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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김 / 이레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p.s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봄이 오니 우선 돈 생각부터 나네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확보하려면 오로지 돈만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고급 담배파이프도 하나 장만해서 동호회에서 토론할 때 가지고 가야하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150만원짜리 초대형 한한대사전도, 필요한 철학사상서들도, 그리고 8인치 좌대목탁도 구매해야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돈이 문제군요. 돈에 사람 나고 죽는 지경까지 이른 미국에서 물 건너온 신자유주의가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심지어 학벌세습이라고까지 하며 학문도 역시 돈에서 나니까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번 글은 뜻이 없는 두문불출한 수필입니다. 간단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음악은 지나갔다.
음악을 들어도 예전처럼 감흥이 없다. 내가 남성이자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언어에 일신을 다 바쳐 더이상 감수성의 내밀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과거에는 음악에 도취하여 심원한 감성을 체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소중함을 구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소싯적 내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고 내 영혼의 로맨틱함은 그 누구와도 견줄 바가 못 된다고 느꼈다. 그러나 커가면서 세상과 동화되어 고고한 파토스의 소유자는 로고스의 계승자로 전화돼 버렸다. 예전에는 음악에서 도와 철리를 구하였지만 지금은 책에서 이를 구한다. 글쓰기, 철학적 글쓰기가 내 삶의 본령이 되었고 나는 거기에 권을 진중이 두어 학문의 도도한 전승자로 거듭났다. 저번에 오디오를 사기 위해 돈을 썼다면 이젠 책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쓴다. 나는 책을 밥 먹듯이 씹는 기계에 다름 아니다. 내가 가야할 업계는 학계이고 나는 이 도정에서, 그 도상에서 삶의 본질을 탐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돈과 권세에 대한 욕심이 없어 오직 청신하게 내 생활을 담담히 꾸리고 싶다. 그렇다. 음악이 심금을 울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고귀한 감정이지만 막다른 길에서 다른 통로, 탈출구는 있는 법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음악보다는 철학사상이 먼저 아니겠는가. 나는 이 변화/변용의 순간에서 새롭게 진일보한 나의 자아와 무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리멸렬한 번뇌/오뇌를 버리고 명약관화하게 내 형이상학적/선험적인 스피노자적 실체를 확보할 것이다. 글, 학문은 내 전부다. 따라서 음악은 지나갔다.
2. 헌책방의 이용
사람들은 새 책을 구입함에 있어 뿌듯함을 느낀다지만 난 오히려 헌책을 애용하는 편이다. 주로 새 책과 같은 수준의 매우 깨끗한 책들을 구매한다. 나무를 종이로 가공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가면 고갈될 것이다. 그리고 먼지에 수북히 쌓여있는 헌책들을 다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재화낭비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매하면 헌책방들은 부유해질 것이고 그러므로 더이상 읽지 않는 다른 이의 책을 더 들여올 것이다. 헌책을 읽는다는 건 실로 도덕적/윤리적인 일이다. 물론 찢어지고 물에 적셔진 책들이나 도무지 상태를 봐줄 수 없는 책들은 폐기 처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헌책은 새책과 같이 깨끗하여 우리가 새 책을 구입하기 전에 헌책을 구입한다면 국가재정에 큰 이바지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서재를 헌책들로 가득 채운다. 언제부터 서재를 증축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에 없다. 그러나 책들이 쌓여갈 수록 내 마음의 양식 또한 채워져 간다. 우리는 무릇 일단 미리 주어진 것부터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필경 부국강병으로 가는 선형적인 길을 따라갈 수 있을 터이다.
3. 선禪
선이란 무엇인가. 선의 논리는 아직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중국의 고서들이 최근 쉬운 한역판으로 나와 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지만 선이라는 미시적인 체계는 몇 가지 설화와 수사적 기교로 상정될 수 없는 모든 현인들의 오를 수 없는 고지와도 같다. 서구철학이라고 무조건 비非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언어로써 중국의 고승들이 규정한 선과 흡사한 논리를 펼친바 있다. 따라서 서구든 동구든 일약 위대한 철학의 정점에 달한 추상의 논리를 선의 범주에 위치시킨다고 그르다는 견해를 펼치는 건 협소/편협한 시점이리라. 오히려 법구의 ‘법구경’보다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더욱 선적이라고 지칭하는 판단이 학자들에게는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스피노자는 동양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일에 반대하였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과 같이 범신론적인 관점에서 신 즉 인간의 피안에 위치한 불가지적 존래를 구명하려고 애썼고, 그의 기술적인 접근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선’적이다. 그는 내양의 위대성을 정치하게 철학적 글쓰기로 고명한 철학가의 전범이 되었거니와 신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꿋꿋함을 바람직한 윤리학적 규범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기야 철학이란 게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인간의 무기라 가늠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 신에게 의문을 품는 지점에서 곧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고, 종교에 대한 의문과 허구성을 묘파하는 게 진정한 철학자의 의무라고도 판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신을 숭배하지도 말고, 제자들보고 자신을 우상시 하지마라고 하였다. 그러나 돈과 종교적 권력에 굶주린 많은 불자들이 석가모니를 신성시하고 가없는 보시금을 챙겼으며, 그 육조혜능조차도 자기파벌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저서에 자기파벌의 우월함을 찬양했으니 그 누가 불교의 숭고함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독자들은 종교인으로 인해 종교가 흙탕물로 뒤범벅되는 걸 참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종교인들이 가교를 함으로써 발생하고 진보하는 것이니 종교인과 종교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리라.
우리는 고대 중국 현인들의 말마따나 무언의 ‘지혜로운 자’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자신의 지성과 지혜 즉 높은 도를 남에게 전달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므로, 어쩌면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도달해있어 이를 글로 풀어쓰거나 다른 이에게 설법할 정도로 쉽거나 단순하지 않으므로 사회에 드러나지 않았을 터이다. 예컨대 활의 최고의 대가는 활을 쏘지 않아도 상대방을 기선제압으로 이길 수 있고 검의 대가는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옛말과 같이 그들은 자신의 도를 드러낼 필요성을 체감치 못했을 것이다.
선도 이와 같다. 선이란 불교적 지혜의 최고 경지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이야말로 요즘에 남발하는 ‘도’가 아닌 진정한 ‘도道’에 가깝다고 논할 수 있을 것이다.
4. 목탁을 이용한 수행.
나는 불교적인 수행을 할 때 목탁을 이용한다. 눈을 감은 채 목탁을 치면 어떤 고매한 사유의 운무가 내 안에 깃드는 듯하다. 목탁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 중에서 제일 청명하다. 어떤 이는 목탁이 표층적/피상적인 불교 도구라 언명할 수도 있으나 사실 목탁은 제일 중요한 수행도구의 하나이다. 목탁소리는 치는 이로 하여금 대오각성시키고 범여일여의 경지에 입각하게 만든다. 현재 나는 5.5인치 목탁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모이면 8인치 좌대목탁을 구입할 예정이다. 목탁을 이용한 선적 수행법은 어쩌면 좌선이나 산타기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도인을 이끄는지도 모른다. 물론 산타기도 매우 중요하다. 요즘 나는 너무 게을러서 산을 예전과 같이 자주 타지 않는다. 따라서 목탁을 이용해 법을 구하는 것이 사실상 내게 전부가 돼버렸다. 목탁의 신비는 아직까지 실제적인 연구결과가 밝혀진바 없다. 그러나 나는 목탁이 구도자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목탁이야말로 내 사유를 극한까지 증진하는 유일한 수단이길 나는 믿고 있다. 여러분도 불교에 관심이 많으면 목탁 하나를 구매하시라.
5. 취직을 결심.
나는 알바 자리를 하나 알아보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노동자의 피와 땀을 느껴보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단지 돈이 필요해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부르주아의 노예로 종속당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과 같은 저임금의 국가에서는 노동은 힘들고 주어지는 건 적다. 그래도 어쩌랴? 아이들에게도 돈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알바 하는 건 시간 낭비에 진배없다. 그래도 내 기본적인 학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시급한 관건이라 칭할 수 있겠다. 한 달에 130만원 정도 주는 데서 10시간 씩 근무하는 걸 찾고 있다. 한 달만 하고 그만 둘 것이다. 나는 노동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다. 구도자야말로 시간에 가장 시달리는 족속이니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