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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 쓰여진 글입니다.
1
어떤 것을 가치판단할 때 우리는 모나드의 상호조합을 꾀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모순성적인 격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 의거하여 유추해볼 때, 대부분의 세상의 제요소들은 양극성을 띠므로, 본디 상대성과 대립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일가一價불가분이 합성되고 마침내 총체된다는 역설적인 합법칙성, 즉 모나드의 상호합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과학론적 우주론의 이러한 역설의 법칙은 따지고 보면 이론의 가능태를 강조한 능동성에 역점을 둔다고 하겠다. 이러한 후험적인 진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능히 딱딱함과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일종의 지해를 보증한다는 점이다. 각 분야의 이론가들이 자신의 표징적이고 주관적인 요해를 창도하지만, 부분적인 것은 언제나 전체에 흡수되는 법이므로, 상호보완성을 완성하는 지식의 변증법적 기술은, 모든 지식이 언제나 집적되고 가산된다는 인류지식의 집대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컨대 과거사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들을 내포한 유명한 이론들을 상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벤담의 공리주의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완벽하게 난공불락의 이론이나 가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변이성이 지속적인 현실태로 존재하는 한, 여태껏 무적의 법칙으로 존립했던 많은 이론과 가설은, 가없이 세월이 흐른다면 그들을 뒤잇는 후학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비틀어 생각해 하나의 내파(Implosion)작용이라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는 다분히 한 사상가로부터 말미암은 비판의 역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요컨대 학설 역시 일련의 기투라기보다는 표투에 가까우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의 도덕에서 선악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점점이 계급도덕의 과잉을 경험하게 된다. 니체의 이른바 ‘르상티망’이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살아 숨 쉬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니체가 낡은 철학이라고 비판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과학과는 달리 아무리 세월의 풍파에 묻힌 고대철학이라해도 이를 단순히 지리멸렬하고 오래됨과 동시에 진부한 방식이라고 예단할 착오를 저지르는 근시안적인 사변판단은 자제해야 할 것이리라.
원컨대 좀더 자신의 지성을 멀리 이르게 기투를 유지하고 자기 ‘의식의 지향성’의 일차원성의 한계를 극복할 다식을 갖춤과 더불어, 다재다능하고 총명한 사람이 돼라. 단지 경험해보지도 않은 지식의 영역을 지레짐작하지 말며, 자신의 이성이 항상 부분적이고 지엽적이라느 것을 직시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닦달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인간은 일종의 포유류에 불과하지만, 이는 다만 육체의 한계이지 정체의 한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공평성을 극복하고, 보다 정신에 비중을 두는 도인으로서의 정적 현실태를 유의미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미 고대 동양에서 대두된 일종의 ‘관념지향성’의 패턴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들 승려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그들은 직관으로 그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이고, 반면 우리는 하나의 공리公利를 세우고, 연역적으로 그곳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크게 보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이 비판적·가변적인 시대에 더 이상 동양철학이 통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의 지향성’을 명약관히 조례한다고 볼 수 있겠다.
2
철학을 형식 논리학에 의거하지 않고, 즉 언어학이나 수학, 사회학 및 과학에 의존하지 않은 채 마치 후설의 개념 중 하나인 ‘본질직관’을 발현하여, 따라서 변증법적 사고방식에서 이탈하여, 사유가 아닌 사색을 기점으로, 일차원적/선형적인 엔트로피의 법칙 안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본을 회귀시켜야 하는 당위적인 정합성의 개연성을 아스라이 선정해야 한다. 요컨대 진정한 ‘생철학’을 근본으로 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학문을 위한 철학이 아닌 진정한 ‘인생의 철학’을 통각의 가장 오묘한 부분을 사용해 발견해 하나의 ‘선험적 일반’의 철학, 논리나 언어가 도구로 사용된 게 아닌 기억과 이미지와 집적되어온 체험이 질료적 원칙이 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존립평면’을 완성시켜야 하는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를테면 철학이란 과학과는 동떨어진 초현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논자들은 나를 샤머니즘의 추종자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기야 종교와 미신으로 그동안 얼마나 ‘순수한 철학’들이 핍박/억압받아 왔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사상은 언제나 절대적인 교리와 대립해왔고, 반동적인 당파성을 띠는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위세에 무신론자들은 고개를 숙일 뿐 자신의 정신의 피와 땀이 배긴 소중한 저서를 출판화지 못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시대인 만큼 누구나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면 책을 낼 수 있고, 학계에 등단할 수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철학사상계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양상이니 거기서 ‘군계일학’으로서 ‘금과옥조’적인 언사를 표명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책과의 싸움이 아니다. 책은 단순히 질료에 불과할 뿐 그것 자체가 하나의 사유지평으로서 존재적 생기를 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철학과 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정신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치열한 철학자들의 지적 고군분투는 ‘형이상학’에 문을 두드렸고, 이를테면 칸트와 같은 대철학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인식론적 철학인 ‘불가지론’을 창시했다. 달리 보면 철학이라는 분야야말로 시대를 초절한 위대한 학술적/정신적 산물이고, 이는 다른 학문의 분과와는 달리 영원불멸의 유산으로서, 아니 그자체로 하나의 존재적 생기를 띠는 영성체가 됨으로써, 과거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 문헌들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우리 앞에 강렬한 ‘존재의 생기’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