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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 -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
김기택.조용미 외 지음, 이종민 엮음 / 태학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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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고자 하는 청춘들의 필독서다. 문청들이여, AI 인공지능에 의존하지 말고 이 책을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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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 -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
김기택.조용미 외 지음, 이종민 엮음 / 태학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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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모든 시인은 먼저 한 사람의 독자였다. 처음부터 시인이었던 사람은 없다. 어느 날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읽고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가 단순한 나무가 아니게 되고, 바람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게 되었다. 언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떨림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순간 이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를 읽기 전과 후의 인간은 더는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시인들은 바로 그 순간을 들려준다."-('엮은이의 말' 중에서)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라는 부제가 달린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이종민 엮음)라는 멋진 제목의 책에 푹 빠져 있는데 아내가 폰으로 뉴스를 보며 뭐라뭐라 말을 건다. 읽은 대목을 다섯 번도 넘게 다시 돌아가서 읽다가 끝내는 한 마디했다.

 

"여보 나 지금 꼭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있는데..."

"응 알았어.“

 

그 후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아내가 옆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만큼 책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 아내가 어디 있나 하고 보니 방에 들어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마음이 짠했다. 시가 뭐라고.

 

"시는 이상한 존재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권력을 쥐지도 못하고 시장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총칼을 멈추게 하거나 굶주린 사람에게 당장 빠을 건네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삶의 가장 가혹한 순간마다 시를 찾는다."-('엮은이의 말' 중에서)

 

자잘한 일상이 주로 시의 소재가 되는 나로 예를 들자면, 가혹한 순간만 시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응 알았어"하고 난 뒤 언제인지도 모르게 방으로 들어가 새우잠에 든 아내를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가 시가 찾아오는 순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은 그런 이유로 책에 더 깊이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나의 좁고 안이한 시 세계를 뼈아프게 돌아보게 한 매혹적이고 뭉클하고 아프면서도 영양가 풍부한 시적 경험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좋은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많은 진실을 품고 있는 시다. (...) 나는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막 달아나고 싶다. 그런 이상한 흉내를 내고 싶다."_조용미/이상, <꽃나무>

 

"박용래는 울고 난 뒤 얼굴에 남은 소금기처럼, 몇 알의 빛나는 소금 결정처럼 언어를 아껴두듯 시를 썼다. 시를 읽으면 그의 결기에 정신이 얼얼해질 정도다. 우는 건 현실에서, 그러나 시에서는 감상 없이 매섭고 징하게!"_박연준/박용래,<장대비>

 

최근에 매우 인상적으로 읽은 한인 독일 작가 이미륵의 장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한 안삼환 작가께서는 '추천의 글'을 통해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우선 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로 상대방을 판별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어지는 추천의 변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획책한 비상계엄이 '대국민 호소용'이었다고 말하는 이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다.(...) 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시인이라면, 이런 언어 앞에서 자기 자신이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낄 것이다. (...) 속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후안무치한 거짓말쟁이를 면하자면, 그리고 혹시 나 같은 별종을 만나 금세 '시도 모르는 인간'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이 '시인들의 밤하늘'에서 정명正名의 지혜를 얻는 것이 좋으리라.“

 

이쯤해서 슬쩍 털어놓자면, 이 책의 저자인 마흔한 명의 시인 중에 내 이름도 있다. <아프고 환한, 첫사랑 같은 시-천양희, '직소포에 들다'>라는 꼭지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천양희 시인의 <마음의 수수밭은> 내게 첫사랑 같은 시집이다. 첫사랑이되, 피가 철철 흐르는 첫사랑이다. 시집 정가는 삼천 원. 그 무렵, 나는 동네 정형외과 의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사십 대 초반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허리 디스크 때문이었는데 하루 진료비가 이천팔백 원이었다. 머리가 명석한 편이 아닌 내가 오래 전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아내가 병원에 가리고 준 삼천 원을 들고 하루는 병원으로, 다음 날은 서점으로 향했던 것이다.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을 것이다.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댜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나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이하 생략)

 

책에서는 시 전문이 소개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양희 시인, 당신 스스로도 "내가 이 시를 아끼는 것은 내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는 절창 <직소포에 들다>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에 곁들여, 제자들에게 생일시를 써주다가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진실해지는 것"이었던 그 무렵의 고해성사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집 정가가 삼천 원이었을 때 하루는 병원으로, 하루는 서점으로 향했던 그때처럼 어쩌면 나는 아내가 주는 쥐꼬리만한 용돈을 일부 축내어 자꾸만 책을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할지도 모르겠다는.

 

요즘 AI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시를 쓰는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한심한 일이다. 그 결과가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에이아이의 유혹에 빠진 시인 지망생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이 책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떻게 낮은 소리에서 커다란 울림이 나오는 것일까. 그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말에서 해방된 전혀 다른 성질의 말이었다."_김기택/김종삼<북치는 소년>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런 세계를 좋아했다. 힘없는 사람이 끝내 밀려나지 않는 세상. 끝내 한 발 밀려나더라도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는 꼿꼿한 결기 같은 것."_신미나/신동엽, <세모 이야기>

 

"민중서관 구석에 앉아 기형도의 시를 번갈아 가며 읽었다. 우리의 희미한 청춘과 곰팡이 핀 회한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상실이 지나간 자리에 지독한 현실이 앉아 있었다."_지연/기형도, <비가2-붉은 달>

 

"시인은 말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불우와 불운을 다해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미안하고 내가 아니어서 고맙다고 최선을 다해서 운다."_안현미/최승자<일찌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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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내도 자라나는 그리움 하나 ㅣ 시에시집 25
최상일 지음 / 시와에세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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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 시인‘에게 행복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꽃잎을 들여다보는 일/이 모든 순간을 당신과 함께 하는 일(<행복>)"이라니!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랴! 두 줄의 시구에 인생의 오묘한 맛과 신의 섭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을! 멋진 첫 시집 출간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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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청소년 마주하기 - 교육복지 현장 리포트
신선웅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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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일러두기-이 책을 읽기 전에'를 통해 "이 책에 등장하는 학교 이름은 모두 나무에서, 청소년의 이름은 모두 바람에서 따왔다"고 밝힌다.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각 존재가 지닌 고유한 성질을 담고자 한 까닭이다.

학교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청소년들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청소년은 바람처럼 어디로든 자유롭게 흐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곧 살아 있음의 증거이기도 하기에.

저자가 하는 일이 매우 버거운 일임을 알면서도 웃음이 지어지곤 했다. 그의 언어가 주는 힘이다. 바로 이런 문장에서다.
"선생님, 오늘 개학인데 가을바람 학생이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단풍나무중학교 교사의 전화 한 통이 2학기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개학 날, 가을바람은 왜 학교에 올 수 없었을까?
-(36쪽)
학교에서는 가을바람이 개학날인데도 학교에 오지 않은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왜 학교에 올 수 없었을까?"라고 자문한다.
"나는 현재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라고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을 밝히고 있다.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의 일은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학교를 오가고, 교사와 통화하고, 보호자를 만나고, 지역 기관의 문을 두드린다."
-(18쪽)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한 청소년이 학교 안에서 버텨 낼 수 있도록, 그리고 학교 밖에서도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연결할 우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을 만나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묻고 듣고 알아야 한다."-(34쪽)
그렇다. 그가 교육복지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청소년을 만나며 양육자, 교육자, 지역사회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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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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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160층 초호화 백화점 비상구 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소설의 유일한 공간이다. 한 가족과 그들이 갇힌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다 만난 몇몇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전부다. 주인공 남수의 과거가 회상으로 채워지긴 하지만 소설 속 현재의 시간은 한 나절에 불과하다. 단편이나 중편이라면 모를까 장편소설로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연거푸 읽었다. 박진감이 넘치는 내용에 압도되어 한 번. 결말을 보기 위해 쏜살 같이 달려온 인생을 뒤늦게 후회하듯, 상징과 은유와 우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이 즐기면서 다시 한 번. 그렇다고 평온한 마음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이 갇힌 건물 비상계단의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듯이, 작가의 절망적 상상력이 그려낸 소설 속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 속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남수는 개인사업자로 트럭을 매입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집착을, 그의 몸은 버티지 못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허리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세금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거기에 “온전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태어난 아들 환이”는 “그의 삶을 옭아매기 위해 운명이 내던진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의 아내도 몸이 성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수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초호화 백화점을 찾아 간 것은 ‘마지막’이라는 그의 아내 지애의 간청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희망이 없는 불우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최후의 결심을 이행하기 전에 근사한 한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화점의 부실공사로 인한 사고가 원인이 되어 비상계단에 갇히게 되면서 죽으려고 찾아간 장소에서 살기 위해 비상계단을 끝도 없이 오르내리는 형국이 되고만 것이다.

하지만 남수 일행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딱히 절망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의사로부터 아이가 뇌손상으로 평생 장애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수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던 것이다. 아이의 증상이 경도의 근무력증을 반복적으로 앓은 경력이 있는 아내가 복용한 약물에 대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저 문밑으로 던져진 체납고지서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희망 없음 속에서도 그가 한 일이란 “그저 소독약 냄새가 나는 벽을 힘없이 몇 번 걷어찬 것이 전부”였다.

 

그럼 그를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신념을 잃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희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에게 희망은 “어떻게든 세상이 돌아가야 하니까, 모두들 제자리를 지키도록 세뇌시키는 속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눈앞에서 아래위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나선형 계단도 누군가 “그에게 쏘아올린 조롱”일 뿐이었다.

 

“그나마 아이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고 말을 배워가면서 누군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을 때, 남수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는 살의가 가득했다. 주민센터의 사회 복지사가 놓고 간 자세 교정용 의자에 구겨진 채 틀어박혀 있는 아이를 보면서, 그는 희망이란 것의 비틀린 몸체를 상상하고 있었다.”(15쪽)

 

“여기 이 문. 이렇게 꼼짝도 않는 이 문! 아무리 걷어차고 발길질해도 꿈쩍 않는 이 문! 바로 이 문 앞에서 서 있는 게 어떤 건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줄 알아? 이런 문 앞에 서서 당당하다고 어깨를 펴는 꼴이… 희망을 잃지 말아야한다고 억지웃음을 웃고 있는 꼴이 얼마나 엿 같은 줄 너 같은 놈이 알기나 하냐고!”(93쪽)

 

남수가 발설한 ‘너 같은 놈’은 그날 백화점에 들어왔다가 갇힌 사람 중 한 하나다. 이름은 수현. 그가 백화점에 들어온 이유는 성전환 수술을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도를 하기 위해서 건물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사실은 안 남수는 “기껏 그 따위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도둑질을 해?”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수현은 마치 “봄 햇살을 쬐는 것처럼 고즈넉한 눈빛”으로 이렇게 항변한다.

 

“그래도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은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난 아저씨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그 따위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거든요.”(84쪽)

 

남수가 괴변이라고 일축한 수현의 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일종의 포석이다. 그 포석의 핵심은 “삶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남수가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자신을 조롱하는 희망에 대한 앙갚음을 도모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지금의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구원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수의 아들 환이가 전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소설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환이를 통해 이 세계와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회심의 카드는 다름 아닌 ‘다름’이다. 여섯 살 먹은 환이의 손에는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인 남수에게 자주 듣던 말을 떠올려 비상계단 문에 ‘다시’라는 글자를 적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탈출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남수를 지치게 하는 요인이 되지만 곧 상황은 반전된다.

계단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애물단지 노릇을 하던 환이는 일행 중 누구보다도 먼저 계단을 올라가 크레파스로 벽에 글자나 숫자를 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붉은 빛깔의 벽에 매달려 환이는 천천히 글자를 따라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에겐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글자들을, 아이는 획을 세고 서로 다른 곳에 획을 교차하며 그리듯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쉽게 한 번에 써내려간 글자라면 쓰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있겠지만,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아기가 적고 있는 글자들은 모두가 다 다른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고 기울어지면서, 그 선들이 맞닿아 만든 글자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170쪽)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가 행복이나 미래를 가늠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서로에게 말을 잃은 채 등을 지고 있던 그와 아내 사이에서, 아이는 스케치북 안에 혼자만의 세상을 조용히 그려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달라서, 그래서 아이에겐 더욱 예쁘고 신나는 세계였다.”(171쪽)

 

“정화는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꼭 안아 주었다. 이 좁고 혼란스러운 공간 속에 아이가 만들고 싶은 것이 얼마나 거대한 세계였던 건지. 그녀는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여기 이 공간을, 그 작은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다시 짓고 있었던 건지. 이미 환이의 눈 속엔 갖가지 생명체로 가득한 또 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234쪽)

 

정화라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는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직장을 얻게 되어 기뻤는데, 그로 인해 기초수급 대상에서 탈락해 오히려 살림이 더 곤궁해진다. 고작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엄마의 병원비며 동생들의 학비며 생활비에 집세까지 마련하다보니 구두 하나 살 돈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언니가 채근하여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비상계단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었다.

 

소설 말미에 정화와 수현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건물 속 갇힌 상황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거나, 이미 죽음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공간에서 그동안 수현을 괴롭힌 성 정체성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된 일행 중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 마음껏 잘 살아. 여기에서 돈이 의미가 있겠니, 그깟 몽뚱이가 의미가 있겠지?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이 의미가 있니? 가정을 꾸리고 새끼 낳고 잘 사는 그런 미래가 의미가 있겠니? 그저 이 징그러운 계단을 같이 오르내려줄 사람이면 되겠지. 흔들리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토닥이면서 살아.”(232쪽)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 김비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쓴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읽은 적이 있다. 하여,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절망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녀가 나보다는 훨씬 진실에 더 가까운 지점에 서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면 줄행랑을 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소설이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될만한 작가의 경험담이 먼저 소개되고, 뒤이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이었지만, 그때 그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상은 맴을 돌 듯 매일매일이 닮아 있었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얄팍한 희망의 말들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 내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몰래 숨을 골랐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264쪽)

 

철없는 낭만자주의자인 나의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입에서 발음된 ‘이상한 절망’이라는 말이 전혀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천박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재건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고유하고 진실한 그녀만의 품격이 느껴진다. 작가 김비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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