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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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p.s 인간은 결코 잘못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최고의 쾌감을 주는 것만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할 길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군자가 아닌 난봉꾼들에게는 섹스가 최고의 쾌락일 수 있겠고, 얼빠진 미식가들에게는 음식이 그것일 텝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듯 지고의 쾌락, 쾌락 중의 쾌락이란 정신의 안정입니다. 즉 대정의 단계라는 것이죠. 대정의 단계란 열반을 뜻합니다. 열반이라 하여 승려들의 깨달음의 마지막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글을 써서 엄청난 관념의 모험적인, 생각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관념에 관념이 꼬리를 물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철학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열반으로 드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철학적 글쓰기에서 지고의 쾌락을 얻는 이는 드뭅니다. 그것은 몇몇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죠.

다음에 병원에 갈 때에는 각성제를 타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뇌의 신경망을 활성화시키고 더 자극을 얻기 위해서이죠. 학문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주저하겠습니까?






1. 서구철학을 한다는 것.

서구철학은 동구철학과 달리 엄연히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왜 인고 하면 깨달음 가령 돈오와 대오를 중시하는 불교적 혜학을 지반으로 하고 있는 동구 철학은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기초적 개념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다듬어가는 사학적 철학으로서의 서구 철학과는 달리 깨달음과 무기록을 위시한 극히 ‘무언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서구철학은 철학이라는 표양을 가지고 있지만 엄청난 양의 공부가 없이는 결코 자신의 뜻을 명실공이 천명할 수 있는 당위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 그와 달리 동구철학은 오직 깨달음과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현인들이 자신의 법서를 태워버린 것만으로도 그 근거는 묵직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철학의 과거 史적 기록에서 주장하는 개념들을 전문적으로 꿰뚫고 자신이 사상 존재했던 모든 서구철학자의 이론을 습득했다고 여겨진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펼칠 당위성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의 모든 철학사상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서구 철학사에 족적을 남길 수가 없거니와 당신이 진정으로 거대담론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과거 아득한 시절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모든 기록들을 아울러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인생관을 고색창연한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서구철학자는 자신이 후학을 위한 교량역할을 한다는 데 모종의 비의를 느끼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든, 자식을 낳는 것이든 인간의 삶이란 자손을 위한 가교를 세우는 데 다름 아니다. 철학사상가가 철인이 되어서 심지어 신이 되어서 진정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게 불가능한 게 현실이거늘 만약 자신이 知의 끝에 도달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부소부지하게 당신은 승려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승려가 철학자들보다 더 사유가 깊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른 것이다. 승려들은 언어를 모른다. 승려는 언어로부터 도망친 자다.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을 승려들의 혜안이라고 상정한다면, 승려들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의 세계로 입적할 수 있는 하나의 파노라마를 제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고작 하는 말이 짧은 설법이고 이 설법 역시 일종의 이론이거니와 이에 논리학적인 측면이 매우 간과되어 있기에, 나는 철학을 한다는 서구철학가인 ‘학자’와 동구철학가인 ‘승려’들의 이분법적인 이항을 제시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나 학계에 이바지하는 정도가 비교불문하게 크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둔다.


승려는 자기 혼자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패배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똥 싸는 기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내가 말한 승려들은 자신의 저서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지속적으로 불교적 심미가 담긴 혜학적인 저서들을 해가 다르게 배출하는 학자적 승려는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철학사상가라고 부름 직하다.

당신들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서구철학자들이 평생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며, 정진을 하고 수양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은 항시 관념의 모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학계는 그들 철학사상가들로 인해 활발히 뜨겁게 짚여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자 중에서도 철학과 사상, 문학을 다루는 학자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으며, 그 전범이 바로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는 1년에 300권에 달하는 학술서를 마치 밥을 씹는 우걱우걱 미친 듯이 읽어나갔다. 바야흐로 인문학을 천시하는 이 사회가 오직 기술의 진보를 위해 달리는 지금 모든 이념의 싸움은 종식된 지 오래되었거니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이미 학자들이나 보는 고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수학과 과학에 이바지한 공과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큰 영감을 받아 세워진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사상은 모든 학문의 왕이다.

서구철학을 전공하는 필자의 야심은 학문의 모든 제분야를 아울러 총체적인 집약으로서의 학문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아리스토텔레스를 미친 듯이 파고 있지만 너무나도 개념적이고 지극히 현학적인 관념의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순순히 진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멈출쏘냐? 다음 주 월요일, 나는 각성제를 타러 정신병원에 간다. 각성에를 복용함으로써 내 지성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미친 듯이 관념의 모험에 집중할 것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거니와 극좌파였고 글을 위해서 각성제를 과다로 먹어 몸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학문을 위해서 죽어도 후회 없다. 학문의 재미와 그 오묘한 이치는,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치 하나의 계시와 같이 내게 적시하는 영원불멸한 학술정신을 나는 끝내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야말로 나와 같은 선지자가 걸어야 할 가장 귀족적이고 고매한 영역이요,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 되어 인간을 초극하고 신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길은 오로지 이뿐일 테니. 나는 학문을 하라고 신에게 선택받은 자다. 내가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학문을 할 것인가. 세계의 미래는 내 손 안에 있다. 오늘도 내 서재에서 고요히 학문과 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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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과 미디어 비평
김창룡 지음 / 글로세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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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홉스



한국사회는 예부터 국수주의를 강하게 강조하였고, 이제는 선진국의 반열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여타 나라에 비해 국수주의의 열광이 강하다는 건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도 없으리라. MB는 실용주의를 준칙으로 부국강병을 지향한다는 천명을 밝혔지만 발전하는 건 소수의 재벌기업과 늘어만 가는 부르주아의 재산뿐이므로, 대통령의 포퓰리즘에 대한 반감이나 매스컴을 조작하여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반공을 지향하게끔 하는 정부의 반간지계에 골이 날대로 난 시민들은 뭔가 색다르고 새로운 정부의 정책을 원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분열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시민들의 행복지수는 땅바닥을 치고 있고 학계에 대한 지원은 날로 줄어가며, 식료품을 중심으로 한 물가는 해가 다르게 상승세를 이어간다. 코스피로 적자를 보는 건 개미들뿐이요, 외국 투기 세력 가령 도이치뱅크와 같은 기업은 주가조작으로 이익을 날로 건져 먹는다.

세상에 대해 가르쳐야 할 대학에선 오직 취직만을 위시하여 지혜와 지식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취직서를 꾸미는 허황된 학문을 가르치는 작금에 현실은 시간이 갈수록 험악해진다. 하기야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인심을 기대하기란 고대보물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만인이 만인을 배척하기 위한 열대우림과 같은 사회가 조장되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공적살인 이외에는 달리 실천해야 할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홉스는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라고 천명하였다. 친인척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가까운 이웃 사이에서도 저액의 돈을 꾸기에도 어렵게 된 살벌한 현실은 우리보고 지금 자신의 이성과 의식지평과 지를 확장하고 재정립하라고 불을 지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학식을 기초로 하여 세상을 뒤바꿀 경계에 설 수 있는 기반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마치 승려처럼 하늘을 뒤엎을 최상의 도를 구하고 혼자서만 열반에 들어서는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영혼의 형이상학적인 측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승려를 내가 싫어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생을 구하려면 마땅히 자신이 깨달은 바를 그 과정이 자신의 살을 깎아 먹는다할지라도 철두철미하게 구명하여 기술해야 할 필연적인 도덕성과 윤리를 지켜야  진실된 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과 사상의 시대가 지났다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그것으로 하여금 새로운 ‘주의’를 만들어야 할 시대정신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불행한 자에 다름 아니다. 나라를 구성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그 주권을 담보로 하고 이의 책임자이자 실 운영자인 시민이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나라 발전에 대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공리주의의 성립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개인 각각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지적 깨달음은 모든 실리적/물리적인 발전의 기초이다. 지를 지반으로 하지 않은 행동은 가볍고 쉽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시뮬라크르적인 것에 진배없다. 순수 학문에 대한 배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이룰 수 없다. 왜 오늘날에는 헬스 열풍으로 몸을 사용하기는 좋아하면서 머리를 사용하는 것에는 질색을 할까. 포르노 사업같이 말초적인 분야만 집중적으로 커가고 아주 복잡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 순수학문은 갈수록 위축되어가는 걸까? 90년대 한국사회는 지식인을 떠받들었지만 지금은 돈이 많거나 유명인사이거나 연예인같은 피상적이고 표층적인 관점만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니 사회가 부패하고 퇴폐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제반구조를 갖췄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지경이 없는 한국을 다시 살리고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썩어버린 한국에도 혁명가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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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선생님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2
패트리샤 폴라코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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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로 올라와서 나는 다른 애들을 대하기가 서먹서먹했다. 그래도 고1 때는 뜻이 맞는 친구가 몇 명 있어 외롭지 않았지만 새 학년이 오고 나니 나는 본래의 수줍음과 비사교성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후에 가서는 마음의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애들이 생겼지만 학기 초반에 내가 홀로 방황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지금은 내가 많이 부드러워져서 사람들과 쉽게 농담으로 시작해서 친분을 맺곤 하지만, 이는 영혼이 열려서라기보다는 어른이 되어 사회적인 기교와 수사능력의 진보에 기인한 것이라는 게 정설일 테다.

 

나의 담임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와는 10살 정도 차이가 나서 어쩌면 나이만은 누나라 보는 게 옳을 듯 하나, 나는 나이 차이에 그닥 사랑을 고려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혼했고, 그녀가 나를 보호하고 제자에게 주는 순수한 사랑에 나는 그녀를 보는 재미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18살에 음악을 학문보다 더 좋아했다지만 당시 내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시 내가 갈 길이 문학가나 학자라는 판단 하에 제도권 공부에 회의가 들어 책만 읽었고, 집에서는 음악만 들었지만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을 막론하고 책만 줄창 읽어댔다. 주로 좋아하는 분야가 사회과학과 국제 이념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정말로 많은 양의 책을 읽었다.

어머니의 뜻으로 나는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빠질 수 있었고, 집에서 주로 공부하였다. 심지어 수업시간까지 귀찮아져서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에 가서 누워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아예 수업을 무시하고 중간에 집으로 와버리는 날도 있었다.

 

해는 노란 빛으로 교정을 아스라이 비추고, 풍경을 온통 노란색으로 적시한다. 교정 사이 사이에 놓여진 아담한 소나무들과 꽃들은 마치 인사를 하듯 소박하게 그 풍미를 발산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인간에게 사랑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해보며 홀로 교정을 걷는다. 미세한 바람이 불어와 섬세한 향기로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 아늑함과 풍요로움의 영원 속에서 하나의 미적 표양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건마는. 나는 이다지도 젊은 나이에 사랑을 갈구하며 나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가. 산에서의 수양이 내 욕심을 다 비우지 못했던 바인가. 모든 욕망을 제거한 고승의 품안에서도 ‘사랑’이라는 욕망은 여전히 남아 살아숨쉰다는 불교의 말씀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자기보존보다는 번식을 지향한다. 숫사마귀가 암사마귀와 교미 후에 자신의 몸을 암사마귀의 먹이로 바치고, 암사마귀 역시 알을 까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새끼들의 먹이로 바치는 걸 보노라면 번식이야말로 우주의 제1원리가 아닌가 싶다. 아니 우주라기보다는 생명의 원리이리라. 우주 전체가 생명으로 물든 건 아닐테니. 그러나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엿보았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의 수업에 대한 심각한 방기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빈 교실에 단둘이 들어가 상담을 했다. 그날따라 선생님의 용모는 아름다웠고, 선생님의 가느다란 몸에 붙은 스커트 아래의 다리는 야생 그대로 아름답게 빠져서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 선생님이 결혼을 했어도 역시 여자라 다른 남자의 구애를 싫게는 안 생각할거라 여겼다.-어쨌든 자신의 품격이 올라가는 일 아닌가.

“선생님이 널 잘못 가르쳤나 보다. 준석이가 약해 보여서 편안하고 친절하게만 이끌었더니 이제 공부를 등한시하는구나.”

선생님은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싶어 선생님을 끌어안았다.

선생님의 체온은 따뜻했고, 진한 여자 냄새가 났다. 그 순간 나는 내 가슴 속에서 동결된 무엇이 녹아 이야말로 인생의 참의미구나하는 감각적인 쾌락에 젖었다.

그 순간 선생님이 황급히 몸을 빼며 ‘짝’하는 소리와 함께 내 뺨을 때렸다.

이윽고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더니 나에게 말을 건냈다.

“준석이가 선생님을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그래도 나는 훌륭한 스승이 되기 위해 열심이 했건만, 또 나는 결혼한 몸이고 이러면 안 돼는 거야.”

나는 그 순간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몸을 들썩이며 깊은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은 말을 멈추더니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18살의 여름이 그렇게 지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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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 내 몸을 망친다 - 산악인 의사가 말하는 내 몸을 살리는 건강 등산법
안재용.윤현구.정덕환 지음 / 비타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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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18살에 나의 정신건강은 어느 정도 나아졌고 오직 젊은 날의 열정과 긍정적인 열광으로 가득참과 동시에, 가장 머리가 기민하며 예민했고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 중 가장 머리가 맑은 시기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해오던 등산은 이제 거의 구도의 경지로까지 치달아 산을 타면서 도를 구하며 깨달음을 얻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선경을 감상하곤 했다. 내가 타던 산의 이름은 부용산인데 나는 길 없는 데까지 전부 관통해서 산을 타서 내가 산의 모르는 지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뱀, 노루, 토끼, 들개까지도 전부 보았고, 산이 북한 근방이라 죽은 용사의 유해까지 발견하게 되었다. 산 곳곳에 전시용 벙커가 있었고, 나는 나름대로 이러한 요소들을 신비로운 형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산에서 내가 얻은 깨달음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이는 생득적으로 깨달아 경험칙과 사변적 연륜이 부족했거니와, 나이가 어려 일천한 합법칙적 학문의 메커니즘의 지식도 그랬으며, 무엇보다 언어로 이를 풀어쓸 재량과 밑천이 없어 남에게 전해줄 요량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바도 그리 뛰어난 게 아니었으니 여기서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하기야 내가 이 더러운 사바세계에서 산으로 들어가 대오함으로써 얻는 지의 폭풍은 가히 환상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뛰어난 현인과 견줄 바는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때의 맑은 심정으로 되돌아가기란 지극히 어려울 듯도 싶다. 나는 그 이후로 4년이 흘러서야 정식으로 학문에 입양되었지만 오히려 깨달음의 깊이와 거시적인 수준은 그때에 못미치니 애석하기만 할 따름이다.

산은 무한한 넓이로 나를 받아들였다.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변증법 과정의 일단이었으므로, 무한히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미친 듯이 산을 탔다. 산을 타보지 않은 자는 산의 오묘하고 명쾌한 맛을 모르는 법이다. 산은 내게 지혜와 건강을 주었다. 산을 타다 문득 절이 보여 들어가 합장도 해보고 싶었지만, 소극적인 내 성격에 감히 그 선사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위만 한가롭게 배회했다.

부용산에는 묘가 특히 많았다. 용사들의 유해도 많았고, 전쟁에 관련된 많은 것들이 잔존했다. 그래서 혹여 지뢰를 밟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지뢰는 전부 제거된 듯했다. 산을 비추는 햇빛은 풍경을 흠뻑 노란색으로 적시고 나를 무아지경의 세계에 빠뜨렸다. 산의 그 맑고 그윽한 향기에 취하노라면 세상만사 그 어떤 것도 부러울 것 없는 신선의 경지에 입적한다. 개인적으로 남들이 많이 찾는 산보다는 사람의 자취가 없는 처녀지가 더욱 신기한 맛을 준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정상에 올라 경험하는 그 황홀감은 다른 것과 결코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다. 산을 타는 건 육체지만 도리어 정신이야말로 진정으로 산을 탄다고 볼 수 있다. 발걸음 하나하나로 말미암아 의식지평과 자의식이 확장되고 변증법적인 사유능력이 향상되는 효과를 등산을 통해 경험할 수 있으니.

산속 깊은 곳에서 고요함에 도취되지 않고 외로움을 느끼는 자는 정신적 하수이다. 나는 산을 탈 때 꼭 혼자서 탔다. 다른 이와 함께 타면 산의 고요한 맛을 알기 어렵고 정신이 흐트러진다는 단점이 있다. 산에서 선禪을 구하려면 혼자서 햇빛도 들지 않는 대수풀림의 정 가운데에서 내선일체하여 대정의 순간에 입도해야 할 것이다.

나보고 꼭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거든 강원도의 수많은 이름 없는 대大산들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다. 강원도의 처녀지들을 정복하고 이를 자신의 기억 회로에 낱낱이 저장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난 산이 정말 좋다. 산이야말로 진실이자 진리요, 미래를 알려주는 보금자리이자 과거의 과오를 지워주고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비밀의 문이요, 곧 길이다. 산을 타보지 않은 자와 세상의 이만저만한 걸 논하려거든 극구 말리고 싶다. 산을 모르는 자와 일체 대화를 삼가는 게 좋을 것이다. 산을 알지 못하는 자의 정신은 깊이가 없고 세속적이며 보잘 것 없다.

나는 등산을 접은 지 수년이 됐고 아직도 초보다. 나는 산을 혼자서 타라고 일렀지만 높은 산은 꼭 동반해서 타야 미연의 사고에 구출 받을 수 있다. 혼자 타다 골절이라도 당하면 골로 가는 거니까.

산은 곧 정신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고 또 절이라는 정신의 꽃도 꼭 산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산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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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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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지반으로 하는 모든 사고思考

철학은 어떤 천재적인 기획으로 이루어진 모종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니다. 인간은 현실제반적인 외부적 자극에서 자신의 사상유희를 시작하지 않고서는 별달리 새로운 사고의 공전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요컨대 신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이전에 현실의 힘겨움과 자연의 잔악함을 먼저 직시하고 그 지점부터 신에 대한 의구가 드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모든 학문의 왕이라고 한들 그 왕을 추대한 것은 모든 감각적/경험적 자극이므로 또 이들로 이루어진 분과의 학문들이므로, 왕이 사회성원으로 인해 발을 디디듯 철학 역시 이성Logos의 반대라 불리는 감각적이고 경험칙적인 자극을 지반으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리라. 따라서 ‘철학’ 하나의 독보적인 발전으로는 위대한 학문적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 다종댜양한 학문의 분과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성숙해야지 이들의 총체가 바람직하게 응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철학’ 하나에 집중하기 이전에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아우를 수 있는 원지적인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예컨대 ‘아인슈타인’같은 최상의 물리학자나 ‘괴델’과 같은 대천재 수학자가 철학으로 돌아서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 학문의 분과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자들 심지어 정치인들까지도 마침내는 철학으로 전회하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때때로 발견하곤 한다. 또한 가령 ‘야스퍼스’나 ‘베르그송’같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시작은 다른 학문에서 했으나 종점은 철학으로 귀결하는 귀일한 일자一者를 택했다는 것은 이와 같은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리라. 철학은 요컨대 모든 학문의 종점이자 완성이며, 모든 행위의 종착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홀로 선험적인 위치에서 독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따금 단속적으로 생각하는 위대한 추상의 사고들은 모두 그 높은 지점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하나의 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각은 결코 현실과 분리될 수 없으며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요컨대 비이성적/비합리적 사상은 철학이라기보다는 ‘무속’이나 ‘종교’에 가까운 것이다. 철학은 과학의 산물이며 관념론적이지만 지극히 유물론적인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들을 사고로 삼투압시킬 때 비로소 그곳에서 ‘철학’이라는 추상적인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철학자를 기이한 사람이라 여길 편견도, 전혀 철학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사람을 통속적이라고 비난할 여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글에서 사변에서 사변으로 이행하는 연역적인 과정이 결코 위대한 대사상을 탄생시킨다는 필연적인 근거를 반박할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현실의 반어적인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니까. 필경 철학이 존재하는 범주는 거의 모든 학문과 사史적 역사를 통틀고 있으므로 모름지기 철학자란 모든 학문의 종합적인 총체자라 하는 게 보다 적합한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항시 겸손함을 미덕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며 결코 현실과 분리되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철학이 가야할 길은 오로지 현실과 과학의 이중합주의 틀 가외의 것에서는 존속하지 않는다. 전화든 이행이든 명증한 섭리란 사적 유물론 구조적인 방식밖에는 어떠한 기술적인 접근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철학이란 일반인에게 결코 어렵고 도달 불가한 경지가 될 것이 아니라 보다 친숙하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서 따스한 조언으로서 다가와야 하는 것이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고 대부분의 선진국으로 도약한 국가들이 철학을 매우 고귀한 학문의 영역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 한국시민은 좀더 철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무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측면으로 하락시킬 게 아니라 지극히 세련된 학문의 분과로서 마땅히 귀하게 점철시킬 당위적인 근거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학문의 왕 ‘철학’을 간과하고 좌시하는 행태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기술과학이 빠르게 진일보하고 있다지만 이에 맞춰 철학이라는 이름의 ‘정신’이 비례하게 따라가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좀더 좁혀 말해 한국사회에 화려한 미래는 결단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이유를 토대로 나는 당신들에게 철학을 권면하는 것을 기필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필수적인 안건 중에 이 관건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요가 된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따라서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철학은 곧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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