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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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날씨가 풀리고 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기운도 다가오고 얼음은 해동되어 세상을 온기하게 다스립니다. 최근이 저의 경황은, 물론 언제부터 이러한 제 현황을 추신에 달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학잡지의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습니다. 약 4년 전에 문학동네 5년 구독을 신청했는데 이제 앞으로 1년 남았군요. 그 당시에는 그래도 과감한 결정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번 글은 인간의 성과 미래 학문의 방향성에 대한 글입니다. 내용이 깊은 글은 아니니 읽으시고 나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이 아름답고 자신과 상이한 성이 신비롭다기까지 하는 환상을 품는다. 이런 성적 환상은 인간의 삶의 윤활유와도 같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마치 바퀴벌레가 자신의 알을 까는 것처럼 더럽고 역겨운 것에 다름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칠 수도 있으리라.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기보다는 추잡하고 이물감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나도 곤고한 나의 성적경험에 마뜩잖은 이런 이론을 내세우는 게 적이 머슬머슬한 게 내 억하심정과도 진배없을 것이지만, 굳이 발품을 팔아 성관계를 맺는 것보다 이런 더러운 세계를 체험하지 않는 게 더 가당한 도리라는 걸아는 지금 나서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인간의 성적 환상은 도리어 내습에 가깝다. 이런 환상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속하지 않았을 터이고, 우리의 조상이 안배하여 새로운 자손을 창출하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엄존하지 않았으리라.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아득한 삶의 물골을 좇으면서 나는 내겐 지극히 데면데면한 소위 ‘연애’라는 기이한 개념을 난망해왔던 내 자신이 퍼뜩 부끄러워진다. 물론 내 삶에 두문불출 이와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 않을지는 지금 여기서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선득적으로 내 짐승적인 본능을 추려내는 것이 인간 이성에 요구하는 바보다 더 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가 그런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본능을 따라가다 보면 삶이 의미가 없어지리라는 불안감도 쉽사리 지워버리지 못하는 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성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진실을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인문학자였던 게 분명하며, 그의 이론이 영원히 우리 삶의 저변으로까지 파고들어 우리들의 구조를 철두철미하게 정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물 보듯 가볍게 보는 것은 착오에 가까우리라.

요컨대 성을 규준화하는 많은 요소들을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개념명사 하나로 끝장을 내려고 한다는 생각의 어설픔에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종의 시차적 차이 즉 인간의 관점으로 자연을 판단하려는 지극히 명백한 ‘인간위주의 판명적 구명’을 비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실로 자기위주로 세상을 구분 지으려는 이기심의 발로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므로, 결국 ‘자연에 대한 지배’가 인간을 왕으로 만들고 모든 다른 종을 저열하게 끌어내리는 하나의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지 인간의 성만을 최고의 것으로 추앙하고 외경의 눈길을 보내는 인간적인 태도 하나만으로는 우리가 우주의 관리자라고 하는 권좌에 등극할 어떤 필연적 당위성도 확보하지 못할 터이다. 우리 인간은 보다 이성(異性)에게 냉엄하고 냉철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의 성적 본능을 공격적인 이성의 심판대에 세워야 할 차가운 비판적 태도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결코 이러한 우주의 섭리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서투른 몸짓을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우주의 관리자로서, 세계의 왕으로서 세상을 지배할 엄정한 권위를 얻게 되는 바이다. 좀더 우리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인문학역시 인간관점 위주의 과거 기성학문에서 탈피하여 탈아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간의 여러 제요소들을 구분하고 특정 지을 철저한 과학 중심에 입각한 지식적 기반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좀더 냉정하게 거듭나라. 이게 현대의 새로운 학문의 모토일 것이리라.

 

 

덕계동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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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기도법 - 불교신행총서 1 불교신행총서 1
일타 / 효림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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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광수의 무정을 읽었습니다. 실로 가슴이 벅차고 사람을 흐느끼게 하는 감동의 대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광수가 중년이 넘어서 불교에 심취했듯 불교의 정신이란 대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엄숙한 길입니다. 저는 대가는 아니지만 불교가 상징하는 바를 깊이 배우려고 합니다. 인간을 초월하여 즉 죽음과 삶의 세계를 초극하여 신의 저편에 입적하여 탈속한 선험의 세계를 깨우치려 하면 평생이 가도 부족함을 아는바 한시도 버리지 말고 삶을 진심으로 살고자 하는 게 제 뜻입니다.

 

 

 

 

 

 

야심은 욕심을 추상적으로, 범주를 과장하여 키운 하나의 욕망에 불과하다. 야심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자라면, 무명을 버리고 즉 자기 안의 온갖 미혹과 번뇌를 떨치고 일어서 일체개고한 사바세계를 잊고 열반숙적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결코 타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허방지방함을 정회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호연지기하게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희망의 불야성조차 그릇된 걸로 삼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 진정한 선禪을 추구하는 입도자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어떤 묘방한 계책이나 반간지계도 이러한 자들의 도를 구하는 자세의 일변을 막아설 수는 없는바, 나는 구도자의 깨끗함을 무릇 이해하고 모름지기 승려로서의 청신함을 지향하는 일편단심의 태도를 지켜 삼라만상의 세계를 일축하여 내선일체로 표양하고자 하는 마음의 눈을 펼쳐 보일 것이리라. 세계를 떠도는 천애지각한 혼들을 일소에 부치고, 세계에 잔존하는 극소수의 맑은 자들 곧 나의 지기지우들과 상합하여 세상을 증도하여, 중생들의 무지함을 구제할 것이다. 한 인간이 성공하고자 대갈일성하는 것은 그럴 자신이 없는 게 부소부지이다. 오히려 자신이 있는 자는 자신의 의취를 표현하지 않으며 미상불 그들 욕심쟁이의 무지를 비웃고 그들보다 더 멀리 보며 거시적으로 미래를 예언하고 미시적인 세계를 꿰뚫어 묘파하는 게 군자로서 해야할 마땅한 도리라고 낙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과 포장은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게 하거니와 도리어 한 사내의 뜻을 방해하는 마성적인 힘으로서 스피노자적 실체를 추구하는 절대정신을 꺾는 불순물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사업가란 돈을 탐하지 않고, 진정한 문호란 노벨문학상을 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담담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마음을 비워 세상에 자신의 힘을 이바지할 수 있도록 절절한 자세로 신묘하게 호랑이가 발톱을 감추듯 자신의 능력을 감추는 것이다. 최고의 실력가는 야심가가 아니라 승려다. 그들은 열정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 평안한 마음 즉 대정의 상주불변한 자세에서 자신의 영혼을 누이려고 하지만 야심가들은 세상을 유위변전한 원자와 단자의 세계로 상정한다. 이는 바로 대사상가의 한계를 드러내는 발로에 전혀이다. 필시 한계를 극복하려면 모든 욕을 다 버리고 수양하는 자세로 자신을 변용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깃발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그렇다는 점을 깨우치는 자와 같이 사물의 본질을 바로 아는 혜안을 가지고 있어야 함이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는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진배없다. 왜냐하면 욕심이 눈을 가리고, 귀를 멀게 하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자는 이미 책 앞에서 탈아하여 아공의 경지에 입적해있다. 책과 하나가 되어,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어 육조단경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독서삼매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니 그 누가 이 학자를 막아설 수 있으리오?

예부터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잃지 않는다는 현인들의 말이 세간에 떠돌았다. 목적론적인 고군분투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 다름 없다. 만약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설정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목적론의 세계에서 탈피하여 이미 기투되어 있는 자신을 넘어서서 더이상의 윤희의 수레바퀴에 굴러가지 않는 자신의 법을 구해야할 터이다. 자신을 회향하고 그리고 나서 세상 중생들을 회향해야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요, 그다음이 세상과의 싸움이니라. 욕심따위로 자신의 미래를 상정하는 자에게는 불행만이 가득할 진저!

서양의 목적론적 체계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세계에서 자유자재로 뛰어 노는 선악의 피안에서 엄존하는 자유의 영혼으로서 우주 전체를 하나로 표상하는 게 바로 학자로서의 나의 임무일지라.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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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한국인 이형진의 공부철학
이형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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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인간은 결코 잘못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최고의 쾌감을 주는 것만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할 길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군자가 아닌 난봉꾼들에게는 섹스가 최고의 쾌락일 수 있겠고, 얼빠진 미식가들에게는 음식이 그것일 텝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듯 지고의 쾌락, 쾌락 중의 쾌락이란 정신의 안정입니다. 즉 대정의 단계라는 것이죠. 대정의 단계란 열반을 뜻합니다. 열반이라 하여 승려들의 깨달음의 마지막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글을 써서 엄청난 관념의 모험적인, 생각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관념에 관념이 꼬리를 물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철학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열반으로 드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철학적 글쓰기에서 지고의 쾌락을 얻는 이는 드뭅니다. 그것은 몇몇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죠.

다음에 병원에 갈 때에는 각성제를 타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뇌의 신경망을 활성화시키고 더 자극을 얻기 위해서이죠. 학문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주저하겠습니까?






1. 서구철학을 한다는 것.

서구철학은 동구철학과 달리 엄연히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왜 인고 하면 깨달음 가령 돈오와 대오를 중시하는 불교적 혜학을 지반으로 하고 있는 동구 철학은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기초적 개념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다듬어가는 사학적 철학으로서의 서구 철학과는 달리 깨달음과 무기록을 위시한 극히 ‘무언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서구철학은 철학이라는 표양을 가지고 있지만 엄청난 양의 공부가 없이는 결코 자신의 뜻을 명실공이 천명할 수 있는 당위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 그와 달리 동구철학은 오직 깨달음과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현인들이 자신의 법서를 태워버린 것만으로도 그 근거는 묵직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철학의 과거 史적 기록에서 주장하는 개념들을 전문적으로 꿰뚫고 자신이 사상 존재했던 모든 서구철학자의 이론을 습득했다고 여겨진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펼칠 당위성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의 모든 철학사상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서구 철학사에 족적을 남길 수가 없거니와 당신이 진정으로 거대담론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과거 아득한 시절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모든 기록들을 아울러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인생관을 고색창연한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서구철학자는 자신이 후학을 위한 교량역할을 한다는 데 모종의 비의를 느끼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든, 자식을 낳는 것이든 인간의 삶이란 자손을 위한 가교를 세우는 데 다름 아니다. 철학사상가가 철인이 되어서 심지어 신이 되어서 진정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게 불가능한 게 현실이거늘 만약 자신이 知의 끝에 도달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부소부지하게 당신은 승려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승려가 철학자들보다 더 사유가 깊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른 것이다. 승려들은 언어를 모른다. 승려는 언어로부터 도망친 자다.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을 승려들의 혜안이라고 상정한다면, 승려들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의 세계로 입적할 수 있는 하나의 파노라마를 제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고작 하는 말이 짧은 설법이고 이 설법 역시 일종의 이론이거니와 이에 논리학적인 측면이 매우 간과되어 있기에, 나는 철학을 한다는 서구철학가인 ‘학자’와 동구철학가인 ‘승려’들의 이분법적인 이항을 제시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나 학계에 이바지하는 정도가 비교불문하게 크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둔다.


승려는 자기 혼자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패배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똥 싸는 기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내가 말한 승려들은 자신의 저서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지속적으로 불교적 심미가 담긴 혜학적인 저서들을 해가 다르게 배출하는 학자적 승려는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철학사상가라고 부름 직하다.

당신들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서구철학자들이 평생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며, 정진을 하고 수양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은 항시 관념의 모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학계는 그들 철학사상가들로 인해 활발히 뜨겁게 짚여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자 중에서도 철학과 사상, 문학을 다루는 학자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으며, 그 전범이 바로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는 1년에 300권에 달하는 학술서를 마치 밥을 씹는 우걱우걱 미친 듯이 읽어나갔다. 바야흐로 인문학을 천시하는 이 사회가 오직 기술의 진보를 위해 달리는 지금 모든 이념의 싸움은 종식된 지 오래되었거니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이미 학자들이나 보는 고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수학과 과학에 이바지한 공과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큰 영감을 받아 세워진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사상은 모든 학문의 왕이다.

서구철학을 전공하는 필자의 야심은 학문의 모든 제분야를 아울러 총체적인 집약으로서의 학문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아리스토텔레스를 미친 듯이 파고 있지만 너무나도 개념적이고 지극히 현학적인 관념의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순순히 진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멈출쏘냐? 다음 주 월요일, 나는 각성제를 타러 정신병원에 간다. 각성에를 복용함으로써 내 지성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미친 듯이 관념의 모험에 집중할 것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거니와 극좌파였고 글을 위해서 각성제를 과다로 먹어 몸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학문을 위해서 죽어도 후회 없다. 학문의 재미와 그 오묘한 이치는,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치 하나의 계시와 같이 내게 적시하는 영원불멸한 학술정신을 나는 끝내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야말로 나와 같은 선지자가 걸어야 할 가장 귀족적이고 고매한 영역이요,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 되어 인간을 초극하고 신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길은 오로지 이뿐일 테니. 나는 학문을 하라고 신에게 선택받은 자다. 내가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학문을 할 것인가. 세계의 미래는 내 손 안에 있다. 오늘도 내 서재에서 고요히 학문과 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미석 박준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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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김 / 이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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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봄이 오니 우선 돈 생각부터 나네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확보하려면 오로지 돈만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고급 담배파이프도 하나 장만해서 동호회에서 토론할 때 가지고 가야하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150만원짜리 초대형 한한대사전도, 필요한 철학사상서들도, 그리고 8인치 좌대목탁도 구매해야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돈이 문제군요. 돈에 사람 나고 죽는 지경까지 이른 미국에서 물 건너온 신자유주의가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심지어 학벌세습이라고까지 하며 학문도 역시 돈에서 나니까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번 글은 뜻이 없는 두문불출한 수필입니다. 간단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음악은 지나갔다.

음악을 들어도 예전처럼 감흥이 없다. 내가 남성이자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언어에 일신을 다 바쳐 더이상 감수성의 내밀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과거에는 음악에 도취하여 심원한 감성을 체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소중함을 구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소싯적 내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고 내 영혼의 로맨틱함은 그 누구와도 견줄 바가 못 된다고 느꼈다. 그러나 커가면서 세상과 동화되어 고고한 파토스의 소유자는 로고스의 계승자로 전화돼 버렸다. 예전에는 음악에서 도와 철리를 구하였지만 지금은 책에서 이를 구한다. 글쓰기, 철학적 글쓰기가 내 삶의 본령이 되었고 나는 거기에 권을 진중이 두어 학문의 도도한 전승자로 거듭났다. 저번에 오디오를 사기 위해 돈을 썼다면 이젠 책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쓴다. 나는 책을 밥 먹듯이 씹는 기계에 다름 아니다. 내가 가야할 업계는 학계이고 나는 이 도정에서, 그 도상에서 삶의 본질을 탐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돈과 권세에 대한 욕심이 없어 오직 청신하게 내 생활을 담담히 꾸리고 싶다. 그렇다. 음악이 심금을 울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고귀한 감정이지만 막다른 길에서 다른 통로, 탈출구는 있는 법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음악보다는 철학사상이 먼저 아니겠는가. 나는 이 변화/변용의 순간에서 새롭게 진일보한 나의 자아와 무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리멸렬한 번뇌/오뇌를 버리고 명약관화하게 내 형이상학적/선험적인 스피노자적 실체를 확보할 것이다. 글, 학문은 내 전부다. 따라서 음악은 지나갔다.

 

2. 헌책방의 이용

사람들은 새 책을 구입함에 있어 뿌듯함을 느낀다지만 난 오히려 헌책을 애용하는 편이다. 주로 새 책과 같은 수준의 매우 깨끗한 책들을 구매한다. 나무를 종이로 가공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가면 고갈될 것이다. 그리고 먼지에 수북히 쌓여있는 헌책들을 다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재화낭비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매하면 헌책방들은 부유해질 것이고 그러므로 더이상 읽지 않는 다른 이의 책을 더 들여올 것이다. 헌책을 읽는다는 건 실로 도덕적/윤리적인 일이다. 물론 찢어지고 물에 적셔진 책들이나 도무지 상태를 봐줄 수 없는 책들은 폐기 처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헌책은 새책과 같이 깨끗하여 우리가 새 책을 구입하기 전에 헌책을 구입한다면 국가재정에 큰 이바지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서재를 헌책들로 가득 채운다. 언제부터 서재를 증축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에 없다. 그러나 책들이 쌓여갈 수록 내 마음의 양식 또한 채워져 간다. 우리는 무릇 일단 미리 주어진 것부터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필경 부국강병으로 가는 선형적인 길을 따라갈 수 있을 터이다.

 

3. 선禪

선이란 무엇인가. 선의 논리는 아직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중국의 고서들이 최근 쉬운 한역판으로 나와 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지만 선이라는 미시적인 체계는 몇 가지 설화와 수사적 기교로 상정될 수 없는 모든 현인들의 오를 수 없는 고지와도 같다. 서구철학이라고 무조건 비非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언어로써 중국의 고승들이 규정한 선과 흡사한 논리를 펼친바 있다. 따라서 서구든 동구든 일약 위대한 철학의 정점에 달한 추상의 논리를 선의 범주에 위치시킨다고 그르다는 견해를 펼치는 건 협소/편협한 시점이리라. 오히려 법구의 ‘법구경’보다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더욱 선적이라고 지칭하는 판단이 학자들에게는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스피노자는 동양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일에 반대하였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과 같이 범신론적인 관점에서 신 즉 인간의 피안에 위치한 불가지적 존래를 구명하려고 애썼고, 그의 기술적인 접근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선’적이다. 그는 내양의 위대성을 정치하게 철학적 글쓰기로 고명한 철학가의 전범이 되었거니와 신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꿋꿋함을 바람직한 윤리학적 규범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기야 철학이란 게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인간의 무기라 가늠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 신에게 의문을 품는 지점에서 곧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고, 종교에 대한 의문과 허구성을 묘파하는 게 진정한 철학자의 의무라고도 판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신을 숭배하지도 말고, 제자들보고 자신을 우상시 하지마라고 하였다. 그러나 돈과 종교적 권력에 굶주린 많은 불자들이 석가모니를 신성시하고 가없는 보시금을 챙겼으며, 그 육조혜능조차도 자기파벌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저서에 자기파벌의 우월함을 찬양했으니 그 누가 불교의 숭고함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독자들은 종교인으로 인해 종교가 흙탕물로 뒤범벅되는 걸 참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종교인들이 가교를 함으로써 발생하고 진보하는 것이니 종교인과 종교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리라.

우리는 고대 중국 현인들의 말마따나 무언의 ‘지혜로운 자’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자신의 지성과 지혜 즉 높은 도를 남에게 전달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므로, 어쩌면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도달해있어 이를 글로 풀어쓰거나 다른 이에게 설법할 정도로 쉽거나 단순하지 않으므로 사회에 드러나지 않았을 터이다. 예컨대 활의 최고의 대가는 활을 쏘지 않아도 상대방을 기선제압으로 이길 수 있고 검의 대가는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옛말과 같이 그들은 자신의 도를 드러낼 필요성을 체감치 못했을 것이다.

선도 이와 같다. 선이란 불교적 지혜의 최고 경지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이야말로 요즘에 남발하는 ‘도’가 아닌 진정한 ‘도道’에 가깝다고 논할 수 있을 것이다.

 

4. 목탁을 이용한 수행.

나는 불교적인 수행을 할 때 목탁을 이용한다. 눈을 감은 채 목탁을 치면 어떤 고매한 사유의 운무가 내 안에 깃드는 듯하다. 목탁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 중에서 제일 청명하다. 어떤 이는 목탁이 표층적/피상적인 불교 도구라 언명할 수도 있으나 사실 목탁은 제일 중요한 수행도구의 하나이다. 목탁소리는 치는 이로 하여금 대오각성시키고 범여일여의 경지에 입각하게 만든다. 현재 나는 5.5인치 목탁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모이면 8인치 좌대목탁을 구입할 예정이다. 목탁을 이용한 선적 수행법은 어쩌면 좌선이나 산타기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도인을 이끄는지도 모른다. 물론 산타기도 매우 중요하다. 요즘 나는 너무 게을러서 산을 예전과 같이 자주 타지 않는다. 따라서 목탁을 이용해 법을 구하는 것이 사실상 내게 전부가 돼버렸다. 목탁의 신비는 아직까지 실제적인 연구결과가 밝혀진바 없다. 그러나 나는 목탁이 구도자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목탁이야말로 내 사유를 극한까지 증진하는 유일한 수단이길 나는 믿고 있다. 여러분도 불교에 관심이 많으면 목탁 하나를 구매하시라.

 

5. 취직을 결심.

나는 알바 자리를 하나 알아보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노동자의 피와 땀을 느껴보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단지 돈이 필요해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부르주아의 노예로 종속당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과 같은 저임금의 국가에서는 노동은 힘들고 주어지는 건 적다. 그래도 어쩌랴? 아이들에게도 돈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알바 하는 건 시간 낭비에 진배없다. 그래도 내 기본적인 학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시급한 관건이라 칭할 수 있겠다. 한 달에 130만원 정도 주는 데서 10시간 씩 근무하는 걸 찾고 있다. 한 달만 하고 그만 둘 것이다. 나는 노동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다. 구도자야말로 시간에 가장 시달리는 족속이니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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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사 - 전12권 중원문화 철학사 5
Akademiya Nauk SSSR 지음, 이을호 옮김, 임석진 감수 / 중원문화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p.s 책은 쏟아져 나오고 장서가의 한 명으로서 돈이 부족한 사태에 처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언젠가 제 미래에 기여할 이 귀한 책들이 보배가 될 것임은 확실한데 부모님께서는 이를 쓸데없는 사치의 하나라고 보시고 책을 구입하는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책을 구입할 때 단지 물건을 구입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 구입행위가 학문을 하는 사람들 요컨대 저자들에게 금전적으로 미력하나마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 여기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학술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교를 제 손으로 건설한다는 생각에 책을 한권씩 사는 것입니다. 특히 철학 학술서를 구입할 때 제 만족감은 극에 달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철학책들은 아주 적은 발매부수만 찍어내어 사실상 큰 판매실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후학들이 이런 일반인들의 눈으로 볼 때 희귀하다고까지 여기는 영역에 투자할 때 비로소 학자들의 생활고는 배격되는 것이며 우리는 좀더 완성된 결과물을 받아들고 만족할 수 있겠지요. 아직도 플라톤이나 그 외 위대한 철학자나 학자들의 책이 번역 안 된 게 많고 한국 베테랑 학자들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생성된 이론들이 책으로 엮이지 않은 게 많습니다. 우리가 좀더 학문에 관심을 갖고 비대중적인 학술서들을 구입해 읽을 때 숨어있는 천재들도 발굴되는 법입니다. 이번 글은 비대중적인 학문인 철학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을 주제로 썼으니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현실을 지반으로 하는 모든 사고思考

철학은 어떤 천재적인 기획으로 이루어진 모종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니다. 인간은 현실제반적인 외부적 자극에서 자신의 사상유희를 시작하지 않고서는 별달리 새로운 사고의 공전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요컨대 신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이전에 현실의 힘겨움과 자연의 잔악함을 먼저 직시하고 그 지점부터 신에 대한 의구가 드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모든 학문의 왕이라고 한들 그 왕을 추대한 것은 모든 감각적/경험적 자극이므로 또 이들로 이루어진 분과의 학문들이므로, 왕이 사회성원으로 인해 발을 디디듯 철학 역시 이성Logos의 반대라 불리는 감각적이고 경험칙적인 자극을 지반으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리라. 따라서 ‘철학’ 하나의 독보적인 발전으로는 위대한 학문적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 다종댜양한 학문의 분과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성숙해야지 이들의 총체가 바람직하게 응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철학’ 하나에 집중하기 이전에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아우를 수 있는 원지적인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예컨대 ‘아인슈타인’같은 최상의 물리학자나 ‘괴델’과 같은 대천재 수학자가 철학으로 돌아서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 학문의 분과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자들 심지어 정치인들까지도 마침내는 철학으로 전회하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때때로 발견하곤 한다. 또한 가령 ‘야스퍼스’나 ‘베르그송’같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시작은 다른 학문에서 했으나 종점은 철학으로 귀결하는 귀일한 일자一者를 택했다는 것은 이와 같은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리라. 철학은 요컨대 모든 학문의 종점이자 완성이며, 모든 행위의 종착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홀로 선험적인 위치에서 독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따금 단속적으로 생각하는 위대한 추상의 사고들은 모두 그 높은 지점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하나의 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각은 결코 현실과 분리될 수 없으며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요컨대 비이성적/비합리적 사상은 철학이라기보다는 ‘무속’이나 ‘종교’에 가까운 것이다. 철학은 과학의 산물이며 관념론적이지만 지극히 유물론적인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들을 사고로 삼투압시킬 때 비로소 그곳에서 ‘철학’이라는 추상적인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철학자를 기이한 사람이라 여길 편견도, 전혀 철학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사람을 통속적이라고 비난할 여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글에서 사변에서 사변으로 이행하는 연역적인 과정이 결코 위대한 대사상을 탄생시킨다는 필연적인 근거를 반박할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현실의 반어적인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니까. 필경 철학이 존재하는 범주는 거의 모든 학문과 사史적 역사를 통틀고 있으므로 모름지기 철학자란 모든 학문의 종합적인 총체자라 하는 게 보다 적합한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항시 겸손함을 미덕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며 결코 현실과 분리되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철학이 가야할 길은 오로지 현실과 과학의 이중합주의 틀 가외의 것에서는 존속하지 않는다. 전화든 이행이든 명증한 섭리란 사적 유물론 구조적인 방식밖에는 어떠한 기술적인 접근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철학이란 일반인에게 결코 어렵고 도달 불가한 경지가 될 것이 아니라 보다 친숙하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서 따스한 조언으로서 다가와야 하는 것이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고 대부분의 선진국으로 도약한 국가들이 철학을 매우 고귀한 학문의 영역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 한국시민은 좀더 철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무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측면으로 하락시킬 게 아니라 지극히 세련된 학문의 분과로서 마땅히 귀하게 점철시킬 당위적인 근거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학문의 왕 ‘철학’을 간과하고 좌시하는 행태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기술과학이 빠르게 진일보하고 있다지만 이에 맞춰 철학이라는 이름의 ‘정신’이 비례하게 따라가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좀더 좁혀 말해 한국사회에 화려한 미래는 결단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이유를 토대로 나는 당신들에게 철학을 권면하는 것을 기필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필수적인 안건 중에 이 관건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요가 된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따라서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철학은 곧 ‘미래’이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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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2012-12-2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진봐라 ㅋㅋ

1 2014-01-2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