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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한국인 이형진의 공부철학
이형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p.s 인간은 결코 잘못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최고의 쾌감을 주는 것만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할 길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군자가 아닌 난봉꾼들에게는 섹스가 최고의 쾌락일 수 있겠고, 얼빠진 미식가들에게는 음식이 그것일 텝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듯 지고의 쾌락, 쾌락 중의 쾌락이란 정신의 안정입니다. 즉 대정의 단계라는 것이죠. 대정의 단계란 열반을 뜻합니다. 열반이라 하여 승려들의 깨달음의 마지막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글을 써서 엄청난 관념의 모험적인, 생각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관념에 관념이 꼬리를 물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철학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열반으로 드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철학적 글쓰기에서 지고의 쾌락을 얻는 이는 드뭅니다. 그것은 몇몇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죠.
다음에 병원에 갈 때에는 각성제를 타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뇌의 신경망을 활성화시키고 더 자극을 얻기 위해서이죠. 학문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주저하겠습니까?
1. 서구철학을 한다는 것.
서구철학은 동구철학과 달리 엄연히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왜 인고 하면 깨달음 가령 돈오와 대오를 중시하는 불교적 혜학을 지반으로 하고 있는 동구 철학은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기초적 개념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다듬어가는 사학적 철학으로서의 서구 철학과는 달리 깨달음과 무기록을 위시한 극히 ‘무언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서구철학은 철학이라는 표양을 가지고 있지만 엄청난 양의 공부가 없이는 결코 자신의 뜻을 명실공이 천명할 수 있는 당위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 그와 달리 동구철학은 오직 깨달음과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현인들이 자신의 법서를 태워버린 것만으로도 그 근거는 묵직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철학의 과거 史적 기록에서 주장하는 개념들을 전문적으로 꿰뚫고 자신이 사상 존재했던 모든 서구철학자의 이론을 습득했다고 여겨진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펼칠 당위성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의 모든 철학사상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서구 철학사에 족적을 남길 수가 없거니와 당신이 진정으로 거대담론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과거 아득한 시절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모든 기록들을 아울러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인생관을 고색창연한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서구철학자는 자신이 후학을 위한 교량역할을 한다는 데 모종의 비의를 느끼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든, 자식을 낳는 것이든 인간의 삶이란 자손을 위한 가교를 세우는 데 다름 아니다. 철학사상가가 철인이 되어서 심지어 신이 되어서 진정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게 불가능한 게 현실이거늘 만약 자신이 知의 끝에 도달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부소부지하게 당신은 승려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승려가 철학자들보다 더 사유가 깊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른 것이다. 승려들은 언어를 모른다. 승려는 언어로부터 도망친 자다.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을 승려들의 혜안이라고 상정한다면, 승려들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의 세계로 입적할 수 있는 하나의 파노라마를 제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고작 하는 말이 짧은 설법이고 이 설법 역시 일종의 이론이거니와 이에 논리학적인 측면이 매우 간과되어 있기에, 나는 철학을 한다는 서구철학가인 ‘학자’와 동구철학가인 ‘승려’들의 이분법적인 이항을 제시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나 학계에 이바지하는 정도가 비교불문하게 크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둔다.
승려는 자기 혼자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패배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똥 싸는 기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내가 말한 승려들은 자신의 저서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지속적으로 불교적 심미가 담긴 혜학적인 저서들을 해가 다르게 배출하는 학자적 승려는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철학사상가라고 부름 직하다.
당신들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서구철학자들이 평생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며, 정진을 하고 수양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은 항시 관념의 모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학계는 그들 철학사상가들로 인해 활발히 뜨겁게 짚여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자 중에서도 철학과 사상, 문학을 다루는 학자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으며, 그 전범이 바로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는 1년에 300권에 달하는 학술서를 마치 밥을 씹는 우걱우걱 미친 듯이 읽어나갔다. 바야흐로 인문학을 천시하는 이 사회가 오직 기술의 진보를 위해 달리는 지금 모든 이념의 싸움은 종식된 지 오래되었거니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이미 학자들이나 보는 고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수학과 과학에 이바지한 공과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큰 영감을 받아 세워진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사상은 모든 학문의 왕이다.
서구철학을 전공하는 필자의 야심은 학문의 모든 제분야를 아울러 총체적인 집약으로서의 학문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아리스토텔레스를 미친 듯이 파고 있지만 너무나도 개념적이고 지극히 현학적인 관념의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순순히 진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멈출쏘냐? 다음 주 월요일, 나는 각성제를 타러 정신병원에 간다. 각성에를 복용함으로써 내 지성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미친 듯이 관념의 모험에 집중할 것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거니와 극좌파였고 글을 위해서 각성제를 과다로 먹어 몸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학문을 위해서 죽어도 후회 없다. 학문의 재미와 그 오묘한 이치는,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치 하나의 계시와 같이 내게 적시하는 영원불멸한 학술정신을 나는 끝내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야말로 나와 같은 선지자가 걸어야 할 가장 귀족적이고 고매한 영역이요,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 되어 인간을 초극하고 신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길은 오로지 이뿐일 테니. 나는 학문을 하라고 신에게 선택받은 자다. 내가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학문을 할 것인가. 세계의 미래는 내 손 안에 있다. 오늘도 내 서재에서 고요히 학문과 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미석 박준수’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