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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선생님 ㅣ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2
패트리샤 폴라코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5월
평점 :
고2로 올라와서 나는 다른 애들을 대하기가 서먹서먹했다. 그래도 고1 때는 뜻이 맞는 친구가 몇 명 있어 외롭지 않았지만 새 학년이 오고 나니 나는 본래의 수줍음과 비사교성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후에 가서는 마음의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애들이 생겼지만 학기 초반에 내가 홀로 방황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지금은 내가 많이 부드러워져서 사람들과 쉽게 농담으로 시작해서 친분을 맺곤 하지만, 이는 영혼이 열려서라기보다는 어른이 되어 사회적인 기교와 수사능력의 진보에 기인한 것이라는 게 정설일 테다.
나의 담임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와는 10살 정도 차이가 나서 어쩌면 나이만은 누나라 보는 게 옳을 듯 하나, 나는 나이 차이에 그닥 사랑을 고려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혼했고, 그녀가 나를 보호하고 제자에게 주는 순수한 사랑에 나는 그녀를 보는 재미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18살에 음악을 학문보다 더 좋아했다지만 당시 내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시 내가 갈 길이 문학가나 학자라는 판단 하에 제도권 공부에 회의가 들어 책만 읽었고, 집에서는 음악만 들었지만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을 막론하고 책만 줄창 읽어댔다. 주로 좋아하는 분야가 사회과학과 국제 이념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정말로 많은 양의 책을 읽었다.
어머니의 뜻으로 나는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빠질 수 있었고, 집에서 주로 공부하였다. 심지어 수업시간까지 귀찮아져서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에 가서 누워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아예 수업을 무시하고 중간에 집으로 와버리는 날도 있었다.
해는 노란 빛으로 교정을 아스라이 비추고, 풍경을 온통 노란색으로 적시한다. 교정 사이 사이에 놓여진 아담한 소나무들과 꽃들은 마치 인사를 하듯 소박하게 그 풍미를 발산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인간에게 사랑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해보며 홀로 교정을 걷는다. 미세한 바람이 불어와 섬세한 향기로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 아늑함과 풍요로움의 영원 속에서 하나의 미적 표양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건마는. 나는 이다지도 젊은 나이에 사랑을 갈구하며 나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가. 산에서의 수양이 내 욕심을 다 비우지 못했던 바인가. 모든 욕망을 제거한 고승의 품안에서도 ‘사랑’이라는 욕망은 여전히 남아 살아숨쉰다는 불교의 말씀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자기보존보다는 번식을 지향한다. 숫사마귀가 암사마귀와 교미 후에 자신의 몸을 암사마귀의 먹이로 바치고, 암사마귀 역시 알을 까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새끼들의 먹이로 바치는 걸 보노라면 번식이야말로 우주의 제1원리가 아닌가 싶다. 아니 우주라기보다는 생명의 원리이리라. 우주 전체가 생명으로 물든 건 아닐테니. 그러나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엿보았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의 수업에 대한 심각한 방기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빈 교실에 단둘이 들어가 상담을 했다. 그날따라 선생님의 용모는 아름다웠고, 선생님의 가느다란 몸에 붙은 스커트 아래의 다리는 야생 그대로 아름답게 빠져서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 선생님이 결혼을 했어도 역시 여자라 다른 남자의 구애를 싫게는 안 생각할거라 여겼다.-어쨌든 자신의 품격이 올라가는 일 아닌가.
“선생님이 널 잘못 가르쳤나 보다. 준석이가 약해 보여서 편안하고 친절하게만 이끌었더니 이제 공부를 등한시하는구나.”
선생님은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싶어 선생님을 끌어안았다.
선생님의 체온은 따뜻했고, 진한 여자 냄새가 났다. 그 순간 나는 내 가슴 속에서 동결된 무엇이 녹아 이야말로 인생의 참의미구나하는 감각적인 쾌락에 젖었다.
그 순간 선생님이 황급히 몸을 빼며 ‘짝’하는 소리와 함께 내 뺨을 때렸다.
이윽고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더니 나에게 말을 건냈다.
“준석이가 선생님을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그래도 나는 훌륭한 스승이 되기 위해 열심이 했건만, 또 나는 결혼한 몸이고 이러면 안 돼는 거야.”
나는 그 순간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몸을 들썩이며 깊은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은 말을 멈추더니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18살의 여름이 그렇게 지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