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p.s 이번 글을 복잡하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글쓰기의 방식을 이분법적으로 상정하고 우리는 어떤 방식을 양자택일할 것인지 자문하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건강이 매우 좋습니다. 팔굽혀펴기도 하루 25회나 하고 있습니다. 몸무게가 107kg이 나가는데 키가 180cm니까 고도비만까지는 아닙니다. 상당히 몸집이 큰 편이지만 서구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따라서 운동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관건은 지성의 게임, 싸움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도취가 저의 전부인 것입니다. 따라서 차가운 지성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의식이 여기에 당연시하게 당착하여 있습니다. 이 한 가지에 착안하여 저의 글은 판명이 구성되고 일자一者적인, 순일한 방향으로 특징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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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오랜 시간 후에 정신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변화의 순간이 그러니까 혁신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느낄 때가 이른바 자신이 새롭게 테제하는 시간입니다. 그 순간에 비로소 ‘시간/공간 즉 삶에 대한 사랑’을 체현할 수 있고 자신이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수립/요청되는 열락입니다. 이를테면 당신의 영혼을 구성하는 시스템 간의 요소가 서로 통섭을 하는 하나의 공과를 생성하는 순간이라고 봐야할 테죠. 따라서 새로운 차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역 이른바 신세계에 입적할 때에 비로소 생을 초극하게 되고, 일련의 정립의 연쇄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기야 부정 뒤에는 항상 긍정이 뒤 따라 오는 법입니다. 부정과 긍정은 서로 양립하므로 부정->긍정->증명이라는 괴델식 부정변증법은, 부정에서 모든 걸 시초/발로의 맹아로 삼아 새로이 연역적 접근을 수립하는 철학의 추상적 기법에 다름 아닙니다. 이를 실천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철학적 사유를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대로 ‘무상의 행위’로서 사고를 공전할 하등의 이유가 제1원리로 굳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착입니다. 달리 생각해 사고의 공전 이전에 ‘철학적 글쓰기’라는 실천적인 연역적 접근 방식이 생각에 꼬리를 무는 반동 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씀으로써 사유를 하고, 쓴 글로 인해 변증법적 관념론을 구현할 제특징을 현현할 ‘지적 무기’를 방기하지 않은 채 A를 A로서 유지할 대의명분과 명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논자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핵심적인 사항은 생각을 글로 적을 필요 없이 불가결하게 글을 씀으로써 생각을 생성하라는 방법론적 측면을 대두시키고 싶습니다. 사르트르식 사유기법은 오늘날 더욱 공고해져 이제는 언어학에도 접목/절충되고 있으며 우리의 고착된 사고방식·통속적 문화·법률·도덕적 원리·사회의 메커니즘에도 강력히 작용해, 기존의 생각에서 시작된 글쓰기의 기법을 심각하게 길항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쓰기의 약동학은 시나브로 발달하고 과장/확대되어 마침내 미래의 학술을 정립할 시원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연역법적 글쓰기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구도적인 학문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모종의 전문화, 그러니까 분야의 미분화로 말미암은 글쓰기의 양의적인 분립에 진배없을까요? 달리 말해 우리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글쓰기’와 ‘글쓰기에서 시작되는 생각과 또 그 반복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이분법적 선택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즉 (A, B)라는 글쓰기의 집합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A+B=C라는 이등분된 전건과 후건을 일원론으로 환원하느냐, 하는 절대적인 당위명제에 당착하여 있습니다. 어떡해야 이 난관을 타개하고 일도양단에 이 이율배반의 논리를 일망타진할 명약관화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착안에 근거하여 우리는 결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관조로서의 회의에 부닥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을 찾기 위한 도상에서 아무리 명민한 학자라도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일의 연구가 필연적으로 요구됩니다. 아니면 평생을 걸려서도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한 난제가 바로 이에 대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당대 최대의 철학자뿐만 아니라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와 촘스키조차도 난마에 얽매이게 만드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함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언어학적인 범주보다는 철학사상적인 영역의 관점에 가깝게 담론되는 문제라고 감히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이게 언어학과 무방하다해도 익히 실사구시한 표현이라고 지칭할 것입니다.

저는 필설을 비비 꼬꼬 복잡다기하고 다층적이며 소통 불가결하게 애를 쓰려고 글을 쓰는 건 결코 아닙니다. 기필코 글을 어렵게 쓰기 위해서, 그런즉슨 자신의 학구적이고 현학적인 측면을 과장하기 위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의미 전달을 우선적인 과제로 상정하고 있으며 그 동시에 현학적인 유희의 달성을 위한 복잡다대한 의미론적 의식을 내포/함의하고 있다는 게 제 글을 비평하는 데 앞선 정석일 것입니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적 글쓰기의 양자택일의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정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과제란 그러므로 자신의 지성의 형이상학적이고 선험적인 특질에 따라 A냐 B냐, 하는 바를 선택해야 할 터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러니까 우의적인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른 영역, 가령 정치에서 좌익/진보와 우익/보수의 이분법적 이항대립에 다름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정치의 고수란 한 영역에 극을 달리는 게 아니라 중용의 도리를 지향하는 것, 즉 중도를 전격적으로 지키면서 양쪽의 의견을 두루 섭렵하는바 소위 ‘협상의 종합’을 도출해서 자신의 이념에 명명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글쓰기의 방식에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중용의 도 소위 철리를 따르면서 자신의 지성을 지켜나가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자족의 하나의 형태방식에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로써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든 고대 중국적이든 ‘중용’이라는 기필코 시니컬하지 않은 태도로 결론 지워졌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의 기술적 접근의 기법을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자신의 본질에 의거하여 이를 선택하면 그만이라는 결론의 도출에 입각하게 됩니다. 이상 제 강연을 들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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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 개인의 서재의 암흑 속에서 ‘미석 박준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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