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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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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160층 초호화 백화점 비상구 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소설의 유일한 공간이다. 한 가족과 그들이 갇힌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다 만난 몇몇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전부다. 주인공 남수의 과거가 회상으로 채워지긴 하지만 소설 속 현재의 시간은 한 나절에 불과하다. 단편이나 중편이라면 모를까 장편소설로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연거푸 읽었다. 박진감이 넘치는 내용에 압도되어 한 번. 결말을 보기 위해 쏜살 같이 달려온 인생을 뒤늦게 후회하듯, 상징과 은유와 우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이 즐기면서 다시 한 번. 그렇다고 평온한 마음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이 갇힌 건물 비상계단의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듯이, 작가의 절망적 상상력이 그려낸 소설 속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 속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남수는 개인사업자로 트럭을 매입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집착을, 그의 몸은 버티지 못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허리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세금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거기에 온전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태어난 아들 환이그의 삶을 옭아매기 위해 운명이 내던진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의 아내도 몸이 성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수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초호화 백화점을 찾아 간 것은 마지막이라는 그의 아내 지애의 간청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희망이 없는 불우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최후의 결심을 이행하기 전에 근사한 한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화점의 부실공사로 인한 사고가 원인이 되어 비상계단에 갇히게 되면서 죽으려고 찾아간 장소에서 살기 위해 비상계단을 끝도 없이 오르내리는 형국이 되고만 것이다.

하지만 남수 일행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딱히 절망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의사로부터 아이가 뇌손상으로 평생 장애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수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던 것이다. 아이의 증상이 경도의 근무력증을 반복적으로 앓은 경력이 있는 아내가 복용한 약물에 대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저 문밑으로 던져진 체납고지서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희망 없음 속에서도 그가 한 일이란 그저 소독약 냄새가 나는 벽을 힘없이 몇 번 걷어찬 것이 전부였다.

 

그럼 그를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신념을 잃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희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에게 희망은 어떻게든 세상이 돌아가야 하니까, 모두들 제자리를 지키도록 세뇌시키는 속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눈앞에서 아래위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나선형 계단도 누군가 그에게 쏘아올린 조롱일 뿐이었다.

 

그나마 아이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고 말을 배워가면서 누군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을 때, 남수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는 살의가 가득했다. 주민센터의 사회 복지사가 놓고 간 자세 교정용 의자에 구겨진 채 틀어박혀 있는 아이를 보면서, 그는 희망이란 것의 비틀린 몸체를 상상하고 있었다.”(15)

 

여기 이 문. 이렇게 꼼짝도 않는 이 문! 아무리 걷어차고 발길질해도 꿈쩍 않는 이 문! 바로 이 문 앞에서 서 있는 게 어떤 건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줄 알아? 이런 문 앞에 서서 당당하다고 어깨를 펴는 꼴이희망을 잃지 말아야한다고 억지웃음을 웃고 있는 꼴이 얼마나 엿 같은 줄 너 같은 놈이 알기나 하냐고!”(93)

 

남수가 발설한 너 같은 놈은 그날 백화점에 들어왔다가 갇힌 사람 중 한 하나다. 이름은 수현. 그가 백화점에 들어온 이유는 성전환 수술을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도를 하기 위해서 건물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사실은 안 남수는 기껏 그 따위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도둑질을 해?”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수현은 마치 봄 햇살을 쬐는 것처럼 고즈넉한 눈빛으로 이렇게 항변한다.

 

그래도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은 삶이라도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난 아저씨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그 따위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거든요.”(84)

 

남수가 괴변이라고 일축한 수현의 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일종의 포석이다. 그 포석의 핵심은 삶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남수가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자신을 조롱하는 희망에 대한 앙갚음을 도모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지금의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구원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수의 아들 환이가 전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소설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환이를 통해 이 세계와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회심의 카드는 다름 아닌 다름이다. 여섯 살 먹은 환이의 손에는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인 남수에게 자주 듣던 말을 떠올려 비상계단 문에 다시라는 글자를 적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탈출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남수를 지치게 하는 요인이 되지만 곧 상황은 반전된다.

계단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애물단지 노릇을 하던 환이는 일행 중 누구보다도 먼저 계단을 올라가 크레파스로 벽에 글자나 숫자를 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붉은 빛깔의 벽에 매달려 환이는 천천히 글자를 따라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에겐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글자들을, 아이는 획을 세고 서로 다른 곳에 획을 교차하며 그리듯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쉽게 한 번에 써내려간 글자라면 쓰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있겠지만,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아기가 적고 있는 글자들은 모두가 다 다른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고 기울어지면서, 그 선들이 맞닿아 만든 글자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170)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가 행복이나 미래를 가늠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서로에게 말을 잃은 채 등을 지고 있던 그와 아내 사이에서, 아이는 스케치북 안에 혼자만의 세상을 조용히 그려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달라서, 그래서 아이에겐 더욱 예쁘고 신나는 세계였다.”(171)

 

정화는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꼭 안아 주었다. 이 좁고 혼란스러운 공간 속에 아이가 만들고 싶은 것이 얼마나 거대한 세계였던 건지. 그녀는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여기 이 공간을, 그 작은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다시 짓고 있었던 건지. 이미 환이의 눈 속엔 갖가지 생명체로 가득한 또 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234)

 

정화라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는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직장을 얻게 되어 기뻤는데, 그로 인해 기초수급 대상에서 탈락해 오히려 살림이 더 곤궁해진다. 고작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엄마의 병원비며 동생들의 학비며 생활비에 집세까지 마련하다보니 구두 하나 살 돈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언니가 채근하여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비상계단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었다.

 

소설 말미에 정화와 수현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건물 속 갇힌 상황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거나, 이미 죽음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공간에서 그동안 수현을 괴롭힌 성 정체성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된 일행 중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 마음껏 잘 살아. 여기에서 돈이 의미가 있겠니, 그깟 몽뚱이가 의미가 있겠지?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이 의미가 있니? 가정을 꾸리고 새끼 낳고 잘 사는 그런 미래가 의미가 있겠니? 그저 이 징그러운 계단을 같이 오르내려줄 사람이면 되겠지. 흔들리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토닥이면서 살아.”(232)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 김비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쓴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읽은 적이 있다. 하여,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절망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녀가 나보다는 훨씬 진실에 더 가까운 지점에 서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면 줄행랑을 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소설이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될만한 작가의 경험담이 먼저 소개되고, 뒤이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이었지만, 그때 그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상은 맴을 돌 듯 매일매일이 닮아 있었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얄팍한 희망의 말들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 내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몰래 숨을 골랐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264)

 

철없는 낭만자주의자인 나의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입에서 발음된 이상한 절망이라는 말이 전혀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천박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재건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고유하고 진실한 그녀만의 품격이 느껴진다. 작가 김비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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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거부 그 후 -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유스리포트 YOUTH REPORT 1
한지혜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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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거의 하루도 손에서 책을 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왜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든 걸까?

책 속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생활에 유익한 알뜰 정보가 듬뿍 담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뿌듯할지언정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대학거부 그 후>를 읽고 난 뒤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든 것은 책을 통해서 정보가 아닌 진실을 접했기 때문이지 싶다.

진실은 아픔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랄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그만큼 아프고 버겁기 때문이리라. 하물며 '누군가의 설움과 차별로 작동하는 학벌사회'의 폐해가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거부를 선언한 젊은이들의 삶이 온전할 리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슬픈 역설이기도 하다. 학벌사회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그들이 나름 성공할 만한 사회라면 이미 그 사회는 학벌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대학거부 그 후>는 2002년, 2008년, 2011년 대학입시거부를 선언했던 여덟 명의 청년들이 선언 이후 자신의 삶과 고민을 풀어 놓은 책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학에는 못 갔지만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식의 성공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흔들리는 자기 기록에 가깝다. 내 기억 속에도 그들이 대학거부선언을 했을 때의 그림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고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나의 무관심 탓일 수 있겠다. 나 역시 그들의 외침에 등 돌린 한 사람의 '거인'이었던 셈이다.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그 어떤 울타리도 없이 맨몸으로 낯선 땅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실은 막막했다. 세상은 등 돌린 거인 같았다. '수능거부'를 통해 우리가 당신에게 품었던 바람을 거인은 빠르게 외면했다. 어제 읽은 신문 기사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듯 우리의 이야기를 뒤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또 다른 청소년들이 수능을 거부하고 온몸으로 세상에 말 걸기를 택했지만, 돌아선 등에 새겨진 무관심은 해가 갈수록 두터워졌다.(여는 글에서)'

인권교육단체 상근 활동가인 한지혜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계속 다니고 졸업을 했다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치러 냈을 것 같다는 점에서 고등학교 중퇴가 대학거부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왜 학교를 그만 둔 것일까?

'입학 첫날부터 학교는 우리에게 밤늦게까지 야자를 시켰다. 야자를 빠지면 다음 날 엎드려서 맞았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점수 경쟁. 의자에 종일 앉아 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자퇴서를 낸 나에게 담임교사는 "너 지금 이러면 나중에 배추 장사나 한다."라는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 '배추 장사'가 뭐가 어때서? 그런 말을 '설득'이랍시고 쉽게 내 뱉을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완전한 '내 자리'가 없었던 건 매번 성적대로 자리가 다시 정해진 탓이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오늘날 우리네 학교 풍경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에 성찰을 요구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학교 풍경을 새삼스럽지 않게 바라본 데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구원이든 철없고 무책임한 탈선이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그(들)를 힘들게 한 것은 이름을 갖지 못한 그들에게 던져진 사회의 서늘한 시선이었다. 분명 여러 가지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있는데도 자신을 설명할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보편적인 길과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해 걸어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 눈빛에 자주 움츠러들곤 했다"는 쓸쓸한 고백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맨몸의 고군분투가 사회적 자아를 눈 뜨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의 말이다.

"2011년 11월 수능 시험이 있던 날,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투명가방끈)'이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그 선언의 제목은 '불안하고 불행한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꾸자'였다. 그때 투명가방끈들의 그 구호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투명가방끈들의 삶은 오늘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불안하고 불행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불안하고 불행한 것은 내가 못 낫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힘을 가진 위치에 서게 되면 나는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인지,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에서 나머지 20%가 지금, 여기에서 또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삶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2010년. 18세의 나이로 다니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퇴한 민다영씨는 자기 주장이 강하긴 했지만 학교를 자퇴할 만큼 유별난 '문제아'는 아니었기에 그의 행보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그는 뒤이어 2011년 대학거부선언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계기가 좀 싱겁다.

유명하다는 스타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들어도 그대로인 언어 점수 때문이었다니. 하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거기에 대학 등록금을 걱정해야하는 처지라면 더욱. 헌데 그에게는 그런 가정 경제와 무관하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학비를 지원하는 것은 부모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니까.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라는 이야기로 내 인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았고, 나의 삶의 경제 정도는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혹시 그 일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는 되레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 살아가는 내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는지, 만족해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왜 그때의 나는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 없이 대학에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종용받았어야 했는지, 그때 내가 필요했던 것은 대학에 가고 안 가고의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그에게 '대학거부는 한 번의 이벤트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고, 선택에 따른 대가가 해가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삶에서 더 진하게 다가왔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터득한 듯하다. 자신이 학창시절 동안 국가나 사회, 혹은 기성세대로부터 당연히 제공받아야 마땅한 것들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현실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항변이 정당하고 건강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렇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건강함'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건강함은 젊음의 상징인 싱싱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원색의 싱싱함이 깨지고 다치고 할퀸 자리에서 생겨난 일종의 면역력 같은 거다. 물론 그 면역력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막강한 (하지만 못난, 못나서 아픈) 학벌사회를 거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동안 그들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것들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 또한 그 면역력을 얻게 된 것 같아서 기쁘고 고맙다.

지면 관계상 여덟 명의 저자 저마다의 아픈 진실과 결코 건강하지 못한 이 사회에 영양제 삼아 억지로라도 떠먹여 주고 싶은 그들의 멋진 주장과 발언들을 다 소개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책을 읽다가 깊은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저절로 밑줄을 긋게 된 흔적들을 한 두 줄만이라도 남겨볼까 한다.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야말로 청소년들이 가져야할 가장 큰 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공교육 내에서 청소년들은 중고등학교 내내 대학을 위한 공부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면 성적에 맞춰 그 중에서 돈을 제일 잘 벌 수 있는 과로 진학한다. 뭔가 뒤죽박죽이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대학거부선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 고예솔, <졸업장 없이 살 수 있을까>

사회에서 말하는 안정성의 길에서 멀어지려 하는 나도, 그 안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누군가도, 모두가 불안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다양한 삶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방향의 삶을 선택해도 충분히 안전하다면, 어느 순간 벼랑 끝에 설 수도 있다는 불안감 없이 살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좀 덜 해도 될 텐데. - 김해솔, <원하는 건 자유>

보통 대학 가는 것을 '선택'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대학이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을 가지 않는 삶을 상상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러게 살아갈 방법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조건이나 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고를 뿐이다. 그런 걸 정말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 정열음, <이 미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대안적인 꿈을 꾸고 있다면, 혼자 그 꿈을 상상하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꿈을 꾸고 키워 가기를 권하고 싶다. 혼자 현실의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기는 힘들지만 함께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꿈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할 사람들이 중요할 뿐 우리는 꼭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 박고형준,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 너는 대학에 가라는 소리는 거칠게 말하면 힘을 가지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끝내 힘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대학 같은 건 갈 수 없는 약자들의 '현재'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지금의 무관심과 냉소는 그들에 대해서 너희가 못난 건 너희의 책임이니 생긴 대로 알아서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 김남미, <못난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면>

나는 이 책을 나처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교사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자퇴를 하겠다고 찾아온 제자에게 "너 지금 이러면 나중에 배추 장사나 한다" 따위의 말 말고 좀 더 멋진 말을 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도 세상 끝에서 고민하다가 나타난 제자에게 건넬 수 있는 선물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그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리고 진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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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교실 벗 교육문고
조향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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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미의 <시인의 교실>의 첫 장을 넘긴 것은 일주일 전쯤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 사이 나는 지리산을 포함해서 두 번 산행을 했고, 기차를 타고 여수 바다와 동백을 보고 왔다. 물론 책은 늘 배낭 속에 있었다. 한 번인가는 배낭에 책을 넣은 줄로 알았다가 나중에야 없는 것을 알고 황급히 시내버스에서 내려 다시 집에 다녀오기도 했다. 개학을 며칠 앞둔 나를 위한, 나를 배려한 행복한 여행이었다. 개학하면 나보다는 아이들이 우선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처음 1부와 2부를 읽을 때만해도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내가 쓰겠노라고 지인들에게 호기 있게 말을 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저자에게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객관적 관찰자인 독자로서의 책 읽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여수 오동도에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저자 조향미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샘의 <시인의 교실> 읽으면서 여수 오동도로 가고 있어요. 책이 이렇게도 좋아도 되는지 파도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육사의 <광야> 한 꼭지만으로도 책값이 아깝지 않겠다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눈물이 날만큼 좋았어요. 아이들과의 발랄한 수업이야기와 샘의 깊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산문과 샘이 소개한 빼어난 인용시들이 조화를 이루는 매혹적인 책이에요.'    

 

하지만 3부와 4부를 읽으면서 나는 몸과 마음 두루 화학적 변화를 겪는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고, 서평을 쓰겠다고 떠들고 다닌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극한 ‘우주적 모성’에 나의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영혼을 데인 남짓이었다. 몸과 마음이 으슬으슬 추웠다. 어렵사리 책을 소개하는 글을 써야하는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나 한 번 더 행복한 독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 짧게 쓰려고 한 이유다.               


이 책의 1부와 2부에 등장하는 <시인의 교실>의 아이들은 발랄하고 풋풋하다. 입시교육에 지친 어린 영혼들을 바라보는 문학 교사 조향미의 눈길에도 고통보다는 기쁨이 어려 있다. 육사의 <광야>와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단편 <몌별> 등을 가르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모습에 가슴이 멍했지만, 그 뒷맛은 언제나 싱싱하고 향긋한 봄나물을 씹는 것 같았다. 남학생들에게는 절대로 <몌별>을 가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동료 교사의 당부도 무시한 채 수업을 강행한 뒤에 쓴 수업후기에도 그런 밝고 긍정적인 기운이 감돈다.

       

‘문학교사는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매개자다. 좋은 작품을 써준 작가가 고맙고 잘 읽어준 독자도 고맙다. 그런 감사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왜 저자의 동료교사들은 남학생들에게 <몌별>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저자가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리라. 아마도 조향미에게 그 상처의 진원지는 ‘가르침의 불가능’이었을 터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지 않은 교실에 대한 아픈 성찰을 뒤로 한 채 문학 교사 조향미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다. 어떻게? 그리고 그 결과는?


‘수업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좀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너무도 아름답고 멋진 작품이라 여학생들에게는 아주 반응이 좋았다. 남학생들은 안 될 거라고들 하는데, 나는 너희 문학적 감수성이 여학생 못지않음을 증명하고 싶다. 앞으로 몇 시간은 집중해야한다. (…) 은근히 경쟁심을 자극한 발언에 걸려든 것인지, 학생들은 보통 때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 준다. 대여섯 시간의 수업을 마친 뒤 받아 본 남학생들의 글, 나는 앞으로 남학생들을 적극 옹호하기로 했다. 여학생 같은 감성은 물론, 여학생들이 보지 못했던 부분을 깊이 읽어내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성차별은 금물이다.’


물론 늘 이런 기분 좋은 결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날은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과 교사 조향미 사이에 뜻밖의 논쟁이 벌어진다. 장발장이 자기를 추적하고 다니던 자베르 경감으로부터 장발장 진범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격심한 갈등을 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법정에 나가 자수를 하는 대목에서다. 한 아이가 그 장면을 보고 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고 말을 한다. 저자는 아이의 반응이 뜻밖이어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묻는다. 이런 경우에 너희들은 진실을 밝히지 않겠니? 그러자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답한다.


“다시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데 뭣하러 스스로 밝혀요?”  


고백하자면, 이 대목에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꼴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저자는 아이의 반응이 뜻밖이었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웃음은 아이들 쪽보다는 저자를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장발장 스스로도 자신이 자수할 것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이거 미친 짓 아냐?” 라는 식으로 자신을 힐난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몇 줄을 더 읽어가다가 이내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이들과의 대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진실 없음의 진실!)이 내게도 자못 심각한 사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악법이 문제라면 그 법을 따르지 않고 도망도 치고 싸움도 해야 하지만, 무고한 사람이 자기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있다면 그건 밝혀야하지 않니?”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사람이 없을 걸요. 선생님이라면 그러실 수 있겠어요? 만약에 사형을 당한다면요?”


“흠, 그럼 내가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나 때문에 사형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이런 상황이야. 내가 죽을 것인가. 다른 사람을 죽일 것인가?”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어쨌든 자기가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결국, 문학수업을 통해 장발장의 숭고한 정신을 가르치고자 했던 조향미는 대다수 아이들로부터 동의를 끌어내기는커녕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매도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래, 이렇게 말을 하는 나도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나 살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할지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이렇게 숭고한 정신이 드러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감동받으며 그것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일어나기는 해야할 것이다. 나약하고 이기적인 나를 반성하고 나도 이렇게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종교며 학문이며 예술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처음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이런 현실의 묵직함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의 발랄한 수업이 가능했던 지점에서였다. 그렇다고 그런 찬란한 순간마저도 현실이 녹록했던 건 아니다. 가령, 저자와 아이들이 육사의 <광야>를 공부하는 장면은 지금도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눈이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바로 이 대목에서 한 아이가 이렇게 외친다. 


“저는 안 뿌릴 거예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열 개 반의 <광야> 마무리 수업을 새로 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뒤에도 <광야>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수업이 된 것도 이 대답 때문이었다. 그날 그 아이와의 대화가 이렇게 이어진 뒤의 일이다.


“씨앗을 안 뿌리겠다는 말은 용기가 없어서 못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이네?”

“내가 열매를 따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뿌려요?”

“흠…그래? 그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열매들은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

아이는 순간 멈칫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가르치는 시인의 교실의 풍경은 아름답다. 물론 이때의 아름다움은 문학교사 조향미가 창조해낸 것이다. 열악한 텃밭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듯이 말이다. 아이들과 주고받는 대화도 무척 살갑다. 이때의 살가움도 시인이자 교사인 조향미의 작품이지만 그 원형은 아이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공부=성적=입시’라는 등식만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삶은 원형을 잃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교사 조향미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왕자와 희망버스>라는 제목을 단 저자의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퍽 신선하게 읽힌다. 이 꼭지 글은 어느 해 모 대학교 정시 논술문제를 학생들과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논제 파악부터 쉽지가 않을 것 같은 난해한 문제를 저자는 비교적 손쉽게 풀어나간다. 논술은 결국 삶에서 나온다. 삶(시대)에 대한 해석이 탁월해야 좋은 글도 써진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시인의 교실의 아이들은 차츰 시인을 닮아가면서 자기 성장의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슬프다. 무엇보다도 가르친다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다고 고백한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학교는 사회(시대)의 반영인 것을. 학교에서 소사(小事)를 하고 계시는 소사(지금은 주사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교사나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유럽 등 다른 몇 선진국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데,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는 한낱 유토피아에 불과한 그런 세상이 이미 와 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일까?


저자는 그런 삶(시대)에 대한 생각을 엄살도 과장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얀 종이에 꾹꾹 눌러 쓴 글씨처럼 아프게 드러낸다. 이런 사유나 글쓰기 행위가 저자에게는 일종의 ‘수용’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라는데, 나만 안 슬프고 안 아프며 살 수 있나.’라는 고백이 말의 허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문학교사로만 한정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서두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교사이자 시인인 저자가 지극한 ‘우주적 모성’으로 쓴 산문들을 읽다보면 피가 맑아지면서 없었던 영혼이 생겨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아, 나도 여생이나마 진실한 삶을 궁구하며 살고 싶어진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인 이유다.       


지금 저자는 부산 광안리 바닷가 근처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바다와 한 번 제대로 사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퇴근길이 불쑥 들었는데 돈이 없어서 매매는 엄두도 못 냈고 애초부터 집을 살 생각도 없었단다. 제4부 <고향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시인 조향미의 아름다운 산문 몇 줄을 소개하면서 책의 가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한다.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바다는 늘 시원(始原)을 생각나게 한다. 어쩌면 이렇게 넘실거리는 물을 담고 있는 거대한 별이 있다니! 우주인이 지구에 온다면 저 거대한 물 그릇, 바다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이제 바닷가에 집을 얻어 살면서 비나 바다를 맘껏 즐긴다. 오랜 소망을 이루었다. 허공의 빗줄기가 어떻게 바다에 휘날려 떨어지는지, 무량한 물의 바다가 작은 빗방울을 어떻게 담쏙담쏙 받아먹는지 원 없이 바라본다. 비바람 속에서 넘실대는 파도에 생의 근심도 씻어 보낸다. 하늘도 바다도 아득한 이 밤, 어느 시원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토닥토닥 빗소리가 사무치게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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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 - 풀꽃선생의 남중 이야기 벗 교육문고
안정선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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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이란다. 하여, 풀꽃을 좋아하든지 풀꽃 같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교사이겠거니 했다가 책 뒤표지에 실린 다음 글을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꽃얼굴이 작아서 예쁜 줄 모르는 풀꽃들

고개 숙여 들여다보면 다 달라요, 다 예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 보아주는, 저는 풀꽃선생입니다. 


‘꽃’이 작아서가 아니라 ‘꽃얼굴’이 작아서라니! 나도 풀꽃을 무척 좋아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반 무릎자세로 앉아 고 작고 앙증한 꽃을 가만 들여다본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지만 나는 꽃을 보았지 꽃얼굴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풀꽃선생처럼 꽃에서 꽃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풀꽃선생 안정선(서울 경희중학교)은 23년째 남자 중학교에서만 근무하고 있는 국어교사다. 안 교사의 눈에 비친 요즘 중학생들의 모습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학교의 현실에 투영된 아이들의 모습이 그 두 가지를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안교사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다는 데서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우리 아이들, 수업시간에 정말 ‘졸라’ 잔다. 난 그걸 또 열심히 깨우고 다닌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선배 교사는 자는 아이들 손을 꼬옥 잡아준다고 한다. 그러면 미안해서 살며시 깨는 아이도 있지만 선생님 손을 꼭 잡고 편히 자는 아이도 있단다. 나도 처음에는 손을 꼬옥 잡아 주지만 이내 등짝을 후려치고 옆구리를 찌르며, “애들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하는 엄마 코스프레까지 한다.


깨우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스스 일어나던 아이들도 수업 만족도 조사를 할 땐 “깨워주셔서 감사하다.”, “우릴 깨우는 걸 보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 이런 말을 쓰는 걸 보면 자기들도 그냥 자게 두는 걸 원한 건 아닌 것 같다. (215쪽)’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물론 안 교사도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졸라’ 자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 답을 아프게 재확인하는 쪽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큰 틀로만 사고하다보면 놓치기 쉬운 또 다른 진실의 얼굴을 발견해내는 것이 풀꽃선생 안정선의 능력이자 미덕이다. 뭔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걸맞은 근거들을 모아놓은 듯한 정형화된 글을 읽을 때의 식상함이 안 교사의 글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풀꽃선생의 제자 중에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영화 공부를 하는 녀석이 있단다. 스승의 날 몰래 집을 찾아와 우편함에 선물과 편지를 넣어 두고 가기도 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을 연습장 한 권 가득 직접 손으로 베껴다 주기도 했던 꽤 감성적이고 순수한 아이였다는데, 안 교사의 기억에는 녀석의 해맑은 얼굴보다는 까만 머리꼭지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하긴 일년 내내 잠만 잤으니까 그럴밖에. 하지만 졸업 후에 청년이 되어 찾아온 제자가 중3 시절 수업시간에 배운 한 편의 시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안 교사는 놀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어려운 시를 자면서도 듣고 있었다니! 아마도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썼음직한 풀꽃선생의 자작시가 참 멋지다. 마치 아이들의 영혼으로 들어가서 쓴 듯하다. 

         

누군가 나를 깨울 때까지


내가 잠들었다고 해서 아주 세상을 등지려는 건 아니외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울 사람을 기다리고 있소.

언젠가 내가 스스로 깰 때까지든,

누군가 진짜로 내 잠을 깨울 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는 잠시 엎디어 있을 테요.

그렇다고 아주 잠들었다고 생각지 마오.

이렇게 납작 엎드려서도 세상을 다 보고 있소.

이렇게 딴 세상을 꿈꾸는 듯 보여도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있소.

우리는 주워듣고도 큰다오.

그러니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마오.

그러니 제발 우릴 버리지는 마오.


안 교사의 글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아니, 묵직하면서도 따뜻하다. 이 또한 학교 교육을 바라보는 안 교사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지만, 무거울 수도 있는 것을 조금은 덜 무겁게 느끼려는 긍정의 안간힘이 글의 행간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환하게 아픈 형용모순의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중에서 근무하는 안 교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딸은 안 교사가 가르치던 학교아이들과 같은 학년인 적이 있었다. 중3 때였다. 딸아이의 심리검사 결과 ‘불안’이 높게 나왔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이맘 때 여자아이들은 많이들 그런다며 안심을 시키지만 잠깐 호전된듯하던 증세가 다시 3~4년째 지속되자 안 교사의 고민은 깊어진다. 


다행히도 딸의 불안심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해소가 된듯하다. 책에는 아예 그런 언급이 없다. 안 교사가 딸아이의 불안심리를 거론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안 교사는 성인인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도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심지어는 딸아이의 우울과 불안이 자신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도 모른다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뭇 어둡던 글의 분위기가 곧 반전된다.


'딸아이는 프라이팬 손잡이가 사람 쪽으로 놓여 있으면 와서 야단한다. 이러다 툭 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느냐고. 불안은 한편으로는 사고를 예방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오늘도 수업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수업준비를 한 번 더 한 덕분에 아이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맙다. 나의 불안!(243쪽)’


안 교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꿈이 교사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로 ‘시골학교 선생님’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그녀의 꿈을 부추긴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아프게 경험한다. 그 일로 야학을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교사의 꿈마저 접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만, 풀꽃선생은 오히려 그 일로 교사로서 더욱 단련된다. 안 교사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뒤바뀐다. 


‘안이하게 살면서 자기가 좋은 교사인양 착각하는 선배교사들을 많이 보아 왔다. 나 자신도 어느 새 그런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 일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책망의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에 감사할 일이다. 아무 데서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때 나는 가장 나태한 교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247쪽)’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소년에게 물들다〉와 2부〈이 죽일 놈의 사랑〉에는 유쾌하고 엉뚱한 소년들의 매력이 담뿍 담겨 있다. 답답한 학교 안에서도 쉴 새 없이 기발한 놀이를 만들어 내는 건강한 모습과 사춘기 소년들의 거칠고 미숙한 심리와 특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을 교사만이 아닌 사춘기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그만큼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자식 간에 서로 소통하는데 큰 보탬이 될만하다.

      

3부〈천진하고 무식한 아름다움이여>와 4부 <학교를 그리다>는 자신의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천진난만한 소년들과의 수업 이야기를 통해서 교사와 학교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한다. “샘은 우리가 무식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주실 거죠?” 하는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에 풀꽃선생은 그 천진한 무식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한편, ‘교사는 어떻게 늙어 가는가?’ ‘그래도 학교는 버릴 수 없다.’ 등의 글에서 드러나는 풀꽃선생의 중견교사로서의 교육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뭉클하고 깊다. 책의 말미에 가서는 내내 담담하던 어조가 갑자기 뜨겁게 솟구치기도 한다.       


‘가끔 ‘왜 대안학교를 꿈꾸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산다’는 일리치의 오래된 담론을 새삼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나…… 학교에 한번 와 보라. 먼지투성이 좁은 책걸상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은 왜, 유학도 가지 않고 대안학교로 가지도 않고 홈스쿨링도 검정고시도 택하지 않고 저기 앉아 있는가. 학교가 죽어야 한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기 앉아 있는 아이들 중에는 ‘원수 같은’ 사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많다. 아니 어쩌면 엉덩이가 터지게 매를 맞을지라도, 소매가 반들거릴 만큼 새까맣게 때가 앉은 교복을 입고서라도 ‘학교에는’ 나오는 그들에게 학교는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다.(295쪽)’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풀꽃선생이 중학교가 아닌 고등학교(특히 인문고)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이런 풋풋하고 온기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인 체험의 자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인문고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엇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3년차 풀꽃선생 안정선의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을 강권하는 이유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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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 윤지형의 교사탐구 2
윤지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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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형의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교육공동체 벗)은 제목이 다소 상투적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상투적이듯이. 그런데도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을 말해서는 안 되는 저자(혹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긍정적 세계관 때문이리라. 하여, 나는 책머리에서 드러난 그의 절망이 다소 당혹스러웠다.

'학교의 변화는 가능할까? 10년 전, 20년 전이라면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변화 가능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고. 그러나 이제 내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이 되었다. (…) 바람직한 변화의 가능성이 희망이라면 그렇지 못한 변화 가능성은 절망이며 저주인 것이다. 나는 갈수록 절망이며 저주로서의 학교의 변화를 현실로 경험한다. 희망은 허상이고 절망만이 진실임을 시시각각 확인한다고 해야겠다. 어쩔 것인가. 이리 되고 말았다.(8쪽)'
     
다행히도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캄캄한 밤길이 내 앞으로 뻗어 있다. 대낮에도 캄캄한 길. 캄캄함. 이것만이 지금 내겐 가장 리얼리티이고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느낀다. 캄캄함 속에서 나는 겨우 안심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캄캄한 길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 하나를 발견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불빛은 홀로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길을 갈 수 있다. (…) 이 세상 어딘가에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안다.(12쪽)'

세상의 어둠은 그대로인데 어둠 속에서 그가 돌연 안색을 고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들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들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는 절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희망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다시 쓸 수밖에 없게 된 건 아닐까. 

이 책은 저자가 수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서 만난 '한 점의 불빛'과 '옹달샘'이 된 13명의 교사들의 삶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눈물겨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학교는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저자 윤지형의 르포 형식의 글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교사가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직접 쓴 '그 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주인공은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저자 이상석(부산 신도고) 선생님이다.

'어느 가을 문학 시간, 이상석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책걸상이 모두 뒤로 밀쳐진 교실 바닥에는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눈빛 맑은 여고생들은 그 낙엽 위에 삼삼오오 앉아 그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30대 중반의 청년(!) 교사였던 그는 저 예쁘기 그지없는 처녀 아이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너무도 고맙고 행복해서.(26쪽)' 

그 '사랑'과 '행복'이 크디컸던 만큼 해직 사태를 맞은 이상석과 처녀 아이들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음은 두말이 필요치 않다. 또한 쫓겨난 스승과 스승 잃은 제자들의 학교 밖에서의 '만남'까지 감시하고 방해하고 불온시하고 폭력까지 행사했던 타락한 언론, 교육청관료들, 한심한 몇몇 교사들 때문에 아이들이 겪은 슬픈 혼란과 오직 그로 인한 이상석의 아픔과 절망도…(27쪽)'

이 책의 장점은 그가 만난 교사들의 다양한 면면에 있다. 저자가 탁월한 필력으로 복원해 놓은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내면의 모습과 함께 우리 교육의 지형도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몇 편 제목만 열거해도 속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순결한 양아치들이 나는 좋다(조영선)'
물만골 처녀선생은 무엇으로 사는가(김정애)
학교는 혁신이 될 수 있을까?(이범희)
교실에서 행복하시나요?(박현숙)
'교사-교장' 그 오래된 경계를 넘다들다(고춘식)
'작고 아름다운 학교'를 위한 연가(조영옥)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나라' 교사였다.(한경숙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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