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 -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
김기택.조용미 외 지음, 이종민 엮음 / 태학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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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모든 시인은 먼저 한 사람의 독자였다. 처음부터 시인이었던 사람은 없다. 어느 날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읽고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가 단순한 나무가 아니게 되고, 바람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게 되었다. 언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떨림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순간 이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를 읽기 전과 후의 인간은 더는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시인들은 바로 그 순간을 들려준다."-('엮은이의 말' 중에서)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라는 부제가 달린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이종민 엮음)라는 멋진 제목의 책에 푹 빠져 있는데 아내가 폰으로 뉴스를 보며 뭐라뭐라 말을 건다. 읽은 대목을 다섯 번도 넘게 다시 돌아가서 읽다가 끝내는 한 마디했다.

 

"여보 나 지금 꼭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있는데..."

"응 알았어.“

 

그 후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아내가 옆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만큼 책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 아내가 어디 있나 하고 보니 방에 들어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마음이 짠했다. 시가 뭐라고.

 

"시는 이상한 존재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권력을 쥐지도 못하고 시장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총칼을 멈추게 하거나 굶주린 사람에게 당장 빠을 건네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삶의 가장 가혹한 순간마다 시를 찾는다."-('엮은이의 말' 중에서)

 

자잘한 일상이 주로 시의 소재가 되는 나로 예를 들자면, 가혹한 순간만 시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응 알았어"하고 난 뒤 언제인지도 모르게 방으로 들어가 새우잠에 든 아내를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가 시가 찾아오는 순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은 그런 이유로 책에 더 깊이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나의 좁고 안이한 시 세계를 뼈아프게 돌아보게 한 매혹적이고 뭉클하고 아프면서도 영양가 풍부한 시적 경험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좋은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많은 진실을 품고 있는 시다. (...) 나는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막 달아나고 싶다. 그런 이상한 흉내를 내고 싶다."_조용미/이상, <꽃나무>

 

"박용래는 울고 난 뒤 얼굴에 남은 소금기처럼, 몇 알의 빛나는 소금 결정처럼 언어를 아껴두듯 시를 썼다. 시를 읽으면 그의 결기에 정신이 얼얼해질 정도다. 우는 건 현실에서, 그러나 시에서는 감상 없이 매섭고 징하게!"_박연준/박용래,<장대비>

 

최근에 매우 인상적으로 읽은 한인 독일 작가 이미륵의 장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한 안삼환 작가께서는 '추천의 글'을 통해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우선 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로 상대방을 판별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어지는 추천의 변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획책한 비상계엄이 '대국민 호소용'이었다고 말하는 이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다.(...) 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시인이라면, 이런 언어 앞에서 자기 자신이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낄 것이다. (...) 속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후안무치한 거짓말쟁이를 면하자면, 그리고 혹시 나 같은 별종을 만나 금세 '시도 모르는 인간'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이 '시인들의 밤하늘'에서 정명正名의 지혜를 얻는 것이 좋으리라.“

 

이쯤해서 슬쩍 털어놓자면, 이 책의 저자인 마흔한 명의 시인 중에 내 이름도 있다. <아프고 환한, 첫사랑 같은 시-천양희, '직소포에 들다'>라는 꼭지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천양희 시인의 <마음의 수수밭은> 내게 첫사랑 같은 시집이다. 첫사랑이되, 피가 철철 흐르는 첫사랑이다. 시집 정가는 삼천 원. 그 무렵, 나는 동네 정형외과 의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사십 대 초반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허리 디스크 때문이었는데 하루 진료비가 이천팔백 원이었다. 머리가 명석한 편이 아닌 내가 오래 전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아내가 병원에 가리고 준 삼천 원을 들고 하루는 병원으로, 다음 날은 서점으로 향했던 것이다.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을 것이다.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댜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나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이하 생략)

 

책에서는 시 전문이 소개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양희 시인, 당신 스스로도 "내가 이 시를 아끼는 것은 내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는 절창 <직소포에 들다>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에 곁들여, 제자들에게 생일시를 써주다가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진실해지는 것"이었던 그 무렵의 고해성사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집 정가가 삼천 원이었을 때 하루는 병원으로, 하루는 서점으로 향했던 그때처럼 어쩌면 나는 아내가 주는 쥐꼬리만한 용돈을 일부 축내어 자꾸만 책을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할지도 모르겠다는.

 

요즘 AI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시를 쓰는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한심한 일이다. 그 결과가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에이아이의 유혹에 빠진 시인 지망생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이 책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떻게 낮은 소리에서 커다란 울림이 나오는 것일까. 그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말에서 해방된 전혀 다른 성질의 말이었다."_김기택/김종삼<북치는 소년>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런 세계를 좋아했다. 힘없는 사람이 끝내 밀려나지 않는 세상. 끝내 한 발 밀려나더라도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는 꼿꼿한 결기 같은 것."_신미나/신동엽, <세모 이야기>

 

"민중서관 구석에 앉아 기형도의 시를 번갈아 가며 읽었다. 우리의 희미한 청춘과 곰팡이 핀 회한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상실이 지나간 자리에 지독한 현실이 앉아 있었다."_지연/기형도, <비가2-붉은 달>

 

"시인은 말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불우와 불운을 다해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미안하고 내가 아니어서 고맙다고 최선을 다해서 운다."_안현미/최승자<일찌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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