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p.s 날씨가 풀리고 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기운도 다가오고 얼음은 해동되어 세상을 온기하게 다스립니다. 최근이 저의 경황은, 물론 언제부터 이러한 제 현황을 추신에 달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학잡지의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습니다. 약 4년 전에 문학동네 5년 구독을 신청했는데 이제 앞으로 1년 남았군요. 그 당시에는 그래도 과감한 결정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번 글은 인간의 성과 미래 학문의 방향성에 대한 글입니다. 내용이 깊은 글은 아니니 읽으시고 나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이 아름답고 자신과 상이한 성이 신비롭다기까지 하는 환상을 품는다. 이런 성적 환상은 인간의 삶의 윤활유와도 같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마치 바퀴벌레가 자신의 알을 까는 것처럼 더럽고 역겨운 것에 다름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칠 수도 있으리라.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기보다는 추잡하고 이물감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나도 곤고한 나의 성적경험에 마뜩잖은 이런 이론을 내세우는 게 적이 머슬머슬한 게 내 억하심정과도 진배없을 것이지만, 굳이 발품을 팔아 성관계를 맺는 것보다 이런 더러운 세계를 체험하지 않는 게 더 가당한 도리라는 걸아는 지금 나서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인간의 성적 환상은 도리어 내습에 가깝다. 이런 환상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속하지 않았을 터이고, 우리의 조상이 안배하여 새로운 자손을 창출하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엄존하지 않았으리라.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아득한 삶의 물골을 좇으면서 나는 내겐 지극히 데면데면한 소위 ‘연애’라는 기이한 개념을 난망해왔던 내 자신이 퍼뜩 부끄러워진다. 물론 내 삶에 두문불출 이와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 않을지는 지금 여기서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선득적으로 내 짐승적인 본능을 추려내는 것이 인간 이성에 요구하는 바보다 더 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가 그런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본능을 따라가다 보면 삶이 의미가 없어지리라는 불안감도 쉽사리 지워버리지 못하는 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성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진실을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인문학자였던 게 분명하며, 그의 이론이 영원히 우리 삶의 저변으로까지 파고들어 우리들의 구조를 철두철미하게 정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물 보듯 가볍게 보는 것은 착오에 가까우리라.

요컨대 성을 규준화하는 많은 요소들을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개념명사 하나로 끝장을 내려고 한다는 생각의 어설픔에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종의 시차적 차이 즉 인간의 관점으로 자연을 판단하려는 지극히 명백한 ‘인간위주의 판명적 구명’을 비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실로 자기위주로 세상을 구분 지으려는 이기심의 발로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므로, 결국 ‘자연에 대한 지배’가 인간을 왕으로 만들고 모든 다른 종을 저열하게 끌어내리는 하나의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지 인간의 성만을 최고의 것으로 추앙하고 외경의 눈길을 보내는 인간적인 태도 하나만으로는 우리가 우주의 관리자라고 하는 권좌에 등극할 어떤 필연적 당위성도 확보하지 못할 터이다. 우리 인간은 보다 이성(異性)에게 냉엄하고 냉철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의 성적 본능을 공격적인 이성의 심판대에 세워야 할 차가운 비판적 태도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결코 이러한 우주의 섭리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서투른 몸짓을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우주의 관리자로서, 세계의 왕으로서 세상을 지배할 엄정한 권위를 얻게 되는 바이다. 좀더 우리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인문학역시 인간관점 위주의 과거 기성학문에서 탈피하여 탈아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간의 여러 제요소들을 구분하고 특정 지을 철저한 과학 중심에 입각한 지식적 기반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좀더 냉정하게 거듭나라. 이게 현대의 새로운 학문의 모토일 것이리라.

 

 

덕계동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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