많은 구성원들 전체의 이야기를 대표하지만, 반대로 우리나라를 구성해왔던 대다수의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탈락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은 당시 유교적 명분론에 의해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후금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척화파와 기울어져가는 명나라 대신 새로 강성해지는 후금과의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여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자는 주화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탓에 변변한 대응조차 한 번 하지 못하고 인조의 삼전도에서의 굴욕으로 막을 내린 전쟁이라고 역사 교과서 속에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생략된 인조의 답답함과 슬픔, 죽음을 불사한다며 흐느끼며 임금에게 직언하던 이의 새벽 도주, 겨우내 남한산성을 지키며 느꼈을 군졸들의 추위와 기근의 고통은 몰랐다.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추상화시킨다. 반면에 문학은 역사 속에서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구체화시킨다.

'아. 저들도 나처럼, 이 땅을 밟았고, 한 시대를 살았던,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었구나.'

역사 속에서 탈락되어 있던 개인들의 삶이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일체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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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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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라는 입체는 안과 밖을 구분할 수가 없는, 안쪽면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따라가보면 어느새 안쪽면이 바깥면이 되어버리는 입체다. 꼽추와 앉은뱅이는 입주권을 사들이는 승용차 속 사나이를 폭행하고 결국은 죽인다. 명백한 살인 사건의 가해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한쪽 면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꼽추와 앉은뱅이는 피해자, 승용차 속 사나이는 가해자처럼 보인다. 이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라는 입체처럼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던 시대를 돌고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난장이의 키는 두 여자의 어깨 밑에까지밖에 안 찼다. 두 집 여자는 거인처럼 서서 고개를 저었다.

난장이는 약자다.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으로도 약자였고, 태생의 신체적 결함이 주는 선입견에 의해 사회적으로도 약자였다. 신체적 약점은 타고 난 것이었고, 사회적 지위는 타고 나지 않았으나 타고난 것처럼 주어졌다. 그래서 평생을 난장이로서, 약자로서 고통 속에서 살아갔고, 죽음도 난장이로서 맞이했다.


평생을 일하고,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왔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죽은 땅을 떠나 달나라로 가는 것이 난장이의 유일한 꿈이었다. 이 죽은 땅에서 온 생애를 살아온 난장이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분명 난장이가 쏘아올렸을 것이다. 달나라를 향했을 것이다.

죽은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삶을 뜻하는 것일까


먹이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에 위치한 난장이 가족들은 시대가 가하는 경제적, 사회적 고문들을 이기지 못했다. 시대 자체가 불공정한 의무를 강요했기 때문에 시대 속에서 권리를 얻을 수 없었다.


현대에도 분명 난장이가 존재한다. 먹이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는 최상위포식자 또한 존재한다. 다만 눈에 보이던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조금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어갔을 뿐이다.


이 슬픈 시대 속에서 나는 오늘 난장이에게 가해지는 시대의, 사회의 일방적 폭력을 보고 눈감아버리지 않을 정도의 양심, 시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 올바르지 못함에 분노할 수 있는 순수, 달나라를 향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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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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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내적 표현 욕구에만 따라 살아가는 삶은 타인의 눈에는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이란, 우리 자신의 내적 욕구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내적 욕구의 충족을 통한 자기완결적 자아와 타인의 시선이라는 요구에 의해 조작된 자아, 양자를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인가는 타인과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의 영원한 화두일 것이다.

 

표현은 정직하다. 아무리 꾸미고 멋을 부려도 자기 자신 이상의 것은 내보일 수 없다. 자신 이상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공허한 것이 된다. 타인을 의식해서 뭔가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 내면의 유의미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표현은 그런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예술가란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 와서는 개인의 신념이나 이상이 다원화되었다. 사회구성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개인의 신념과 가치들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개인 내부의 가치와 신념을 오롯이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개인의 내부의 가치를 오롯이 표현하는 과정은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외면받고 배척받지만, 외면과 배척의 과정을 거쳐 표현된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의 표상인 '작품'은 사회구성원을 설득한다. 그리고 외면과 배척의 과정까지도 작품의 아름다운 가치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즉 개인의 신념이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제 영혼의 비밀을 산 제물을 바치듯 바치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가치의 추구야말로 보편적인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역설적이지 않은가.

 

(수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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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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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항상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인류는 지구상 생명체 중 유일하게 문명을 발달시킴으로써 지금보다 더 편리한 생활, 더 안락한 삶을 실현시켜왔다. 그리고 지금도 유토피아를 향한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인류의 꿈은 낙원에서의 삶이 아닐까.

자유와 풍부한 음식, 여유롭게 헤엄칠 곳이 있는 따뜻한 낙원,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이런 낙원 속에서 인간은 그렇다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소설은 에덴동산을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낙원같은 섬 속에서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이 점차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낙원과도 같은 환경 속에서 인간은 가장 삶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생존을 위한 욕구가 충족될수록 '이성적 삶'을 향한 열망과 필요가 사라져 반복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순수한 생존만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학습했던 인간문명이 자연 속에서 하나 둘씩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점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나중에는 거의 광적인 능동성을 보인다.(봉화를 피우는 과정에는 그토록 소극적이며 수동적이었으면서!). 그것은 자발적인 인간다움의 포기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능적 측면에 의지하는 삶은 미지의 존재의 출현에 대단히 취약하다.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란 합리화할 수 없고 실체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파리대왕이란 결국 지적 탐구욕, 앎에 대한 능동성이 결여된 인간들이 느끼는 공포의 표상이다. 알고보니 단지 낙하산에 달린 시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체없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온 섬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낙하산에 달린 시체가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체없는 공포는 한 용기있는 선구자의 지적 탐구로 인해 그 허상이 간단히, 맥없을 정도로 간단히 극복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따라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어떤 상태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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