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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세실 앤드류스 지음, 강정임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그런 책을 왜 읽냐?”
마흔을 훌쩍 넘긴 필자보다도 10살 이상 나이가 많으신 회사 윗분께서 이 책을 보시자마자 3초 만에 하신 말씀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분이 보신 것은 아마 노란색, 엉성한 판화 글씨체, 혁명과 작당 그리고 어쩌면 공동체라는 제목의 일부가 전부였겠지만, 필자는 그 분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 분과 10년 넘게 함께 일했고, 그 동안 서로 나눈 대화를 통해 그 분이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부제: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이라는 긴 제목의 이 책은 세실 앤드류스가 지었다. 구술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유쾌하고 배려할 줄 아는 대화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압축하면 이렇다. 사람이 원래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생물학 등 과학적 검토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며, 허상에 불과한 이기적 인간상을 기초로 세워진 교육 체계와 경쟁적 사회문화 그리고 소비자라는 획일적 인간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와 권력층의 의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말 하고 들어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러한 공동체와 대화를 이끌기 위한 철학적 기초와 몇 가지 원칙 및 행동요령을 책의 후반부에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대화는 권력행위이다. 심지어 어떤 철학자는 모든 언어를 명령어라고 한다. 말하고 있는 나의 세계로 들어오라! 바로 이것이 대화의 맨 얼굴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할 때 행복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고위층과 함께 있을 때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결국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대화라는 단어 앞에 길게 나열했던 ‘유쾌하고 배려할 줄 아는’은 대화의 맨 얼굴을 감추기 위한 화장에 불과하다. 유쾌하고 배려할 줄 아는 대화의 기술을 통해서 저자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세계로 독자들을 강하게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대화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책 곳곳에 대화가 힘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전제로 전개되는 논리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저자는 왜 권력행위인 대화를 그토록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상적 소수자인 진보주의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저자가 직접 밝혔듯이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경쟁적 이미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책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판결문이 아니라, 마음 따뜻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아마추어 시민운동가의 제안정도로 좌표를 설정한 것 같다.
보다 본질적인 두 번째 이유는 저자의 가치관이다. 저자는 절대 진리를 찾아나서는 구도자가 아니다. 저자는 직접 자신이 쾌락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저자는 자신의 쾌락의 크기와 타인의 쾌락의 크기가 서로 경쟁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양자 모두 대화를 통해서 정비례로 확대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쾌락을 바라본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각기 조각나고 고립된 개인적 행복의 총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반응하여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국민총행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당신의 진리’가 ‘그들만의 진리’를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아예 ‘자아의 진정한 표현이 곧 진리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이 모두 진리가 될 수 있다.’라고도 한다. 극한적인 가치상대주의다.
얼핏 보면 위와 같은 가치상대주의는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인정했듯이 모든 인간은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결국 가치상대주의는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끼리 다소 위선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도, 주관을 형성해 준 절대적 가치관의 해석을 넘기는 어렵다. 그 대신 주관의 장벽을 애 둘러 빙 돌아가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된다.
이 책이 심하게 종교적인 용어나 형이상학적인 언어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화가 전 우주적인 힘을 인간 세상에 구현하는 예배가 되어야만 저자가 말하는 맨발의 교사는 성직자로서의 자신의 역할, 즉 ‘우리 모두가 창조적이고 경이로운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우리 각자가 우주를 관통해 흐르는 생명의 힘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돕는’, 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자원 배분과 잉여의 처리 문제가 계급투쟁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지배계급의 유지를 위해서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지, 대화의 기능이 그런 측면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 심도 있고 현실적인 고찰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아쉬웠다. 물론 구술문화를 되살리는 소명을 가진 저자에게 이런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생뚱맞지만, 재미있는 상상 하나를 제안한다.
작년 대선 때 있었던 일을 놓고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의원이 마주 앉아 있다. 그 사이에서 맨발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대화는 힘의 가면이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