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구체적인 내용, 즉 ‘비이성적인 잔여‘와 결부되어있다는 것은 혐오의 특성에 속한다. 그것은 도덕적인 선의 비정상인 복무를대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는 일차적인 악의 경험이 아니다. 혐오가 지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관련되는 한 그저 악을 가리킬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비윤리적인 것, 즉 도덕적으로 ‘부패한 또는 ‘타락한‘ 것의 특정한 성질의 존재를 나타낸다. - P120
왜냐하면 이미 암시했듯이 먼저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즉 우리 존재의 일반적인 속성들을 건드리고 동시에 혐오를 유발하는 대상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집중적으로 나타내는 실질적인 근접성이기 때문이다. 혐오는 주체 자신의 자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혐오는 주체의 존재 전체에 대해 실제 영향을 너무 적게 주며, 주체의 본질적인 존재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적다. 이는 주체의 경험에서 그가 주로 지향된 자신을 발견하는 구체적 상황이다. 이 경험은 확실히 그런 인간 존재와 관련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제의 주체의 고유한 개인적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관여된 사건들의 유기적 발전과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 P117
거칠게 말해서, 혐오에서 발견되는 도전은 대상이 주체에게 삶과 죽음(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인 의미에서)을 동시에 의미하며 주체를 향해 삶과죽음을 단단히 끌어당긴다는 사실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 P115
혐오감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과더 가까이 더 활발하게 접촉한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그 대상에 더 빠져들게 됨으로써 야기되는 혐오 그 자체의 근접의 순간, 임박한 극대화에 대해 생각한다. - P114
개체에게는 여기서 형성된 생명의단위가 죽음만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형성은 쇼펜하우어의 삶의 충동이라는 관념, 즉 적절한 삶의 의미는 죽음이라는 테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생리적이고 또한 식물적인 삶의 열대 리듬에도(유럽인들에게 존재하듯이, 삶을 향한 미친 듯한 속도와 격렬한 열정과 조화를 이룬 이 모든 삶의 짧음과 실패 안에 혐오스러운 무언가가 있다. -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