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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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많이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원시시대 때의 짐승과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싸움이 모든 걸 결정짓는 게 현실입니다. 절대 남자는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강함의 끝은 부드러움에 있습니다. 부드러운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 게 현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피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게 이 사회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와의 싸움을 선포하고 자신, 즉 내면을 배제코자 한다. 그러나 정말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과연 자신을 이겼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정한 사업가는 돈에 욕심내지 않고, 대성하여 세계를 제패한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포츠는 특히 엄청난 자신과의 싸움의 고통을 수반한다.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페이스를 맞춰야 만이 성공에 이를 수 있고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일 년에 두꺼운 학술 서적을 300권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면 전체를 무불통달하고 있었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김으로써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권좌에 앉을 수 있었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곧 자신을 둘러싼 피상을 이긴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오늘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의 비문을 듣고서는 많은 점을 숙고했다. 일단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많은 번뇌의 고통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대개가 약해 빠졌다. 진짜 학문에 접근하려면 결코 유해서는 아니 된다. 그건 중이나 하는 짓이다. 사상과의 싸움에 자신의 언어기능을 활용하여 책을 펴내는 것이 승리자라면, 단지 자신의 언어 기능이 딸려 산으로 들어가는 게 패배자이다.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짓밟이느냐 짓밟느냐가 전부인 것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이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사회의 모든 성원이 당신의 적이다. 동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살려고 하지 마라. 고통의 극한까지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삶을 말할 수 없는지라.

나는 쉽게만, 본질적으로만 세상을 살려 했지만 이 생각이 틀렸음을 요즘 학문에 점차 다가감에 따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학문을 하는 학인의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의 말이 가슴에 확연히 와 닿는 찰나였다. 따라서 인생은 순간이 아니다. 인생은 실로 거시적이고 비현시적인 것, 가시적인 게 아니라 미시적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 패배하지 않는 자가 되어라. 전설로 남아 불멸과 영원의 존재가 되어라. 짐승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을 초월하는 자가 되어라. 진정으로 초인으로 엄존하라. 실존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건 인문학의 질이 떨어져서이지 결코 사회가 기술만을 선도해서는 아니다.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의 비중이 떨어졌으면 자신의 그것을 일신하려고 노력해야지 사회를 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을 비방하기 전에 자신에게 엄격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평생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은 그들의 질이 떨어진 게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후천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도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공의 기원이 후천성에서 개조되기 때문이니까. 따라서 한 인간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천재성도 있지만 그 비범함에 실려 오는 그만큼의 엄청난 노력이 없고서는 고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학문을 하면서 느낀 점은 엄청난 양의 지식을 받아 드리고 변별할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리스크로서 따라온다는 것이다. 학문은 곧 노력을 뜻한다.

다른 분야도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일단 노력이 확정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선천적인 천재성에 달린 것인데 여기서 최고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노력은 하되 사회에 드러나는 것은 천재뿐인 것이다. 비범한 자만이 세상을 움켜쥘 수 있다. 강함을 뛰어넘어서 부드러움에 들어서는 경지, 즉 노자가 말한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이기는 경지에 들어서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그 부드러움이란 강함을 극히 응축시킨 실로 방대한 강함이며 따라서 이는 광대무비한 경험이 축적되고 장대한 노력과 천재성이 가미되어야 실행되는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결코 패배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헤밍웨이의 금언을 끝으로 이 글을 끝낸다. 언제나 내 어줍잖은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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