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김호경 옮김 / 텍스트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학자는 외길 인생이다. 고독 속에서 오직 정신적인 측면만 부각되는 끝도 없는 지평선이고, 뒤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멀어져만 간다. 왜냐하면 학자는 자신의 존재를 학문으로 해명해야 하므로, 이를테면 ‘토마스 만’이 일상성과 예술성의 양자 간의 대립을 추구한 것처럼, 학자 역시 일상성에 대립되는 학술성이라는 장구한 늪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학문을 통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연역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여기에는 종말이 없다. 항시 무원한 지속의 밑도 끝도 없는 연장으로 그는 고독의 질주를 할 뿐이다. 여기서 학문이 얻어내는 건 단순히 학식만이 아니다. 학문은 일종의 수양이자 정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가치관의 조정을 체감할 수 있거니와 이의 질적 양적 팽창에 입각하여 깊은 사유의 지평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오로지 ‘인간이성’의 각인에만 그 뜻이 있으며, 학문을 한다는 것은 감정을 전혀 배제한다는 걸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비단 오관이 불러일으키는 희노애락 뿐 만이 아니라 고귀한 미학의 영역에 속해 있는 ‘파토스’까지 망라한다. 지식에 전문성과 논리적 엄밀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일시적인 지엽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어깨 너머에 있는 총체적인 ‘절대’를 응시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객관적인 실재’를 깨우치기 위한 구조지향성의 계승자다. 이 우주의 유위변전을 관통하여 조상들이 일구어낸 기초적 질료를 이용하여, 또한 그들이 남긴 문헌을 제반으로 삼아 이를 발전시켜나가 자기만의 독보적인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 이 독보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학문적인 것이고, 이 학문의 영역을 마치 밭을 갈듯 해가 갈 때마다 진일보를 거듭하려면 어떤 졸렬한 사고방식 갖고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학문이란 전적으로 창의성을 요하는 분야이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성공한 학자들이 자신의 ‘독자적 견해’로 그 발로를 연쇄 폭발 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자신의 이론을 천명할 필연적인 열정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의 젊음까지도 거기에 불살라야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현대는 정보화 사회이니만큼 새롭게 창조되는 지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후학들은 줄곧 혼란에 빠지기 쉽다. 이런 카오스는 자기의 지적 강인함과 창발성에 의거해 변별적으로 분류해서 섭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코스모스로의 전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에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개론할 개연성이 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즉 그 고귀한 개인성을 보증하기 위한 보루이다.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저서로 자신의 지성을 입장표명하기 위한 방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기야 학문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 해봤자 ‘사영의 중첩된 집합체’의 하나가 아닌가? 이는 그것이 아무리 첨단으로 기술적 혁신을 거친다고 해도 언제나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성된 ‘사생아’에 진배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문과 인간 제요소 모두는 ‘시대에 아들’일 뿐이리라. 따라서 나는 고와 금을 통합하여 내 이론의 기초적 근거를 세우고, 내 학술적 이념의 ‘묘명’을 밝혀, 전심으로 내 대사상을 창발적으로 제기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살다갔지만 그들은 단순시제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으나, 나는 과거/현재를 관계대명사로 묶어 내 이론적 준칙의 기초로 세울 것이거니와, 내 위대한 ‘사유정신’적 모태의 사영斜影을 사상적 핵심논리로 수미일관되게 개론해나갈 것이리라. 이리하여 나는 과거 내 스승 사르트르가 그랬듯 제2의 세계 학계의 황제로서, 21세기 지성의 최고봉으로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지식의 전승자로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 그 누구도 내 특유의 기술적인 방법으로서의 촌철살인을 막지 못할 것이다. 바야흐로 나는 24살에 뚜렷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었다. 좀 늦게 꿈을 꾼 게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리 내가 직업을 가진 직장인이나 공무원이 되려고 해도 나의 거대한 지적 야심은 나무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질기고 강인한 생명의 ‘현실태’를 내포하고 있을 뿐 이었다. 또한 별처럼 빛나는 ‘가능태’로 충원한 내 가슴을 바라보며 즉 ‘별 헤는 밤’에서 ‘별’을 응시하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따라서 사태는 ‘순수 정신’에 완전무결이 입각해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나는 내 본질을 살려고 언제나 노력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시도에 전혀하다는 걸 직시하고, 성찰의 끝자락에서 나는 꿈결에 빠져 ‘오직 학문하는 것만이 내 ‘존재가치’적 기준의 ‘파생실재’의 뇌관에 불을 밝히는 것’이라는 글이 어지럽게 필기체 문형으로 비석에 각인돼 있는 걸 보았다. 그 꿈을 프로이트가 분석한다면 어떤 인과관계의 도식이 성립될 것인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난데없이 꺼내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이 진짜 내가 사랑하는 학문의 분과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사상가가 되기 원하지만,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의 한 분과에 광적으로 경도된 나머지, 아니 경도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으며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미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의식 세계로 끌어와 치환작업에 나섬으로써 정식적인 심리학의 하나가 되었고, 프로이트, 그가 옳았다는 생각이 귀의 이명처럼 낯설게 들려오는 건 어떤 이유에설까?

그래, 그래, 그래.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일종의 숲길, 하이데거의 ‘숲길(그의 저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철학을 논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의 실존주의 철학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데리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하버마스’ 등의 대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더 나아가 많은 실존주의 작가들에게 테마를 선사하였고, 총체적으로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라 불리며 그 가세를 떨치고 있으니 어찌 그를 피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학인의 외길 인생에 대해 설명했다. 학자는 언제나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저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덕성’이 그의 가슴 속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학인이란 그런 것이다. ‘배움과 앎’을 언제나 몰대상적인 절대자 혹은 우주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포부는 가히 하늘을 뚫을 만큼 광대무비하기도 하다. 하기야 ,수학한다는 것은, 이에 의거해 변증법적 글쓰기를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그리고 필자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에 불과할 것이다. 좀 외롭더라도, 좀쓸쓸하더라도, 좀 가난하더라도, 이렇게 산재한 가없는 난관을 제치고 ‘자신이 상정한 표상 아래 기도 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들은, 그리고 필자는 분발할 것이다. 외길 인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 쓰여진 글입니다. 

 

1

 

어떤 것을 가치판단할 때 우리는 모나드의 상호조합을 꾀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모순성적인 격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 의거하여 유추해볼 때, 대부분의 세상의 제요소들은 양극성을 띠므로, 본디 상대성과 대립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일가一價불가분이 합성되고 마침내 총체된다는 역설적인 합법칙성, 즉 모나드의 상호합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과학론적 우주론의 이러한 역설의 법칙은 따지고 보면 이론의 가능태를 강조한 능동성에 역점을 둔다고 하겠다. 이러한 후험적인 진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능히 딱딱함과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일종의 지해를 보증한다는 점이다. 각 분야의 이론가들이 자신의 표징적이고 주관적인 요해를 창도하지만, 부분적인 것은 언제나 전체에 흡수되는 법이므로, 상호보완성을 완성하는 지식의 변증법적 기술은, 모든 지식이 언제나 집적되고 가산된다는 인류지식의 집대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컨대 과거사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들을 내포한 유명한 이론들을 상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벤담의 공리주의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완벽하게 난공불락의 이론이나 가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변이성이 지속적인 현실태로 존재하는 한, 여태껏 무적의 법칙으로 존립했던 많은 이론과 가설은, 가없이 세월이 흐른다면 그들을 뒤잇는 후학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비틀어 생각해 하나의 내파(Implosion)작용이라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는 다분히 한 사상가로부터 말미암은 비판의 역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요컨대 학설 역시 일련의 기투라기보다는 표투에 가까우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의 도덕에서 선악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점점이 계급도덕의 과잉을 경험하게 된다. 니체의 이른바 르상티망이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살아 숨 쉬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니체가 낡은 철학이라고 비판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과학과는 달리 아무리 세월의 풍파에 묻힌 고대철학이라해도 이를 단순히 지리멸렬하고 오래됨과 동시에 진부한 방식이라고 예단할 착오를 저지르는 근시안적인 사변판단은 자제해야 할 것이리라.

원컨대 좀더 자신의 지성을 멀리 이르게 기투를 유지하고 자기 의식의 지향성의 일차원성의 한계를 극복할 다식을 갖춤과 더불어, 다재다능하고 총명한 사람이 돼라. 단지 경험해보지도 않은 지식의 영역을 지레짐작하지 말며, 자신의 이성이 항상 부분적이고 지엽적이라느 것을 직시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닦달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인간은 일종의 포유류에 불과하지만, 이는 다만 육체의 한계이지 정체의 한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공평성을 극복하고, 보다 정신에 비중을 두는 도인으로서의 정적 현실태를 유의미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미 고대 동양에서 대두된 일종의 관념지향성의 패턴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들 승려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그들은 직관으로 그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이고, 반면 우리는 하나의 공리公利를 세우고, 연역적으로 그곳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크게 보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이 비판적·가변적인 시대에 더 이상 동양철학이 통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의 지향성을 명약관히 조례한다고 볼 수 있겠다.

 

 

2

 

철학을 형식 논리학에 의거하지 않고, 즉 언어학이나 수학, 사회학 및 과학에 의존하지 않은 채 마치 후설의 개념 중 하나인 본질직관을 발현하여, 따라서 변증법적 사고방식에서 이탈하여, 사유가 아닌 사색을 기점으로, 일차원적/선형적인 엔트로피의 법칙 안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본을 회귀시켜야 하는 당위적인 정합성의 개연성을 아스라이 선정해야 한다. 요컨대 진정한 생철학을 근본으로 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학문을 위한 철학이 아닌 진정한 인생의 철학을 통각의 가장 오묘한 부분을 사용해 발견해 하나의 선험적 일반의 철학, 논리나 언어가 도구로 사용된 게 아닌 기억과 이미지와 집적되어온 체험이 질료적 원칙이 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존립평면을 완성시켜야 하는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를테면 철학이란 과학과는 동떨어진 초현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논자들은 나를 샤머니즘의 추종자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기야 종교와 미신으로 그동안 얼마나 순수한 철학들이 핍박/억압받아 왔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사상은 언제나 절대적인 교리와 대립해왔고, 반동적인 당파성을 띠는 스콜라 철학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위세에 무신론자들은 고개를 숙일 뿐 자신의 정신의 피와 땀이 배긴 소중한 저서를 출판화지 못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시대인 만큼 누구나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면 책을 낼 수 있고, 학계에 등단할 수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철학사상계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양상이니 거기서 군계일학으로서 금과옥조적인 언사를 표명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책과의 싸움이 아니다. 책은 단순히 질료에 불과할 뿐 그것 자체가 하나의 사유지평으로서 존재적 생기를 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철학과 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정신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치열한 철학자들의 지적 고군분투는 형이상학에 문을 두드렸고, 이를테면 칸트와 같은 대철학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인식론적 철학인 불가지론을 창시했다. 달리 보면 철학이라는 분야야말로 시대를 초절한 위대한 학술적/정신적 산물이고, 이는 다른 학문의 분과와는 달리 영원불멸의 유산으로서, 아니 그자체로 하나의 존재적 생기를 띠는 영성체가 됨으로써, 과거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 문헌들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우리 앞에 강렬한 존재의 생기를 띠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p.s 이번 글을 복잡하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글쓰기의 방식을 이분법적으로 상정하고 우리는 어떤 방식을 양자택일할 것인지 자문하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건강이 매우 좋습니다. 팔굽혀펴기도 하루 25회나 하고 있습니다. 몸무게가 107kg이 나가는데 키가 180cm니까 고도비만까지는 아닙니다. 상당히 몸집이 큰 편이지만 서구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따라서 운동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관건은 지성의 게임, 싸움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도취가 저의 전부인 것입니다. 따라서 차가운 지성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의식이 여기에 당연시하게 당착하여 있습니다. 이 한 가지에 착안하여 저의 글은 판명이 구성되고 일자一者적인, 순일한 방향으로 특징지어집니다.






------------------------------------------------------------------



살면서 오랜 시간 후에 정신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변화의 순간이 그러니까 혁신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느낄 때가 이른바 자신이 새롭게 테제하는 시간입니다. 그 순간에 비로소 ‘시간/공간 즉 삶에 대한 사랑’을 체현할 수 있고 자신이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수립/요청되는 열락입니다. 이를테면 당신의 영혼을 구성하는 시스템 간의 요소가 서로 통섭을 하는 하나의 공과를 생성하는 순간이라고 봐야할 테죠. 따라서 새로운 차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역 이른바 신세계에 입적할 때에 비로소 생을 초극하게 되고, 일련의 정립의 연쇄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기야 부정 뒤에는 항상 긍정이 뒤 따라 오는 법입니다. 부정과 긍정은 서로 양립하므로 부정->긍정->증명이라는 괴델식 부정변증법은, 부정에서 모든 걸 시초/발로의 맹아로 삼아 새로이 연역적 접근을 수립하는 철학의 추상적 기법에 다름 아닙니다. 이를 실천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철학적 사유를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대로 ‘무상의 행위’로서 사고를 공전할 하등의 이유가 제1원리로 굳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착입니다. 달리 생각해 사고의 공전 이전에 ‘철학적 글쓰기’라는 실천적인 연역적 접근 방식이 생각에 꼬리를 무는 반동 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씀으로써 사유를 하고, 쓴 글로 인해 변증법적 관념론을 구현할 제특징을 현현할 ‘지적 무기’를 방기하지 않은 채 A를 A로서 유지할 대의명분과 명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논자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핵심적인 사항은 생각을 글로 적을 필요 없이 불가결하게 글을 씀으로써 생각을 생성하라는 방법론적 측면을 대두시키고 싶습니다. 사르트르식 사유기법은 오늘날 더욱 공고해져 이제는 언어학에도 접목/절충되고 있으며 우리의 고착된 사고방식·통속적 문화·법률·도덕적 원리·사회의 메커니즘에도 강력히 작용해, 기존의 생각에서 시작된 글쓰기의 기법을 심각하게 길항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쓰기의 약동학은 시나브로 발달하고 과장/확대되어 마침내 미래의 학술을 정립할 시원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연역법적 글쓰기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구도적인 학문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모종의 전문화, 그러니까 분야의 미분화로 말미암은 글쓰기의 양의적인 분립에 진배없을까요? 달리 말해 우리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글쓰기’와 ‘글쓰기에서 시작되는 생각과 또 그 반복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이분법적 선택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즉 (A, B)라는 글쓰기의 집합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A+B=C라는 이등분된 전건과 후건을 일원론으로 환원하느냐, 하는 절대적인 당위명제에 당착하여 있습니다. 어떡해야 이 난관을 타개하고 일도양단에 이 이율배반의 논리를 일망타진할 명약관화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착안에 근거하여 우리는 결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관조로서의 회의에 부닥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을 찾기 위한 도상에서 아무리 명민한 학자라도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일의 연구가 필연적으로 요구됩니다. 아니면 평생을 걸려서도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한 난제가 바로 이에 대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당대 최대의 철학자뿐만 아니라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와 촘스키조차도 난마에 얽매이게 만드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함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언어학적인 범주보다는 철학사상적인 영역의 관점에 가깝게 담론되는 문제라고 감히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이게 언어학과 무방하다해도 익히 실사구시한 표현이라고 지칭할 것입니다.

저는 필설을 비비 꼬꼬 복잡다기하고 다층적이며 소통 불가결하게 애를 쓰려고 글을 쓰는 건 결코 아닙니다. 기필코 글을 어렵게 쓰기 위해서, 그런즉슨 자신의 학구적이고 현학적인 측면을 과장하기 위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의미 전달을 우선적인 과제로 상정하고 있으며 그 동시에 현학적인 유희의 달성을 위한 복잡다대한 의미론적 의식을 내포/함의하고 있다는 게 제 글을 비평하는 데 앞선 정석일 것입니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적 글쓰기의 양자택일의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정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과제란 그러므로 자신의 지성의 형이상학적이고 선험적인 특질에 따라 A냐 B냐, 하는 바를 선택해야 할 터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러니까 우의적인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른 영역, 가령 정치에서 좌익/진보와 우익/보수의 이분법적 이항대립에 다름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정치의 고수란 한 영역에 극을 달리는 게 아니라 중용의 도리를 지향하는 것, 즉 중도를 전격적으로 지키면서 양쪽의 의견을 두루 섭렵하는바 소위 ‘협상의 종합’을 도출해서 자신의 이념에 명명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글쓰기의 방식에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중용의 도 소위 철리를 따르면서 자신의 지성을 지켜나가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자족의 하나의 형태방식에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로써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든 고대 중국적이든 ‘중용’이라는 기필코 시니컬하지 않은 태도로 결론 지워졌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의 기술적 접근의 기법을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자신의 본질에 의거하여 이를 선택하면 그만이라는 결론의 도출에 입각하게 됩니다. 이상 제 강연을 들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양주시 개인의 서재의 암흑 속에서 ‘미석 박준수’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p.s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많이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원시시대 때의 짐승과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싸움이 모든 걸 결정짓는 게 현실입니다. 절대 남자는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강함의 끝은 부드러움에 있습니다. 부드러운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 게 현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피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게 이 사회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와의 싸움을 선포하고 자신, 즉 내면을 배제코자 한다. 그러나 정말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과연 자신을 이겼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정한 사업가는 돈에 욕심내지 않고, 대성하여 세계를 제패한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포츠는 특히 엄청난 자신과의 싸움의 고통을 수반한다.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페이스를 맞춰야 만이 성공에 이를 수 있고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일 년에 두꺼운 학술 서적을 300권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면 전체를 무불통달하고 있었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김으로써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권좌에 앉을 수 있었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곧 자신을 둘러싼 피상을 이긴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오늘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의 비문을 듣고서는 많은 점을 숙고했다. 일단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많은 번뇌의 고통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대개가 약해 빠졌다. 진짜 학문에 접근하려면 결코 유해서는 아니 된다. 그건 중이나 하는 짓이다. 사상과의 싸움에 자신의 언어기능을 활용하여 책을 펴내는 것이 승리자라면, 단지 자신의 언어 기능이 딸려 산으로 들어가는 게 패배자이다.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짓밟이느냐 짓밟느냐가 전부인 것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이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사회의 모든 성원이 당신의 적이다. 동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살려고 하지 마라. 고통의 극한까지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삶을 말할 수 없는지라.

나는 쉽게만, 본질적으로만 세상을 살려 했지만 이 생각이 틀렸음을 요즘 학문에 점차 다가감에 따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학문을 하는 학인의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의 말이 가슴에 확연히 와 닿는 찰나였다. 따라서 인생은 순간이 아니다. 인생은 실로 거시적이고 비현시적인 것, 가시적인 게 아니라 미시적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 패배하지 않는 자가 되어라. 전설로 남아 불멸과 영원의 존재가 되어라. 짐승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을 초월하는 자가 되어라. 진정으로 초인으로 엄존하라. 실존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건 인문학의 질이 떨어져서이지 결코 사회가 기술만을 선도해서는 아니다.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의 비중이 떨어졌으면 자신의 그것을 일신하려고 노력해야지 사회를 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을 비방하기 전에 자신에게 엄격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평생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은 그들의 질이 떨어진 게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후천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도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공의 기원이 후천성에서 개조되기 때문이니까. 따라서 한 인간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천재성도 있지만 그 비범함에 실려 오는 그만큼의 엄청난 노력이 없고서는 고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학문을 하면서 느낀 점은 엄청난 양의 지식을 받아 드리고 변별할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리스크로서 따라온다는 것이다. 학문은 곧 노력을 뜻한다.

다른 분야도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일단 노력이 확정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선천적인 천재성에 달린 것인데 여기서 최고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노력은 하되 사회에 드러나는 것은 천재뿐인 것이다. 비범한 자만이 세상을 움켜쥘 수 있다. 강함을 뛰어넘어서 부드러움에 들어서는 경지, 즉 노자가 말한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이기는 경지에 들어서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그 부드러움이란 강함을 극히 응축시킨 실로 방대한 강함이며 따라서 이는 광대무비한 경험이 축적되고 장대한 노력과 천재성이 가미되어야 실행되는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결코 패배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헤밍웨이의 금언을 끝으로 이 글을 끝낸다. 언제나 내 어줍잖은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한 인간이 철이 든다는 것은 조숙하게 어린 시기에 생성될 수도, 아니면 청년기나 불혹의 나이에서도 그럴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철이 든다고 표현할 때 그 뜻은, 집안의 재정을 알아차리고 부모에게 효도심이 생긴다거나, 자신의 목표와 꿈이 생겼을 때나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자식을 지키겠다는 애정의 발로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삶의 상관없이 널려 있는 편린의 조각들이 하나씩 합쳐져서 마침내 하나의 총화로 직조될 때, 그런 현상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과 우주에 대해 이해한다는 단계에 들어설 때, 그리고 이윽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바로 볼 때에 이를 ‘철’이 든다는 표현명사를 가장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단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들어 그런 현상이 내게 현현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 내가 비로소 안정의 단계에 들어서서야, 그러니까 예전의 집안의 풍파나 주위의 괴롭힘, 비운, 정신질환으로부터 분리되어 안정적 시기에 들어서서야 세상을 보는 하나의 지적 패러다임이 구체적으로 성립함과 동시에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명약관화하게 뚜렷이 보이는 일종의 ‘열반’단계를 나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이로써 나는 앞으로 더 이상 내가 하는 일에 결코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더 이상의 과오와 무의미하고 서투른 몸짓도 보이지 않을 것이리라.

나는 문인으로서의 성공과 이를 발판삼아 세계 학계를 제패하고, 더 나아가 세계정신을 내 나름대로 재편성하고 싶다는 광대한 야망에 강렬히 사로잡혔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무명이나 아류로 남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한 영혼의 진취적인 강렬한 야망은 죽기 전에는 꺾이지 않을 하나의 원한으로 새겨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모자라고 비참한 세계를 새롭게 개설하고 재정립하여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비전을 수립할 신적 계시에 지명 받은 이제 서야 날갯짓을 하는 후학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덜떨어진 세상에 이제껏 보지 못한 광명과 은총을 가져다줄 사도로써 우둔하고 무명에 사로잡힌 중생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강령의 준칙을 세심하게 가다듬고 세공하는 한 명의 도제일 뿐이라고 상정한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석가,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진정 위대한 사람들이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다르다. 나에게는 이들과 다르게 내 생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언어의 변증법적 능력이 다분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작 단계, 아직 앞의 위대한 네 사람처럼 대성하여 일가를 이룰지 파묻힐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도도하게 걸어가면, 그뿐이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철이 들었으니, 드디어 내 정신이 도약할 순간의 발로가 도래했으니 그것으로 남은 인생은 족한 것이다.



 

                                                                
                                                                                 덕계동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 씀.







이 게시물을...


첨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