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현대사상의 모험 13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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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무위에 대한 유위의 우위

 

현대는 유위적 지향의 삶의 연속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무위에 대한 반동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상성에 대한 근거와 향유가 도처에 근대화로 인해 은폐되어 있으며, 그 어떠한 동양철학에 의거한 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계속된 동시화의 산업구조 속에서 한 개인의 여유로운 무위에 대한 정신적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처에서 소유와 재능, 세속적인 욕망과 서구 아카데미즘이 시원인 쓰기와 덮어쓰기의 과정의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진보 다음에는 또 다른 진보가 있다. 모든 세상의 제요소가 변증법적 과정 아래서 자라나고 있다. 무위와 여유에서 비롯하는 보다 창의적인 생각은 노동시간의 증가라는 유행의 급물살로 말미암아 뿌리 채 뽑히고, 피상적으로만 다원화를 주장하는 사회의 패러다임의 이래, 사회라는 이름의 상속과 증여의 역사는 새로운 경제공황과 맞물려 변증법적 유물론의 부활을 지시하고 있다.

 

 

황무지의 역설적인 풍요는 현대사회가 신자유주의로 개명됨에 따라 완전히 사망했다. 세계는 유를 위한 유로 점철되었다. 좀더 많은 소유를 위해, 미시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단지 거기 있는 강박적인 노력으로써의 재능으로 인해,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이 곧 역사의 운동, 즉 역사학이라는 시각으로만 인지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삶으로서만, 결과가 시작이 되는 변증법의 무한한 운동에 반쯤 넋이 나가 더 이상 쉼터와 같은 자연,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유위를 이끌어내는 커피는 술보다 더 현대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기호식품이 되었으며, 더 이상 찍어내기 불가한 달러와 중국 인건비의 상승의 이중적 사실은, 인플레이션이 곧 계급투쟁의 반발로 이어지는 스프링운동(더 이상 눌릴 수 없게 되면 튀어 오르는)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것과 다르게 사회적 투쟁은 개인의 발전에 의지하게 되었으니 유위적인 것이 곧 목적이 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하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이 유위, 그렇다면 개인적인 것이 유위적 이익을 위해 허구와 가상의 한시적인 연대로 구축되는 사회적 구조를 우리는 미리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집단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1. 연대와 구조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결국 비항구적인 연대, 유동적이고 이해관계에 따라 쉽사리 부서질 수 있는 연대에 들어간다는 걸 뜻한다.연대에 있어 부차적인 것은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휴머니즘, 그것도 계급으로 말미암는 수직적인 피드백의 휴머니즘이다. 사회는 언제나 계약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다원적인 사회를 직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의 담합, 무수한 커넥션이 사회구조를 상정한다. 하기야 사회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전세계적 사회라는 것, 궁극적으로 자본이 원천이 되어 규제되고 개방되는, 즉 끊임없이 상호순환하고 변양하는 이 사회 전체가 바로 우리가 구성하는 물리적-관념적 의사소통의 장이다. 그 질서의 규칙은 역사가 대변하는 권력과 부의 상속과 증여에서 비롯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가문이 지시하는 상속의 역사다. 이 구조적인 사회의 공시성, 이른바 너무 복잡한 것 같지만 일견 모든 역사의 제요소가 일률적인 하나의 관점에서 논리적 연역의 발로에서 규정되는 하나에서, 이 일자의 역사적 가지성의 질서에서, 이미 죽었거나 현존하는 개인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에서부터 착취하거나 피착취하는 사회인으로 규정된다. 언제 어디서나 권력과 부의 피라미드는 역사적으로 변동 없이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비로소 한 개인의 탄생이 곧 일자라고 잠칭할 수 있는 사회와의 계약-신과의 계약-이 구성하는 역사 속에서 진정되었다. 우리는 사회가 보여주는 파노라마와 유행하는 패러다임에 의거한 현실태에 부닥뜨린 것이다(가능성은 죽어있다).

 

 

정치경제학은 현상학에 의거한다. 결국 배후의 문제도 규명된다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계의 원리 아닌가. 절대로 이원론적인 요소가 진리의 자명한 일원론성을 가릴 수 없다. 그 어떤 복잡한 사회라는 현상계도 결국 보여줄 수 있는 선형적인 문장과 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는 곧 역사이다. 사회의 구조성(공시성)과 역사성(통시성)은 상호주관적 개방성으로서 나선형의 형태로 시나브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침내 현상이라는 반성적 규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실천적인 형태는 이론학의 규명 속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론학은 의사소통의 최고도의 장인 학계에 의해 변양의 궤적을 그린다. 이리하여 이론과 실천의 순환 역시 변증법의 원리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위적 진보를 보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원론의 정상에 서 있는 현상학과 변증법, 그리고 양자의 동적 관계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좀더 앞으로 나아가자.

 

 

2. 연대와 구조2 : 현상학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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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의식, 병렬적으로 나열된 의식들의 변주, 그 순간에 행복도 불행도 없이 하나 됨을 느끼지 못한다. 단순한 이인증인가 지적도약의 새로운 계기인가, 그런 유들을 우리는 아직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 현상학은 단 하나의 규범을 제시한다. 바로 사태 그자체에 의식의 감압 없이, 그러니까 어떠한 편견의 제약 없이 오로지 사태(사실)에 대해 순수함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걸 뜻한다. 여기에는 의식의 파노라마가 규정하는 임의의 인과나 전제된 명제의 색안경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미묘하게나마 정초의 잣대는 내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믿음에서 기약되는 것이거니와 항상성을 가지며 현상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그러니 본디 이 정초 역시 현상에 원본적인 의식인 것이다. 이를 필증적 명증성이라고 한다. 그런즉슨 우리가 사유하는 것이, 나아가 사유와 사태의 일치, 이는 이른바 충전적 명증성이고, 그리고 양자가 결합할 때 즉 이러한 일치의 당위가 이른바 순수현상학이라는 독보적이고 특칭적인 철학이 주장하는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 역시 세계의 해명에 거반의 역량을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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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호작용에서 연대가 특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기야 세계의 구조는 사회의 구조이고, 사회의 건설은 역사성이라는 직선적 시간성에서 현전하는 것이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통시, 사회가 역사라는 명제는 보편타당하며, 동류에서 동류로 이행하듯 명석판명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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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모종의 계약으로 말미암는 이익집단이다. 즉 이익의 깃발 아래 한 곳으로 집결한 표명결사대이다. 그러나 사회의 배후에는 정식적인 것이 아닌 비밀결사도 부르주아의 담합을 위시해 은밀하게 맺어진다. 바로 이것이 사회 제반 구조를 개설하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대를 표명결사의 층위와 비밀결사의 층위로 나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나는 사물들은 전자이고, 암흑에 둘러싸인 가장 사악한 세력들은 막후에서, 즉 빙산 밑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며 기생할 생각으로 온갖 작전을 동원하고 있는 후자다. 이로써 전자든 후자든 현상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이 관점이 바로 사회가 은폐하는 부조리이다. 다시 강해하자면, 보이지 않는 미시적 배후, 이것들까지 전체성으로 투시하여 일련의 현상학으로 나타내는 것, 이는 이른바 현상학이 사회과학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문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현상학적 관점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초에 은밀하게 가담하면서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궁극적인 전체를 과학적 인식론으로 해설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특수성으로 있다. 보편성이라는 휴머니즘적 정신은 더 이상 사회의 해악 아래 숨구멍조차도 막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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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대와 구조3 : 언어로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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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물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는 퍼즐을 찾고 직조하는 게임과 같다. 하지만 어떤 유의 설명으로 이론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할까? 되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 적은 주제를 수많은 언어로 논하는 것, 이것이 아주 완전한 방법적 시도일 것이다. 결국 쓸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를 엄청나게 다종다양한 언어로 해명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은근히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바 이런 방식이야말로 모든 철학책이 시도했던 시나리오의 방법일 것이다. 좌우지간 방법에 대한 문제가 직접적으로 이론가에게 돌직구로 날아든다. 해명할 수 있는 문제는 더욱더 언어의 미로에 빠진다. 단말마. 쓴다는 것에서 희를 찾지 못하면 그 죽음과 가까운 고뇌와 대면해야 한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것, 이러한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쓴다는 것의 핵심은 잘 쓴다는 게아니라 그냥 쓰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자신을 위해 쓰는것이다. 하지만 결국 잘 쓰는 것 자체가 자기완성의 길목에 있다면 그냥 주구장창 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그리고 쓴다는 것에 더욱 더 쾌락을 느끼길 원한다면, 끝도 없는 지식과 문예와 미학에 대한 탁월한 고찰, 그리고 궁극적으로 스타일, 그러니까 글쓰기의 자기개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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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계속해서 말해져야 한다. 말과 말이 맞물려 더 장대한 말이 되어야 한다. 즉 말과 말의 교미는 새로운 말의 변태를 가져와야 한다. 이것은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말의 변증법적 개념으로 향한다. 그러나 단순히 회포를 푸는 말, 마냥 하는 말은 광인의 수다처럼 무의미할 것이다. 문예이든 철학이든 말은, 언어는 표상을 넘어선 궁극적인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라는 중심개념으로 자신의 이론을 밀고 나갔던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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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는 언어도단이란 없다. 말해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 단지 규범적인 형식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해서 도를 지나친 글들이 책으로 엮여도 인정을 받지 못할 뿐이다. 사실상 순문예와 학문성이 인문학의 세계를 당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론의 방법론적 문제는 이념적인 것을 규범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데에 그 발로가, 닦달음하는 출발이 있는 것이다.

 

 

괴로운 불안, 그리고 이와 함께 달리는 글쓰기. 어떤 주제의식도 화두도 없이, 아니 만약 이 산문에 화두란 게 있다면 나의 방향의식을 중심으로 달리는 관념론적 이론학에 가까울 것이다. 이론이라는 것은 어원상 다른 것을 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내 산문을 논급의 형식으로 쓴다면 이는 미학의 범주에서 벗어날 것이다. 문학적인 형태야말로, 마치 벤야민처럼 독특한 천재들이 쓰는 글이 보여주는 그의 공부형식 같은 것, 정말로 우리로선 따라갈 수 없는 터져 나오는 독특한 지성의 홍일점이자 백미. 결국 중심적 의제는 삶과 글쓰기가 일체가 되는 것, 하지만 독서 없는 글쓰기에 무슨 알맹이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미친 듯한 독서야말로 천재의 기본적인 수칙, 즉 그의 스타일 아닐까? 불안으로 있는 것, 솔직히 말해서 커피는 불안을 야기한다. 기분 좋은 불안, 정신의 날뜀, 즉흥적으로 쓰고 또 쓰는 것, 이 시대는 잉크의 분사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상의 기입, 흩날림 같은 것이다. 불안이 곧 검은색의 흩날림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서구적 글은 적은 의미를 가지고 많은 현란한 수사적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반면 어떤 방법론적 원리에 의거하여 글쓰기 자체에 전환점을 두는 것이 바로 독서다.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읽는다는 것은 곧 사유다. 읽음과 사유, 글쓰기는 지성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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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쓰임, 모든 언어와 지식, 형식이 이용되는 철학의 총체적 글쓰기. 백지에 끊임없이 농축된 발화의 가래를 뱉기, 그리고 정리하기, 따라서 완성되는 일련의 정식. 우리는 언어학의 존재론적 구조가 마침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줄기찬 산문에 의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이론의 방법론적 시작을 이해했으니 단계적으로 변증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갈 차례이다.

 

4. 연대와 구조4 :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객관적 유물사관을 기준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비트는 것을 도구로 삼아 탄생한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대부분의 시민이 노예였던 것으로부터 20세기 미국의 중산층의 폭발로까지 구구절절 실증적 사실을 통한 역사적 기술이 전자일 것이다(특별히 역사의 어떤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역사에 대해 해명하기에 앞서 인류의 기원과 시작에 대해서부터, 그러니까 인류 일반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에서부터 마르크스는 원용했다. 결코 헤겔에 대한 계승의 책임에서 마르크스를 철학자라고 규준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세계에 대한 역사철학적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당대 사회의 구조를 완전하게 꿰뚫어본 공에서 그의 철학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물질적이고 인식 가능한 구체적인 현실을 역사성에 입각해서, 이 모든 것을 변증법적 원칙으로 규명하면서 현실해결의 원칙을 이루는 것, 이것이 후자. 그리고 전과 후가 상호침투하면서 사회이론의 인식을 넘어서 실천적 집단행위까지 이어지는 것이 다른 철학자들과 구분되게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이 공준한 이론의 독특한 명증적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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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부터 연대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생한 잉여가치가 착취라는 정을, 이에 대한 반동으로 거반 세력인 피착취 대상이라는 반을, 마침내 투쟁이라는 합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외관상 변한 점들은 있지만, 구조적으로 달라진 건 마르크시즘의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개방을 위시해 더 거대한 착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 더 많이 만들어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인류의 대다수가 자본의 구조 안에서 착취당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제시가 중요함의 문제에 있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열쇠와 같은 것이다. 하기야 마르크스의 토지와 인구문제, 지주와 농노의 관계 그리고 토지의 면적(반경)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IT사회에 있어서 사회과학적으로나 정치경제학적으로나 뒤로 물러나는 낡은 개념이겠지만, 그러나 이 토지면적에 따른 경제의 문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기술의 발달로 황무지조차도 빌딩숲으로 개간할 수 있고,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교통에서 불리하다면 인구가 집적되지 않는 변방이나 황무지로 뒤쳐질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주와 농노의 관계는, 임대료를 챙기는 건물의 실소유자와 항상 장사가 안 될 시에도 비싼 임대료를 내야하고, 장사가 잘 될시 건물을 비워달라는 술책에 대한 양면적 공포에 휩싸여 있는 규모 작은 자영업자의 관계에서 상정될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떤 사업이든 건물을 매입하지 않는 한 대기업 미만규모의 사업에 있어서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로 빠지게 되는 걸림돌, 일종의 늪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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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철학은 오늘날에 있어 좀더 현실적으로 변양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적 범주론과 같은 추상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야 하며 현실의 모든 제요소를 망라하는 우주적 총체에 가까우며 후자의 경우가 마르크스가 필생에 주장했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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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순수현상학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가? 우리는 이 양자의 동적 관계를 알아보기에 앞서 언어유희의 거장인 사르트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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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대와 구조5 :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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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그의 철학과 문학, 그리고 그와 실존주의에 대한 열광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남아있다. 실존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문학에서 예사로 운위되는 실존주의 일반, 철학에서는 니체, 메를로 퐁티를 거쳐 이 글의 주인공인 사르트르와 카뮈로 표상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그 외에 여러 타입의 실존주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이 대자적인 의식이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자유이며-물론 여기에 따른 책임은 있지만- 미래를 향해 이론적-실천적으로 기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요약한 것은 존재와 무라는 철학서의 핵심을 쓴 것이고, 사실상 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무수한 언어유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언어유희라 하여 논리학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철학적 개진 자체를 뒤집어엎고 시도하는 글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종훈 교수의 말처럼 현대철학이 언어적 전회에서 발로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데리다의 에크리튀르 개념은 후설을 시작으로(20세기를 시작으로 하는 현대철학)에 있어, 언어 그자체를 도구가 아닌 목적, 즉 몸통으로 자신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신들린 언어유희 역시 나의 글쓰기의 스타일에 있어 전범으로 삼는 형식이었다. 그의 글에 대해 논하자면, 후설과는 다른 의미로 알아보기 어려운 만연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사르트르만큼 비비꼬아서 글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어떤 무한한 것, 이미 대중의 책들의 글 형식을 넘어선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 그는 당대에 이해받지 못하는 글을 쓰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게 글을 쓰는 사람, 만연체의 제왕(이것은 그의 생각이 복잡해서일까? 아니면 이미 그의 언어에 대한 재능으로 말미암은 타성 같은 것일까?), 글쓰기가 뭔지 아는 멋있는 지식인 정도로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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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그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말하자면, 아마도 그는 각성제를 즐겨 이용해 글쟁이만이 심취할 수 있는 불안을 즐기고, 불안의 고통스러운 카타르시스가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면(생활습관을 추적해보면, 그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셨고 줄기차게 파이프 담배를 피워댔다. 파이프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통 30분에서 1시간 넘게 피울 수 있다. 암페타민 계열인 코리드란을 남용하다시피 한 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집필할 무렵이다). 카페에서 글을 썼다고 하니 아무래도 에스프레소 샷을 6개 정도를 한꺼번에 우유나 크림에 타서 빈속에 마셨을 것이다. 커피와 담배가 교차할 때 단순히 각성효과가 아니라 하는 능력이 항진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미스터리가 있다. 단순히 의식에 나열되는 말이 아니라, 흰 백지에 생각 없이 갈겨쓰는 것(사르트르는 노인이 되어 눈이 멀 무렵 자신은 어떠한 철학적 사고도 해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것도 폭발적이고 즉흥적으로,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갈겨쓰는 체질이 있다. 이런 체질을 나는 사르트르적 체질이라고 할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언어를 측두엽의 브로카영역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복잡한 생각은 전두엽, 전전두엽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무에서 생각 없이 선험적으로언어가 커피와 담배로 인해 터져 나온다면? 흰 백지와 펜만 가지고 영감도 생각도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깨어 있는그자체로 글쓰기를 연마하고 연마해서 결국은 지식의 언어적 마에스트로가 된다면?-이것이 바로 에크리튀르의 최종 개념이다(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글쓰기라는 미궁의 변증법이므로 엄청난 양의 독서 없이는 잿물과 같은 글이 탄생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글을 쓸 때 발하는 광채, 생각 없이 쓰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 언어를 무의식에서 길어내어 병렬적으로 나열하면서 순식간에 조립하는 그의 언어변증법적 글쓰기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 천재적인 비결이 바로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의 명예를 가져온 것이다. 이 무식함 속의 탁월함이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의 방법론을 알았고, ‘변증법적 이성비판’, 즉 여기서 다루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실존적 현상학의 완전한 결합에 대해서 해명할 차례인 것이다.

 

 

6. 구조주의에 대한 탐구, 가지성과 불가지성, 무위와 유위의 문제

 

산문의 작문(=산문적 글쓰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형식상의 자유성이 확보되어 있다. 여기에는 완전히 논리적인 연결성(논리학적 연결고리)에서 생성되는 일련의 장이라 일컬을 수도 없고, 의미론적으로 과학적 차원을 서술하는 것도 아니다(즉 정밀함을 중요시하는 과학서와는 그 종지를 달리한다, 그것이야말로 산문이고, 산문의 예술성이다). 반면 전적으로 이념적(=관념적인 것의 규칙적인 장)인 것도 아니다. 후설은 의미와 지시체를 구분했다. 그러나 현상학적 구분 없이 이를 정식적으로 표현해보기로 하자. 간단히 말해 기표란 달을 가리키는 손의 표층적인(=날줄) 형태다. 지시체란 달(씨줄)이다. 의미란 달의 속성(형상)과도 같은 것이다. 지시체와 의미 양자를 기의라고 할 수 있다.지시체와 기의를 유별한다면, 이를테면 일그러진 달을 일그러진 달로 인식한다면 지시체와 의미의 구분은 애매모호할 것이다. 분명 둘은 동일하기 때문(동일률)이다. 여기서부터는 불어의 개념을 도입하기로 하자. 랑그와 랑그주. 둘다 언어라는 불어의 뜻인데, 랑그라는 좁은 의미의 추상적(개념적)인 것이 지시체라면, 랑그주와 비슷한 더 넓은 외연을 가진 의미(sinn)는 표현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까지 함축한다. 그리고 그 기체(일그러진 달이라는 사물)까지 수학적으로 내포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미(sinn)’란 가치를 나타낸다. 행복 같은 감정 같은 것 말이다.따라서 지시체와 의미의 차이는 인식론적으로 현상학적 환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앞서 기표가 기의를 능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이라는 글의 문형(생명 없는 신체)은 생명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자기운동일 것이다. 이는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적 언어유희에 의해 달성가능하다. 언어유희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따로 할 필요가 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추측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성문법론이란 언어의 규칙(문체), 문체나 작가가 만든 알아볼 수 없는 신조어가 아무리 기벽하다해도 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작가가 아무리 자신의 글을 뒤틀고 만연체로 도배하고 일부러 난해한 문장을 만들고 무수한 신조어를 만든다 하더라도 같은 모국어를 매개하는 작가와 독자는 서로 간 그 글의 의미나 지시체를 이해할 수 있다. 생성문법론은 이로써 어떠한 한계 없이 무한하게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 그렇다면 기표(신체, 즉자, 생명 없는 물질)라는 에크리튀르 자체가, 이 피상적인 수사적 형식이 무한한 기의(의미, 지시체, 정신, 대자)를 생성한다면, 공시적으로 따져볼 때 기표의 무한성은 기의의 무한성을 담보한다. 기표와 기의가 구조적으로 같은 시점 아래 공유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공시적인 환각, 이것이 바로 에크리튀르(문자언어, 글쓰기)의 새로운 이면이 아닐까?

 

 

언어의 무수한 정의의 연산으로 이루어지는 변칙적인 문장구조, 이들의 설계는 그리하여 한 주체의 글은 이미 타자들이 됨으로써, 즉 일련의 글에 많은 작가들이 있음으로서 무한히 많은 지시체의 연쇄를 나타내는 천재적인 역량을 그 안에 담아낸다.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그러니까 의미나 지시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형식도 아니다. 그것은 글이라는 예술작품의 전체성 즉 아우라의 문제다(여기에서는 논리학적인 철학적 글도 포함된다).

 

 

우리는 오래 동안 말과 실천을 구분해왔다. 그러나 말이라는 언표는 이미 실천에 다가서 있다. (사유)이 실천(행동)인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맞물림으로써 글은 선형적인 동일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글이라는 좌표에서 뻗어나가는 의미의 방사선은 압도적이다. 언표는 명제라는 작은 범주로 상징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명제 속에서 구조적 집합으로서의 우주를 발견한다. 이미 명제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명제가 또 다른 명제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끌면서 폭발적인 사유는 명제의 규칙적인 전체화가 된다. 변증법적 사유가 이미 증명을 대리하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를 규준할 수 없는 대해로 빠져들게 한다. 마침내 끝없는 문장과 그 문장이 지시하는 관념은 무위를 지향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자 하는 실천적 자세로 마침표를 찍는다. 더 이상 무위와 유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무와 유는 유비되기도 하지만 차연적인 관계로 정립된다. 즉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 사이에는 끝없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무수한 차이로서의 연결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승려적 삶을 사는 것은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비세속의 삶이고(따라서 세속은 상대항으로 언제나 존재한다), 불가에 귀의하는 듯한 글쓰기적 실천이라고 우리가 규제한 이론학, 즉 말의 연쇄가 사고(思考)는 사태(事態=사물)를 표상하고 존속시킴으로써 실천적 완성을 이룩하는 사유 역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 사고라는 가상의 세계가 현전하는 존재자의 실재를 규정하는 근거는 표상과 고결하면서도 끊임없는 고결한 이상의 장소에서만 엄존할 수 있다. 반면 말이 실천에 이르는 최종심급은 어떤 면에서 유위 속의 무위다. 마치 음악의 휴지기와 연주하는 부분의 관계에서처럼 유기적으로 차이와 연계, 반복의 삼박자의 메커니즘으로써 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운다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이고, 실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개념들의 내재성의 장을 이루는 지향과 욕망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욕망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층위에 있는 것이고, 지향이라는 고결한 층위는 학문함과 사유함이나 승려로서의 무위로 한 인간을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글을 쓰는 것, 학문함은 자기완성으로 향하는 것과 역사에 자신의 무명을 입체적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그런 세속적 차원은 지엽적인 것이고 어디까지나 글을 통해 무상성이라는 구도(求道)의 완성이 중요하다. 만일 예술가의 삶 역시 자본과 상호 교류한다는 점에서 세속적이라면, 그것은 사물의 한 면(노에시스)만 바라보는 꼴일 것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전체인 노에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지만 학문 이상의 것, 즉 글쓰기의 종교나 도의 차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고 일종의 도가 될 수 있고, 분명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인 것, 본격적인 진리로의 이행일까? 진리를 구명한다는 것은 어차피 쓸 수 있는 범위를 자신의 가지성과 선비정신(=아카데미즘)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생사의 초월이나 우주와 자신이 일종의 동일자가 되는 범여일여의 해탈로, 극한의 세속적 차원 안의 비세속적 차원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과정으로서의 생에 의거하는 실존주의의 에크리튀르다. 글쓰기의 궁극인 실존의 형이상학, 비록 그 실체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만일 말이 실존의 형이상학을 증명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우주를 관통하는 지성에는 육박할 수 없다. ‘실존의 형이상학이란 실존주의가 인간주체랑은 분리될 수 없고, 인간주체의 추상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결국에는 하나의 실체인 객관적인 개념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우주를 보는 시각을 바꿨듯이, 실존주의의 최종지점인 형이상학적 기저가 객관적 개념의 환원을 통해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문학, 심지어 생활세계 전반의 지형도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원칙은 무신론(부처를 죽여라=주체의 지성을 추구하라), 유념의 극한에 다다를 때 오는 무념(쓰기와 덮어쓰기를 통한 비우기, 즉 이론학의 자기초월적 무상성의 실천=요컨대 생각을 지우려 하면 떠오르기 마련이고 내려놓으려하면 이미 들고 있는 게 된다, 욕망을 제거하려면 더 높은 층위를 차라리 고결함을 지향해야 한다),가지성에 내포된 무한개념(알 수 있는 한 끝없이 알 수 있다=배움과 인식의 무한한 가능성) 등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한 개체의 글쓰기와 지식이 불가지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언어유희에 의한 다의성과 다의성이 포개져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즉 불가지적인 것 전체를 파악하는 인식론적 주장은 아니지만, 최소한 영적인 것과 비세속이 다다르는 무위의 지점은 표현가능하다. 철학자들이 무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 승계호 교수는 철학비판학자라기보다는 비판을 위시한 비판론자다.

 

 

불가라는 이념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망라하는 유일한 무위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글쓰기와 지식이라는 학문과 언어라는 유위의 역사에 대해 긍정해야 한다. 삭제하기보다는 쓰기와 덮어쓰기의 우위, 내려놓는 것에 대한 들고 있는 것의 우위, 이를테면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데 휴지기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연주파트다. 연주파트는 과정으로서의 생이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사회를 이루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생성해나가는 역사일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얻었고 그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

 

 

 

 

7. 실존주의+후기구조주의

 

 

 

학문을 수양하면 외부성(세계의 초재성)만을 배우고 분석하는 것 같아 때때로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기투라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명시화되는 현대의 내재성, 실존주의가 표방하는 내재성은 순간적인 것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실사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으며, 이 즉흥적 개인주의가 종말을 맞더라도 세계라는 역사성은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항구적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실존이란 더더욱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실존을 결코 쾌락의 만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실존은 일률적이고 팍팍한 프롤레타리아의 생에서 존재의 개별성의 진리적 의미를 되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음문자적 깨달음, 즉 내면의 음성언어의 목소리를 듣는 것, 즉 이성적인 것(로고스로 상징되는)에 복종하는 내재적 행위를 시대적인 문명적 코드와 규약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면성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 존엄성, 즉 인간적 진리의 내재적 차원이 자유인 이유는, 그 공간만이 어떠한 사물의 세속적 차원에 물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속과 비세속을 가르는 것은 기표(신체=자신의 경제적 외모적 조건)를 보는 게 아니라 기의(정신=내면)를 해석하는 것, 그러니까 구체적인 존재자에서 현상계 너머의 진리로서 불변하는 존재를 추출하는 것, 그럼으로써 한 개인의 삶이 앎에 대한 자기확신(=믿음)에 찬 궁극적인 개별성의 대오로까지 상승하는 걸 뜻한다. 이것이 정보로 넘치는 현대적 삶의 특징에서 실존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다(이는 마치 다시 플라톤을 회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편으로 실존주의는 고전에 대한 독서 즉 문헌학에 대한 실천일 수도 있으며,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오솔길을 따라 걷는 사색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면의 목소리(표음문자적 글쓰기)이거나, 기표로 하는 연주(어느 정도 원숙해서 쓰기-기계가 되는 기법)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배움에 있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세계, 표의문자의 세계인 불가를 포함한 동양철학에도 견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학문과 문화는 통하는 법이니까. 현대에는 경제, 문화적으로 통합되고 있고, 고대에도 진리의 기원에 대한 동일성은 즉 이 무위와 유위의 두 양가적 문명의 종지는 일자이다.

 

 

 

우리는 에크리튀르(문자 이전의 글쓰기, 즉 충만한 내면의 음성언어)를 통해 이성적 사유를 통감한다. 의지력은 언어에 의해 구성화 된다. 철학적으로 원숙하다는 것은 자기철학의 내용(비물질적 실질)을 언어로 표현(물질적 실질)한다는 것을 뜻한다. 표의적인 표현이든 표음적인 표현이든 좋다. 표음화가 현대화의 상징이라면, 표의는 기원이나 근원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또는 수학과 과학의 기호들, 문자와 상징을 망라하는 전체적인 기호체계, 퍼스의 기호학.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진정 중요한 것은 개념의 실사들을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아닌가?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들의 확장도 결국 내면 의사소통이론의 확장 아닌가? 그러니까 두뇌를 쓴다는 것은 두뇌라는 기표가 마음(의식)이라는 기의(실사)와 일치하는 지점에서 빅뱅처럼 우주의 지적 폭발의 확장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두뇌와 마음 양자를 이어주는 매개는 언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타자에서 동일자라는 자연스런 종차로 이행할 때 그것은 살아있는 실사적 진리(내재적 파롤=내면의 발화, 자유의지)가 되는 것이리라.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기호들은 집합적 표상이 아니라 모종의 실재적 파워를 가진 코드의 리듬과 같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언어란 실천적인 음계의 차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8. 무상, 비세속, 무위.

 

 

소통불가능성으로 대립된 인간, 우리는 말하지만, 사실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는다. 사회의 의사소통적 장,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계약론의 전체적인 양태를 가지고 있다. 순수함은, 순수함의 의사소통은 유년시절 때뿐이다.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것은 돌이킬 수도 없고 단지 무상, 비세속, 무위라는 삶은 물론 죽음의 통째를 차지하는 제반요소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는 삶의 덧칠이란 이런 상실의 공간들을 매 꾸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삶의 특징들의 색채를 칠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데 비례해서 덧칠을 계속한다. 결국 순수성에 의거한 유위란 착각이다. 내가 앞서 제시한 것은 세속이 변양해가면서 생성해나가는 유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어느 동양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지긋한 도란, 실체는 보이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비세속이고, 무위이며, 무상한 것이지만 무의 속성에는 일정한 연속성도 없고 어떠한 한계가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말처럼 순수 무는 자신이 있을 공간에서 현성할 수도 있다. 무의 본보기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개념은 불가의 무학이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수행해나가야 할 공부라는 개념에 반하여 더 이상 배울 가치도 없을 정도로 깨달음을 얻어 이미 그 반열에 오른 것. 무학이야말로 세속에서 탄생한 학문을 부정하는 것이고, 서구문명의 세속적인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옆으로 비틀어 꺾는 것이며 한국사회의 평생공부열풍에 대한 무위에 대한 가장 큰 실천이다. 즉 무학은 미래조차 부정하는 관념론이다. 그런데 그러면 어떠한가. 꼭 학문적 헤게모니나 교양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진보일 수도 있다. 무상의 길목에 들어서면 어떠한 위협과 부정적 상황조차도 순수한 무로 치환된다. 하나의 굵직한 개념이 모든 생적 개념들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제3, 서구학문도 아니고 동양학문도 아닌 양자의 교호와 같은 것. 아니 더 이상 서구라고도 동양이라고도 제3자라고도 규정할 필요가 없는 지점, 이런 비규정, 규제적 발견이야말로 진정한 철학함의 본모습이 아닐까?

 

9.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의식, 주체, 이성 일변도의 철학이 객관적인 방향으로 이행해 실증성의 등급으로 귀화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20세기는 철학의 세기였다. 그 어떤 세기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런 카오스의 백가쟁명이 대표적인 철학자, 탑의 지식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프로페셔널리즘, 즉 분과학문의 전문성이 강조되는 지금 철학은 모든 걸 망라한다는 자부심을 조금은 접어두고 고유한 지적 전통에 자신의 육신을 기댈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 철학이 살아남으려면 여전히 전체를 망라하는 스케일 큰 기획을 기준으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 들뢰즈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현대는 시뮬라크르, 곧 허상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신보다 오래 존속하지 않으며,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의 동일성보다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모든 동일성은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이 구절에서 주체의 동일성에 대해 실체의 동일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주체는 끝이 났고, 실체에 의존하는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여태껏 그래왔지만 철학이 항상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할 필요는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더더욱 실체(객체) 중심의 동일성과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사의 위치로, 초월론적으로 격상해야 한다.

 

우리가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창시자의 예를 따랐다고 낡았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바디우와 지젝이 있다. 바디우는 철학을 역사성과 단절해야 이 시대에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지혜의 전당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역사성이다. 반면 지젝은 라캉과 헤겔 사이를 오가며 공산주의의 부활을 제창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기획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그 어떤 주의도 이를 대체할 수 없고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새로운 인류의 건설을 담보하기에.

 

뒤를 보면 급격한 낭떠러지가 있다. 선택의 여지는 무이다. 단지 흐느낌과 염세주의, 그러한 것들은 현실과 더욱더 멀어지게 하고 리얼리티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돈키호테와 같은 아카데미즘의 지향. 도주와 도피를 위한 사색과 글쓰기, 그리고 이미 인생을 대리하는 산문들.

 

텍스트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하자면 많이 낡은 느낌이 들 것이다. 너무나 많은 갑론을박들이 이미 논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은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활용성일 것이다. 어떤 해방적 구실을 담보할 수 있나, 쓰기의 음계적 변주가 자칼과 같은 혀를 양산할 수 있나, 그런 실용적 평가 말이다. 만일 박제된 예술성으로 그 의미를 끌어낸다면 우리는 고리타분한 미학이란 범주만을 고찰하게 될 것이며, 문헌학적 탐색의 샛길로 새 나갈 것이다.

 

우리들의 공존의 공간에 있는 선택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작은 공간으로밖에(밀집된 공간) 이루어질 수 없고 바로 이 공간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피상적으로는 연대와 연대의 투쟁이다. 여기서 사회계약론은 만인을 매개한다).

10. 실존한다.

 

바디우는 일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는 사르트르주의자이다. 초기 사르트르, ‘존재와 무의 강렬한 자유의 상징을 지닌 사르트르 말이다. 그는 진리성의 집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진리성을 집을 수 있는 집게가 분명히 있다는 얘기이다. 바디우처럼 진리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철학자가 또 있을까. 들뢰즈 이후 철학은 공백이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였던 탁월한 들뢰즈는 많은 것들을 설명해내었고 연산공정의 크나큰 기획을 표시하였다.

 

 

역사성과 영원성은 항상 대립한다. 즉 유위변전과 지속은 철학사의 테마였다. 영원성의 섬광은 순간적인 것에 영원함을 부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주체, 과학적으로 보면 한 개체의 삶의 중심적 테마에 귀속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역사주의와 단절이라는 철학적 음모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문과 기술은 역사성에서 비롯되었다. 인식론적 범위조차 그러하다. 이를테면 우주생성이나 인류의 연대의 시간성을 예측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펜에 의지하지 않고 발굴과 귀납을 통한 역사인식은 인류의 시간성을 무한히 정밀하게 확장하였다. 과연 영원성의 섬광이란 무엇일까? 일종의 영지주의인가? 들뢰즈는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역사성과 영원성을 대립시킨다. 영원성은 요해지평의 무한한 확장일 수도, 개념의 무한한 확장일 수도 있다. 거기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반시대적 철학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논리적으로 차이소에 의거한 범주론적 도식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범주는 분화되고 미분화된다. 그렇다고 결론에 이르러 도덕적인 전망보다는, 그러니까 도덕적 한복판에 호소하기보다는 영원성의 섬광이 무엇인지 역사성과 유비하여 그러한 점을 해명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공통분모의 진행형을, 그 연쇄가 폭발하여 마비되는 관점을 독학자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언제까지나 진리에 대한 해명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일반성에 대해 질적 질서에는 유사성이, 양적 질서에는 등가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사성의 대체로 질적 질서와 양적 질서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극복은 철학사에서 오래 동안 보전된 방법론이다. 그는 일반성이 반복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일반성 안에 반복이 종속되던지, 반복 안에 일반성이 종속되는 유비의 귀결은 극복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일 무한한 반복(영원회귀와 같은)이 있다면-그가 니체에 의존하는 것에 빗대어- 반복 안에 일반성은 종속되고 차이는 없어지며, 유사성은 이미 질적 질서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유비는 동류 대 동류로서 능동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원성의 섬광은 지의 동일성이다. 이것을 누리는 주체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기호언어에 함몰되어 있다. 혹은 학문적 야심에 대의를 세워 학계에 출사표를 낸다. 지식인들은 많다. 또한 세계학계는 백가쟁명이며,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위대한 학자는 신이 선택하는 것이며, 굳이 피상적으로 출사표를 내지 않아도 자기 자신의 지해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영원성은 순간적인 것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장에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열정적 기투이다. 우리 사회는 다시금 실존주의를 재장전할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현상학적 실존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제시되고 계시되는 새로운 실존주의의 타입에서 말이다.

 

10. 심층적인 논리학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지 않는다. 글쓰기는 앎을 확장시키고,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앎을 언어로 대자적으로 각인(엔그램)시킨다. 여기서 대자적이라는 의미는 본디 사르트르적 의미와 우리가 규정하는 범주적 구축론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 글은 생각과 사유를 언어적 체계로 구축시킨다. 즉 유위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쓴다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진다면 사유는 좀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단독자들이 실천적으로 이를 이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해석학에 몰두하면 그걸로 족하다. 많은 지혜를 가진 지식인들이 우리의 글쓰기를 대리해주기 때문이다.

 

 

텍스트들은 무수하고 이것은 독특성과 관계한다. 텍스트들은 무한한 반복이되 무용한 반복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문명은 이를 통해 나선형으로 발전해나간다. 따라서 문헌학적 계보는 실증주의적 역사성을 대리한다. 만일 고유한 생각이 폭발적으로 터지는데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학계(언어 혹은 기호)와 공유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학문적 유죄일 것이다.

 

 

지난날 서구 철학사의 싸움은 언제까지나 논리와의 싸움이었다. ‘왜 그런가?’를 표현하기 위해 질문에 대한 답에 논리를 포장시키거나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심지어 소피스트적 논박이든 수학적 논리와 어법이 가미되면서 체계의 철학만이 탄생했다. 철학은 모든지 정합성의 싸움이었다. 이런 가운데 논리실증주의가 발촉하고 철학의 한 구, 한 절은 논리적으로 그릇되면 그 의미가 아무리 심오하고 깊든 배리가 되었다. 거기다가 증명의 문제가 있었다. 경험주의는 증명에 대해 요구했다. 더 이상 철학은 심오한 아포리즘의 연쇄가 아니라 하나의 수학소에 불과하게 된 것이었다. 수학소라는 말이 부당하다면, 언어논리소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미의 결여를 뜻한다. 의미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는 철학이 말이다.

 

 

철학이 이원론 사이를 배회했다면 우리는 한 가지 사유의 질적 차이를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유와 직관적 사유의 차이는 질적 차이이다. 박이문은 언어적 사유만이 인간사유의 조건이라고 각인했다. 그리고 또한 전자와 후자를 가르는 것은 글쓰기에 대해 준비되어 있는 질료의 충전성이다. 굳이 직관적 사유라고 할 필요 없이 직관적 코기토(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사유는 어느덧 존재론적 위치를 점할 것이고 언어적 사유와 직관적 사유의 이원론, 즉 양자택일적 선택지는 평평한 일의성으로 굴러들어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원론이 항상 바보 같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이건, 그렇지 않건이라는 조건은 또 하나의 전체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원론은 언뜻 보기에는 우둔해보이지만 테제에 대해 집합의 모든 영역에 수를 채워 넣는다. 논리학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바보이건, 바보가 아니건이라는 명제의 조건은 바보라고 언표하든지, 바보가 아니라는 긍정적 언표를 실행한다. 바보가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똑똑하다는 가능태를 내포하고 있다. 이원론의 외연은 모든 관점상의 위치를 포장한다. 여기서 이런 이원론을 불식시키려면 역량적인 일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더 괜찮은 3자의 해결책 혹은 두 가지 중 옳은 선택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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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사고와 글쓰기 - 개정3판
한양대학교 국어교육위원회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글쟁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책을 내지 않고, 워드프로세서로 즉흥적으로 글을 갈겨 써 포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글쟁이란 하루 중 대개 고독 속에 있다. 대부분의 글쟁이(철학이나 문예,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인문학적이거나 종교와 보수 비판적인 객관론적 관념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 등)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세속적 최대양식인 거대한 돈과, 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위치에서 동떨어지고 골방으로 들어간다, 설혹 소수는 결혼과 연예도 하지만, 대부분은 좁은 사회 관계망 아래서 학계와 출판계 혹은 문예계의 친구와 깊게 지내고, 이 인간관계에서 얻는 만족감과 더불어 독신으로 사는 바가, 유럽이든 한국이든 조상들이 해왔던 것이다. 이들은 영감을 받을 때 자신의 몸이 더러 워도 결코 씻지 않는다. 흐름이 깨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글쟁이들은 고통 속에서 글을 쓴다. 역사 이래 이 개념이 바뀐 적이 있었는가? 대다수의 글들은 관념적이고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완전한 논픽션 산문도 인위적인 형식의 기술적 접근이 시도된다. 글쓰기로 말미암아 글쟁이는 자신을 반성하고 회고하고 개진해나갈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존재하고, 글쓰기의 행위는 투사投射와 같은 것이다. 곧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정신의 집합이고, 삶 자체이다.

 

사르트르는 글쓰기를 하면서 기쁨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강력한 각성제인 코리드란을 입에 한 무더기 쑤셔 박고 자기 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써내려간 이력이 있다. 그는 글쓰기의 방법론 중 쓰기로서의 사유형성을 논한다. 그러니까 글을 쓰다보면서 언어와 언어, 그리고 뼈대로 깔린 논리는 어떤 체계적인 관념의 질서를 갖고, 나아가 의미형성까지 한다. 나 역시 사르트르처럼 이런 글쓰기의 이상한 현상에 괄목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생각이나 사유보다는 써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마치 자신도 예상 못하는 음계를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글쓰기에서 사유의 주체적인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글쓰기의 항상성과도 같다. 글쓰기 자체가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는 측면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의식의 구조를 전면에 드러내는, 미묘하면서도 자명한 글쓰기를 통해 나 역시 기쁨을 알았다”.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언어와 기호로 풀어내는 것은 인간다운 것, 참다운 것이며, 이야말로 선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수사적인 꾸밈이나 거짓 없이, 따라서 어떠한 기만과 위선도 없는 철두철미하게 진실 된 글쓰기야말로 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다. 단순히 언어와 기호의 집합, 무미건조한 나열을 뛰어넘어 끝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그는 문예를 창조하고, 사상을 불러낸다. 쓴다는 것이 비록 많은 고통 아래서 파생되는 것이지만, 무릇 육체적인 노동이 그렇듯 정신적인 노동 역시 순탄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글쓰기는 순전히 차단된 고독안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책을 같이 쓸 수도 있고 논문도 같이 쓸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통적으로 모든 성과며 저자의 실력, 명예와 가치를 단지 한 명의 저자가 한 명의 텍스트를 쓰는 데서 기인한다. 이런 풍토는 쉽사리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쟁이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글을 손질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자기 글에서 그는 왕이며 온전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 텍스트의 실력이 떨이진다손 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존심이 있고 자부가 있다. 그들 역시 성공을 원하지만, 스스로로 말미암지 않은 성공은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도의 불타는 정념이자 열정이니 장신정신에 버금간다 하더라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잔잔한 음악을 들어도 그의 마음 안에는 풀리지 않는 불안 같은 게 있다. 이는 글쓰기의 원동력이지만 정상적으로는 고통이다. 쓴다는 것, 이는 단순히 내뱉는 게 아니다. 침이나 말 따위를 내뱉기는 쉽다. 하지만 정성들여 훌륭하게 예술적이고 혹은 학구적인 글을 형식에 맞춰 쓴다는 건 고등의 작업이다. 글을 쓰는 순간 모든 목적론적 의식의 안개는 걷히고, 진실의 빛이 투명하게 내리쬐는 걸 느끼노라면, 그 누구도 그런 개시, 그런 육박함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창조란 정말이지 기묘한 것이다. 자기학대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그 어떤 측면에서도 이에 다가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읽지 않고 쓸 수는 없다. 카페인과 담배는 일종의 자기학대이므로, 다변과 내뱉기로서의 글쓰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커피와 담배를 한다면, 그 필자에 대한, 정신적 깊이의 문제가 연루할 것이다. 그러니까 좀 단순한 가설이지만, 무릇 질료가 모여 형상을 빚어내듯이(여기에서 빚어내는 행위자는 글쟁이라는 한 명의 존재자일 것이다), 글쓰기에는 임의의 한계도 있을 수 없고 임의의 정합성도 없다.

 

그리고 작가, 한 위대한 소설가는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녀의 숨결을 기억하고, 언제나 감동적으로 술회하고 흐느끼기까지 한다. 인간은 굴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엄밀한 철학들이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을 정점에 세우듯이, 작가야말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다. 그래서 진정한 작가는 드문 것이다.

 

명문대에서 학위를 따거나 박사학위까지 준비하는 자세도, 거기서 얻는 경험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모든 지식인과 문예가는 무엇보다 글쓰기와의 대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 규정하는 독자자적이고 개별적인 행위’, 요컨대 텍스트와의 승부로 말미암아 얻는 종합적인 지해가 거의 당위적인 수준에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글쓰기란 자기동일성에서 시작해서 기호, 언어로 자신의 학구적인 시스템을 반성의 위치에서 대자적인 사유의 호흡을 통해 즉자대자(총체)의 층위까지 개시하는 일련의 정신현상학, 사르트르의 용어를 비꼬아보자면 [집렬체적 타성태]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비록 언어나 기호의 연산이 하나의 균형을 이루어 논리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갖추면서 텍스트라는 무한한 형식으로써 투사되더라도, 우리는 그 투사를 단순히 신경증의 일종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승화에 가까운 것, 리비도를 좀더 고차원적인 층위로 도약시키는 것, 즉 일종의 변증법적 전환과 같이 그 한계와 엔딩이 없고, 이에 따라 인간정신의 한계도 쉽사리 예단할 수 없거니와, 어찌 보면 인간역사의 줄기찬 과정, 그 피상적인 현실성의 실증주의적 기록까지 망라하는, 그러니까 역사의 가지성과, 그 가지성 안에 숨어있는 인간적 실재의 미시적인 기투까지 연합하여, 무한하고 다양한 이 세계의 종합적 비전을 설명하는 계기(moment),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주목하는 글쓰기의 현상학적인 퍼스펙티브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글쓰기의 주제가 일련의 군집체를 이뤄야 한다는 것, 즉 일관성을 가지고 더 깊은 의식지평의 확대를 겸비함과 동시에 대중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양을 갖춰야 한다는 건 지식인으로서는 압박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예술의 창작도 마찬가지다. 만일 글쟁이가 글쓰기에 대한 프로페셔널리즘이 없다면, 그 글은 잡다한 산문이나 운문이 될 것이다. 아니면 그런 구별도 불가능한 엉성한 낙서가 될지도 모른다. 정작 위대한 글은 산문과 운문의 형식적 구별이 불필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피네건의 경야, 혹은 말라르메의 작품의 차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감히 운문과 산문의 규격을 깨는 데 어떤 자격이 있다고 광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문단을 뒤흔들 정도의 소질은 있어야 그런 규격을 규정할 위치의 자격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게 아닐까.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중심화두로 떠오른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 그런데 정말 나 자신에 대해 알까? 사실 난 글쓰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 그런데 정말 글쓰기에 대해 알기는 하는 걸까? 정확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텍쥐베리가 말했지.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완전한 인식과 지각의 단계일까? 어디서부터 왜곡이 이루어지고, 우리 의식은 어디서부터 정확한 세계파악과 자기 파악, 그리고 그 관계망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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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생활자의 삶. 스물여섯에 삼십 만원을 타서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간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취미생활과 기호식품, 교통비 정도를 쓰는 것이다. 언제까지 나는 이런 생활을 해야 하나. 이런 유의 삶을 지난하다고 한다면 마땅한 형용사를 활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생활의 저변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깔려있다. 그야말로 진중한 고독이다. 이제는 서먹하지 않은 감정이다. 인간이 감성에 따라 행동하는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만일 그러그러한 감성을 느끼면, 인간의 의식은 그 감정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이성에 대해서는, 감성적 편린들을 거부하는 형태를 띠는 이성의 화살은 우리 생의 방향성을 이끄는 배의 선장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성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감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감성이 사태이고 이성이 사유라면, 당연지사 이성을 설계하는 것은 감성이겠지만, 역으로 이성 역시 감성을 설계하는 것이다. 어쩌면 서른부터는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 이성이 감성을 내포할 것이다. 하지만 감성에는 표현의 문제가 있다. 이성은 감성의 폭을 외면적인 차원, 현상학적 차원인 나타남에 있어서는 폭을 늘리거나 줄인다(과장과 소침). 이리하여 이성의 질적 차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이성은 임기응변이거나 패턴적인 행동구조에 가깝고,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이성은 지혜이다. 하지만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아니 의식이라는 구조적 인식의 종합적 장이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논필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부딪기며 살아가거나 반면 혼자서 독고 한다 해도, 상처는 남는 것이고 세월은 역마살이 종말을 맞은 것처럼 한 공간에 머무른다.

 

우리의 생은 개별적인 것이고 존재자로서 지남하는 바는 타자의 외부에 있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타자이다. 이 나무, 저 사람, 심지어 친구나 가족까지도 결국에는 파경에 이르거나 사별할 운명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죽을 운명을 타고났다. 즉 동일자인 나는 오로지 산다는 것(과정)에만 의지해야 한다.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로소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섞여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분명 안도의 순간일 것이다. 마침내 동일자와 타자는 과정으로서의 생과 어우러져 천천히 부드럽게 녹아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한갓 유행이 아닌 연대관계가 상징하는 철학 같은 것이다. 오직 시대정신만이 혼자라는 것에서 자유롭거니와 고독에서 해방시켜 준다.

 

창가를 바라본다. 점멸하는 햇살의 점묘. 나는 항상 바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 타성에 젖은 사람의 무리, 그들을 역겹게 생각하는 나와 동시에 역겨움을 지긋이 응시해야 하는 나 사이, 그러니까 그들이 역겹다는 사실을 주조한 나라는 기조와, 내가 안고 있는 역겨움의 기조 사이, 이러한 이중화된 이면들의 양극화된 간극, 이것이 바로 후설이 주장한 의식의 현상학적 차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러한 무의미한 것과, 내가 문예와 철학 즉 언어라는 숭고한 신비에 대해 말하자면 이러한 유의미한 것 사이를 가로지르는 청명한 햇살과도 같은 생각의 질주를 존재자의 인식론적 이유인 코기토(cogito)와 등가적인 것으로 반성적인 규정을 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어떤 환멸적인 상황에 빠질 때면, 나는 인위적인 생각의 전환을 모색했다. 그러나 만일 사물 자체로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 밖에서 사물의 변화를 논한다, 이를테면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사고하자!’는 외침을 자기에게 전가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거나 그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슨 코기토라는 데카르트적 인식은 현상학에 있어 과녁의 정 가운데를 겨냥하는 것이다. 반면 사물 그자체를 향하는 방법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적과 다른 결과의 진행)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아도르노(부정변증법)적 데리다(해체론)의 능선을 타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상학적 층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층위가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으로 환원되어 일심동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해는 점차 서쪽으로 기울면서 사영(射影, 수학적인 의미)을 그리고 있다. 모든 형태와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원본의 모사에 매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인 질서의 구획을 잡기. 과연 언어가 그자체로 의미가 있을까? 언어가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은, 각각의 낱말과 문법의 구조적 차이를 구성하는 논리적 질서가 심급으로서 대상화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가령 지시체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낱말이 그 의미론적 특성을 지시해야한다면 주변 모든 것(전체)과의 차이적 연결 즉 차연에 의거하는 것, 이른바 그러한 복잡미묘한 논리적 특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 아도르노가 말했듯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그 대상을 둘러싼 주변을 정확히 포착하면서부터, 말하자면 전체적 배경을 탐색하면서부터, 겨냥하고 있는 사물(대상, 인과-과정과 결과+작용과 반작용, 객관적-물리적 물, 존재자, 인식으로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구체적인 인식은 태산명동서일필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음미한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 그 순수한 개별자만을 단독으로 놓고서 관찰하기에는 불가능하다. 하여, 앞서 말한 논리적 질서란 전체를 매개한 차연의 요해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 개인의 생도 개별적으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전체와의(세계, 특히 공동체와의) 매개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의 전체성과 매개의 개념이,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의 개념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의 개념이 한 개체의 기투의 과정의 근간을 관류하고 있음을 이론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말이지 세계와 삶의 문법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종속에 유한한 이상 논리적인 질서는 우리가 이해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지 도처에서 마치 신처럼 대변되며 일련의 개체적 한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물리적인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방사선처럼 뻗어나갈 수 없는 개체적 지의 한계이다. 하나의 사실은 그 어떤 위대한 사유도 개체적인 지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한 개체가 다다를 수 있는 정신이 과연 무한할까? 그리고 우리가 공통개념에서 사유의 기반을 건설하는 이상, 그리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장이라는 사실에 의거하여, 의사소통의 문헌학인 학문의 세계에서 볼 경우, 물론 한 지식인이 이를 계승해 발전시켜 자신의 이론을 개설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지적 징검다리이자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입장을 좀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별적 주체의 극한의 기투는 전적으로 지적 교착상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문이라는 공통개념의 파노라마, 이른바 정신적 의사소통의 장의 가외에 있는 것으로 비롯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도 어떤 개인적-사회적 범위 즉 인류적 범위 이상으로 도약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기나긴 질곡을 가진 연속성적 역사성의 인식론적 중핵인 인류적 지, 이른바 유적 지다. 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시간성에 밀려들어가면서 시간의 상속자에, 그런 반면 시대적 가지성에 유폐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실증주의적 역사성 즉 학문의 문명적 특성에 대립되는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개별자적 가지성의 한계이다. 전자는 통시적인, 후자는 공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최소한 인류가 담보하는 전체이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거대하면서 장대한 인식자인 인류의 지성은 실증주의가 빚은 명확한 증명의 총체, 즉 인류역사가 구성하는 진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 모든 것이 쌓여간다는 생각에 우리가 율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상 이상으로 거시적이다. 하지만 나라는 개체는 여전히 시대적 시간성에 괄호치기 되어있다.

 

양주에서 보낸 7, 그리 좋은 삶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하지만 언젠가는 알려야 할 것이고 내 삶의 도정에 뚜렷한 질료가 될 것이다. 아마도 회구해보자면, 이 어두운 곳에 들어와서 나는 많은 젊은 패기와 한을 품었던 것 같다. 이 대자연에서 나는 나의 운명 속에서 자유의지란 나의 지식과 사유 말하자면 정체성 같은 것이고 항상 자기극복과 초월을 통해 비록 관념적인 삶을 살았지만, 내 삶의 특이한 궤적은 그것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생이 길다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인간이 늙는다면 인간은 인생의 여분을 사는 것이다. 그는 기능적이고 무의미한 인물로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젊었을 때, 즉 청년기라는 정상에 있을 때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기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도의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말은 단순히 글자 그대로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술도 포함되고 재능도 함의하고 있고, 이런 개념들에는 본질을 산다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젊었을 때로 한정된다. 여분의 늙은 삶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오로지 정상에서 달리는 삶(정상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열정이 가장 큰 시기를 말한다)을 꿈꿔야 한다.

 

날이 저물고, 나는 약 봉지에서 원형으로 된 자이프렉사 10mg를 꽁초 담는 통에 던져, 녹여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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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시적으로 표현하기. 미학에 관한 시론을 실성한 듯 잘난 체하면서 주절대는 것(구성하는 이성)에 더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작품)과 함께하면서, 미학이 가리키는 대상으로서의 손이 즉 미학을 구성하는 언어가 대상으로서의 사물 그자체’(구성된 이성)와 현동화 되어, 구체적인 지식과 시학이 동질적인 비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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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에 나갔다. 시야가 확 트였다. 멀리서 지하철이 오기 전 저 너머에서 불빛이 번쩍이며 연속적으로 우리를 비추듯이 가을 정오의 자명한 햇살이 비친다. 이렇게 확연한 현실태는 더 이상 자신이 환영의, 그림자의 세계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즉 특권적인 장 비로소 실존론적 차원에 입문하는 하나의 계기와 같은 것이다. 이 계기가 바로 투기적 분노의 임계점을 지나서 곧바로 돌직구처럼 가차 없이 육박하는 끓어 넘치는 용광로와 같은 열정의 단초다. 이런 단초의 무수한 임의들을, 즉 사고들을 슬라이드 도형 식으로 무수한 노에시스를 만든다면, 그리고 이 노에시스들을 합친다면, 그제 서야 이는 노에마가 정초하는 순간을 개시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막을 수 없는 한 개인에 대한 지적 상승에 대한 축복에 대한 상징이다. 이러한 도정이 바로 현상학의 가장 기초적인 화두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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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걸었다. 덕계역사 위에 입구가 있는 개 같은 자전거 도로를. 이 끝이 없는 아스팔트를, 널 부러져 있는 개들을 보며, 그리고 이제는 조잡하게 느껴지는 지루한 푸른 하늘을 보며. 야생화들이 양주의 구석진 변경에서 자란다. 자전거도로의 짜증날 정도로 많은 자전거의 행렬, 솔솔 불어오는 무심한 바람. 그리고 세월의 풍파가 스며들어 있는 서글픈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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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그러니까 독신자의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다. 나는 이제 혼자인 것이 전체인 것을 직시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정확한 의미에서 개인이다. 그러나 의문이 스친다. 사회 없는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한 개인이 탄생하려면 마땅히 사회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출생을 비롯하여 인류가 다른 종을 절멸시키고 지구를 풍요로 물들인 것도 고도로 발전하는 사회에서 말미암은 것, 즉 사회야말로 역사 그 자체며 공동체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도처를 가리키는 지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개인’, 그것은 사회 밖에 머무는 지자, 문학적인 묘사가 논리적인 층위를 뛰어넘는 차원에서의 지평에서의 개인, 존재론적 완성을 나타내는 개인 즉 존재자에서 존재를 추출해낸 종합적 지혜의 지식인, 그러니까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전범을 나타내는 한 개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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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하철을 탔다. 역시 진지해지고 싶으면 밖에 나가 전철을 타고 의정부 시내에 가는 것이다. 의정부는 너무 화려하게 변모했다. 신세계 백화점에, 50개가 넘는 다층 커피체인점들. 신시가지 쪽으로는 끝없는 고층건물들이 있고, 경전철은 무시무시한 첨단을 표상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만 산 지 14, 이곳은 내 고향과 같은 곳이다. 비록 앞에서는 양주에서 더 오래 살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양주에서의 삶이 평생으로 이어지리라는 확신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마 난 양주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다. 의정부는 양주 바로 옆에 있다. 그리고 난 의정부든 양주든 둘 다 잘 개발되어 주요도심으로써 화려하게 지도를 수놓았으면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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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때는 범죄와 깡패 유흥의 도시라고 불린 의정부. 하지만 어느덧 유망한 도심이 되어버린 이곳. 나는 차 살 돈이 없었으므로 걸었다.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언제나 피곤한 일이다. 나는 제발 하루빨리 차를 사서 지하철에서 탈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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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간 곳은 스타 벅스. 원래 싼 개인카페를 선호하는데 의정부에는 개인카페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가장 선호하는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요즘 커피체인의 커피 값은 사기에 가깝다. 그들은 엄청난 돈을 챙긴다. 쁘띠부르주아들과 부르주아는 솔직히 말해 재산불리기의 90퍼센트는 커피체인에 의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발견한 커피체인은 진짜배기 블루오션이었다. 피시방이라든지 노래방은 댈 것도 아니었다. 20원으로 몇 초 만에 7천원 벌기.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성황을 이룬다. 하루 수익금만 몇 억. 그들에게 다른 사업 분야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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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카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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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한적하다. 종업원에게 카페라떼 6Shot ICE 대자를 시켰다. 커피 내리는 소리와 묘한 이명소리, 사람들의 무의미한 발성음이 무식하게 섞여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나는 알 수 없는 무망감을 느낀다. 청바지에 하얀 추리닝을 입은 주인장이 커피를 가져온다. 커피의 향기와 혀로 느낄 수 있는 맛, 그리고 몸이 지각하는 맛은 알 수 없는 이국의 그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했던 사실이지만, 우리의 현대화적 과정은 곧 서구로의 직진이었다. 우리는 서구의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비롯한 악습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빌어먹을 시대에 뒤쳐진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내가 인식하는 건 서구의 지적 전통의 체계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정작 우수한 한문과 일본어, 한글의 집약체인 한국어를 완벽 개조해야한다는 외적 필연성을 담보하는 바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당위성이 혼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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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커피 한 잔에, 나는 미시적인 위화감을 느낀다. 곧 이 미시성은 가시성으로 치환된다. 국가는 한국어, 한글에 대한 정립을 새로 개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학자들, 요컨대 기호학자와 국문학 교수들 그리고 모든 외국어 전공자들이 힘을 합해 제도적인 한국어에 메스를 가해 더 풍요롭고 문법적으로 우수한 한국어를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언제까지나 보이지 않는 손에 국어문화를 내맡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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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자신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날 일어난 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하건 하강하건 지속적으로 회전하면서 성숙해지고 진보하는 자신의 사고의 공전을 언어적 형식으로 묘파한 적 관점으로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역사적 관점이 인류학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에 비례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주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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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우리는 세련된 지적인 명사들을 화용론에 의거하여, 그리고 좀더 많은 명사, 고유명사, 대명사, 등을 만들고 구문론이 일신해야 하는 구조적인 한국어의 틀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가령 미국식으로 문법구조를 과학적으로 고치자는 게 아니라 데리다의 차연개념에 의거하여 비스무리하면서도 완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고유명사와 문법적 구조를 완전히 한국어폭발의 전회처럼 끝없는 가지치기 나무처럼 문법자체를 확대 개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연체는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고, 빈곤한 문체를 가져 난해한 철학적 글들을 마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처럼 하나의 서사시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문의 아카데미즘과 문예예술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정부예산의 15조를 할당해 박근혜는 교수들에게 하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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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커피 잔은 비어있다. 마치 우리네 한국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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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내를 걸었다. 언제나 버거킹, 스타벅스, 앤젤리너스 커피, 탐앤탐스, 파스구찌, 맥도날드, 피자헛, 도미노 피자, 차이니즈 레스토랑인 지동관, 롯데리아, 홀리스 커피, 그 외에 이름들은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장군 동상이 있고 중앙로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백화점 쪽에서 시민의 편의를 위해 돈을 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생커플들의 행진. 여자 쪽을 쳐다보면 왠지 눈이 시리다. 다만 쓸쓸한 감정에 휩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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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한 상실감에 흐느꼈다. 생에 처음 성인 남자가 되어 운 눈물 중 가장 깊고, 가장 멀리 다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얘기, 단지 고통 속에서 점철된 작은 이야기를 소고할 뿐이다. 내가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은 어떤 사고(事故)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연쇄적이면서도 동시적으로 벌어져 나의 숭고한 영혼을 역겨운 현실에 처하게 했다. 나는 무간지옥에 있었고 살았어도 죽어있는 인간이었으며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무엇보다 자유론에 대해 궁구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탐색은 곧 인간실존에 대한 탐구다. 정말 존재한다는 것, 작위적이거니와 비당위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본질을 도구라고 이름지울 수 있는 것들, 요컨대 (연애·오디오 생활·독서·철학적/문학적 글쓰기)같은 것에 몰두하는 것,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느낌이 곧 영혼이 누리는 특권적인 실존의 영역이며 해석학적 시도로서 생성된 대자태적 차원에 존속하는 기의의 유위(현상계, 실제세계). 반면 본질에서 즉자태의 차원에 있는 기표의 유위(시뮬라크르). 이들의 해석론적 차이는 마치 존재자에서 존재를 추출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이리하여 전자는 본질의 실천이고, 후자는 현상 너머의 물자체, 즉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개시한 관념론이 정초한 문헌학의 계보가 나타내는 눈부심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은 데리다적 기표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좀더 배움에 가까워지는 그때에 즉흥적으로 논하기로 하자.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언명은 존재론사를 두루 보아도 논리적으로 자명타당한 것이다. 그는 이 언명의 자세한 풀이를 존재와 무에 필설함으로써 예의 언명(화두)을 통시적인 전개요소에서 눈이 아리도록 위엄 있는 공시적인 거대담론을 창시했다. 즉 후설이 창안한 현상학은 그자체로 하나의 혁명적인 선험적 엄밀학이었는데 어디까지나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현상학적 요소 즉 나타남에만 주목하여 이를 극한까지 밀고 나아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말이다. 즉 그는 현상학에 순수성이라는 개념어를 집어넣으면서 현상학이라는 관념적 총체를 그의 선배가 규정한 것과 다르게 좀더 추상적이고 선험적이거니와, 세밀한 주체적 인식론의 쾌거로 만들어버렸고, 이원론을 집어삼킨 일원론을 굵직한 틀로써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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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 후회가 복받친다. 모든 과거의 편린들은 후회로 전체화된다. 모든 것이 후회 안에 있다. 토머스 하디의 말처럼 현재에서도 과거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결국 후회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후회는 언뜻 과거로의 복귀를 전제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만일 과거가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무한히 반복된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똑같은 선택,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되돌려야 된다는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치는 것, 다시금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가 다시 새로운 삶을, 청춘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감정의 회전의 회전을 넘어서 강하게 폐부를 찌른다. 나의 몸짓, 생에 주어진 시간을 나는 은빛 날개, 결국 생의 약동은 자유의지만이 불을 지필 수 있는 것이었던가? 우리가 가진 것은 현실이 아니라 생각, 의지 같은 것인가? 마침내 고결한 생각만이 덩그러니 오래된 관념처럼 영원토록 내면이 늙어버린 우리 안에 살고 있는가? 결국 할 수 있는 건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독백뿐인가? 나는 소리를 죽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곤 멈출 수 없는 흐느낌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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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슬픔과 비애에 매개된 각종 말할 수 없이 내밀한 범주들이 기마병처럼 창을 들고 말을 타며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면, 나는 그것들을 시간의 시차(視差), 그러니까 시간 속에서 현성하며 유위변전 하는 과거 생의 파노라마를, 소급의 형식을 빌려 그 장구한 나 개인의 역사적 입체성에 통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급이 아니라 단순한 시민성으로서의 반추도, 회상도 좋다. 어떤 것이든지 나 자신의 정체성이 도대체 그 윤곽을 따질 수 없이 무진한 상실감의 연쇄에 미친 듯이 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기야 나의 폐부는 구조주의의 실천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공존의 공간에 분배된 변별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 즉 폐부에 분배된 감수성은 로크적 변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rassi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비애와 슬픔의 편린들, 즉 절대적인 고독, 외로움, 쓸쓸한 감정 등이 단 하나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도 못 자게 생각의 종횡무진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원론적인 현상학적 나타남은, 좌우지간 내가 미친 듯이 가족이 듣지 않게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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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또 걸었다. 나는 혼자였다. 불빛들이 휘황찬란 도시를 물들였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오직 중학생 커플들, 고등학생 커플들, 갓 스물을 넘긴 커플들만이 자신들이 생에 정점에 도달해 용렬하고 기운차며 자신들이야말로 직선의 시간, 혹은 시간이란 직선 안의 현전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포부를 가진 대가적 자긍심을 갖는다. 목하 그러한 자긍심을 가진 소녀, 소년이 걸으면서 서로 사랑놀이를 하는 차원이 실존적인, 특권적 권리의 최고도에 도달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특권의 가장 중심적인 차원, 즉 방탕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matrix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그렇듯 순간적인 것에서 영원성을 궁구하는, 예술적 삶의 희귀한 것들을 가늠하여 최상의 질로 선회하는 것, 이른바 절대적인 질로써 무한한 양을 도출하는 방법, 따라서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자유의 영원성이요, 그리고 예에서 말했듯 자유는 젊음과 패기나 도리어 가차 없이 육박하는 교양적 무한성에서 합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동시에 얻기는 힘드니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주어진 바에 따라 즉 도상에서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는 아스팔트를 걸을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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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이미 스물여섯의 끝자락에 도달해있다.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슨 선택? 대자적인 것에 머무는 것 즉 혼자서 전체적인 인상에서 운명에 의해 어떤 강령을 하달 받는 것, 혼자 있어야한다는 것. 이 빌어먹을 역사의 수레바퀴야! 너라는 사람의 이름이 운명이 아니라면 역사일 것이다. 세상은 자유의지와 운명과 우연 이 세계가 변증법적 관념론에 의해 상호침투하여 마침내 만들어내는 건 절대자조뭐 이런 것인가? 좋아. 좀더 권리적인 면을 건드리고 싶다. 좀더 우리의 사생활을 말하고 싶다. 어쨌든 이는 내 이야기이고, 내가 말하는 만큼만 당신들은 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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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첫사랑을 했다. 그 애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의 문제에 관해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사랑은 중학교 1학년 끝이었다. 그애의 이름은 남궁은. 아주 이쁜 미소녀 같은 아이였다. 나는 장롱을 열어 그녀를 꺼냈고 그녀의 음부를 거칠게 만지는 꿈을 꾸었는데 그러다가 잠에서 깨었다. 처음으로 몽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또 찌질이 다운 짝사랑을 하기 시작한다. 그 애의 이름은 오민혜. 이쁜 편이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여자애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가인과도 같은 존재. 나는 정말로 그녀와 자고 싶었다. 그녀가 시험지를 받으러 나갈 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앞으로 상반신을 선생님께 내밀었을 때 보였던 그 치마 위로 튀어나오는 엉덩이에 나의 성기는 나도 모르게 사정해 버렸다. 수업 도중에 사정한 나는 윤리위원회에 불려가야 했다. 나는 성적으로도 그녀를 그렇게 좋아했고, 심미적으로도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나는 그녀가 엎드려서 내 쪽을 지긋이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투명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심미주의의 홍일점이었다. ‘’‘’‘’, 나는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애들에게 고백조차 꺼내보긴 했는가? 나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 그리고 현금 스물여섯의 끝자락에서도 나는 여전히 찌질이, 히키코모리’, 좀더 고상한 말로 표현하자면 이방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명사들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였고, 이러한 깨달음이 나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앎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지식인이든 사람이든 이는 짐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 시내에 나가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층위에서 영감을 받았다. 최소한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면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실감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내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얻은 깨달음은 이 소설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유폐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서 느끼는 고독이 좋았다. 나는 사랑하는 소년에 대해 끊임없이, 거의 병적으로 황홀경에 빠져 연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분 좋은 우울과 서글픈 생각, 때때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공감각적인 나르시시즘, 이런 것들이 나를 매혹시켰고, 내 유년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지금 내 나이 스물여섯에 나는 마약성 수면제인 스틸녹스를 먹지 않고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 혐오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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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내는 이미 밤의 저편으로 미끄러졌고, 별들은 이 어린 젊은이들을 축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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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 속에 나는 한 명의 이방인일 뿐이다. 단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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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나와 곧바로 카페로 가는 길로 직진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는 문인의 자질도 없고, 그렇다고 학자의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뜨내기로 살아가는 게 최상의 삶 아닐까 그런 까닭 있는 생각을 하고 있다. 뜨내기, 얼간이, 비애에 젖은 부모한테 얹혀사는 찌질이 같은 것. 물론 부모한테 얹혀사는 걸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수입이 있다면 그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프다는 구실로 기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도리가 없어 사실상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지 운명 때문이다. 지저분한 운명, 말하자면 불쌍한 한 가닥 인생인 것이다. 한량이 될 배포도 없고, 말하자면 히키코모리인가? 변화하는 성질의 대상을 예로 들자면, 변화해야 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이다. 만일 내가 현실을 바꾸는 힘이 부족하다면 약이라도 천천히 끊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이프렉사10mg : 항정신병제를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금단증상은 어쩔 수 없다. 견딜 수밖에. 그러나 이 행위가 가장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마치 밤에 각성제를 먹은 듯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그럴 테밖에. 왜냐하면 거짓 4년 반을 밤마다 먹어온 약이니. 그나마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사해야 한다. 끊자마자 발작에 시달리는 현상 같은 건 없으니까. 단지 1달 동안 정신 과잉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한 6개월까지는 사회공포증이 있을 수도 있다. 혈압이 올라가 안압이나 뒷골이 아플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예비용으로 혈압약을 먹거나 타이레놀을 먹을 수밖에. 그리고 잠이 안 오는 것은 수면제를 3알정도 자기 전에 먹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박힌 칼날을 뽑고 지혈까지 해서 순리를 찾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이것이 바로 양약의 무서운 점이다. 양약은 일단 끊으면 강한 금단증상이 1개월은 간다. 양약이 효과는 좋지만 단점도 찾으려면 수두룩하다. 서양의 것이라고 무조건 숭배하면 결국 나쁜 것까지 숭배하는 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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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을 추()자를 써서 영검한 기운을 풍기며 돌아오는 명절. 내가 산사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조상의 죄가 만든 업에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에게 내가 모를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귀신들의 원한에 성불을 비는 것이었다. 향불을 피우고, 경을 외우며 청신한 마음으로 108배를 하고, 의연한 정신으로 마지막에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내 업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석가의 뜻한 바라면, 이는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것이고, 그로인해 내 마음은 좀더 편해질 것이다. 마음만 편해진다면 현실이 그리 괴로우랴? 불가가 관념론의 절정이라고 떠들어대는 무리들이 있다지만 이것은 철학학파의 하나가 아니라 사적(史蹟)인 종교이다. 그 기원은 무려 2500년이 넘어간다. 그리고 이 시간의 숨결에 무수한 철학적 천재라 할 고승들이 매달려 있다. 이 길이는 서구철학의 역사와도, 예수의 탄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석가 이전의 무수하게 진리에 대해 탐구하던 인도철학자들까지 합친다면, 이는 서구철학과 유대교의 역사와 맞먹는 시간의 길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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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어가면서 사색에 잠긴다. 하이데거가 걸었던 이 숲길과 이곳에 대한 발걸음. 그러나 내 생각은 좀더 현실적(세속적)이다. 나는 향정신성 약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각성제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내가 만일 성인adhd라면 나는 각성제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주치의인 교수는 내가 성인adhd는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내가 위안이 되는 건 이미 각성제를 최고용량으로 먹어보았다는 것과, 각성제가 내게 심어준 젊음의 열정적인 기분과, 그 약을 자세하게 안다는 사실이며 다시 한 번 다른 의사에게 가는 건 어떤지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점의 황홀함을 사랑하고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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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한 번 늙은 나이에 대학에 도전해야 된다는 것, 이 세 가지가 내게 압력이다. 내 발걸음은 사뭇 빨라진다. 의식을 찾으니 이미 카페 앞이다. 내게 이 세 가지 발로는 강박증의 증세처럼 다가온다. 왜 내가 이런 강박증을 갖게 되었는지는 독자들도 알 터이다. 왜냐하면 나는 양주에서 보낸 칠 년을 오로지 학문과 글쓰기에 대한 전념의 세월로 탕진해버리고 이제 갈 길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것이다. 비록 슬럼프는 극복했다손 치더라도 내 자아는 결박당해 있다. 나는 사색의 만화경 같은 세계에 빠지지 못한지도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시나브로 쓸쓸해지는 삶에 당도한다. 카페 겔러리아에서 진한 커피나 마실 도리밖에.

 

가을하늘의 푸름은 언제나 유년의 색채와 함께한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았지만 한 발 한 발의 인식이 신비스러운 감동과 순간적인 생의 약동으로 가득 차 있고, 희망 혹은 순수한 욕망이 끓어 넘치듯 메뚜기처럼 뛰어오르려는 것 하며. 그 어떤 개인이 자신의 유년이 자신을 주조하는 근본이라는 점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한 작가에게 있어 유년에 대한 인식은 성년이 된 자기 자신으로서는 벅찰 정도로 강렬한 세계에 대한 영감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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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인문학이라거나 글쓰기, 사색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이런 것들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똑같은 행위를 하고 똑같은 유의 관념론적 해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혼자서 부유하는 관념일 것이고 공통된 개념의 총체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관념에 대한 것들, 예술이나 학문적인 것들이 쓸모는커녕 한 개인이 인식하기조차 힘든 언어유희적인 것들(어떻게든 실체에 다가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평생에 걸쳐 이것을 탁마하는 정신의 장인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을 지독하게 훈련시키고 있다는 걸 자신이 아는 순간, 그들은 단지 학문을, 철학을 그것의 도구를 통해 일련의 기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인식하기도 어렵게 줄기차게 난해한 글들이 매우 조그마한 의미(sinn)만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 글의 정당성마저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후설은? 하이데거는? 사르트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는 좀더 지시체의 길이가 그 자체로 의미를 초월하는 기표예술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음악과 회화가 그 음계적 기교와 추상적 시도로써 무한한 독특성을 일종의 예술성으로 인정받듯이 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이 달을 능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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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학계에서 범주론적으로 구분해놓은 공통적 개념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관념의 세계의 눈금을 맞추어야한다면, 즉 그런 정론적 체계 안에 자신의 정신적 규격을 밀어 넣는다면, 그것이 지에 대한 정확한 시도요, 인문학적인 시도라 할 것인가? 이렇듯 인문학은 지극히 규범적인 의사소통의 장이면서도 그 장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이런 장성(場性)과 장외성(場外性)의 종합, 보편성과 개별성의 종합이야말로 현대철학이 추구하는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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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하고 비근한 생, 나는 따분하고 지리멸렬한 현실에 역겨움을 느꼈다. 계속되는 삶에 대한 구역질. 부정이 그자체로 부정이 될 수 있는 것, “순수 부정으로서의 생, 그것 또한 철학자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방정식이었다. 왜곡되고 굴절된 삶을 더 비틀 수 있는 것, 부정조차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적인 태도. 저항과 투쟁, 곧 잉크의 멈추지 않는 분사. 나는 철학책을 읽을 때 한 번은 곧이곧대로 그것을 읽고, 이윽고 그것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철학에서는 비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비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운다. 좀더 멀리 다다르는 것, 정신편력과 정신방랑 그리고 생각과 그대로 일치하는 나의 글쓰기, 이른바 비판은 하나의 도정적 기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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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로 글쓰기 곧 사유의 호흡을 맞추기, 즉흥성을 관통하는 즉흥성, 작위를 통한 사유. 나는 결코 고매한 사람이 아니다. 나의 실존은 실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속을 배제하려는 세속성으로 인해 발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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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추석, 나는 이 시간에도 자유를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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